메디컬 드라마

[389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3-03-31     이민형

그들 vs. 그들

2020년 7월, 정부의 의대생 증원 정책이 발표되자,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의사들이 파업을 단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전문 의료인이 아닌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이 의료인들 실상을 외면해왔다고 주장하며, 정부가 자신들의 개정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국적인 집단행동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8월에 전국 의사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곧 전국의 의료기관에서는 제한적 진료만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한 환자들의 피해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병원에서는 진료 일정을 감당하기 위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의사들이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전까지 정부 또는 의사들 입장을 지지하던 여론은 양쪽 모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부 정책이나 의사들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의사들의 집단행동 자체만 놓고 보자면 사실 그것은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요구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업무를 중단하는 행위’라는 파업의 사전적 정의에서 그리 벗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담긴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파업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르다는 점에서 그들의 파업이 낯설게 느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일단의 행동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의사들 주장에 쉬이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파업이 코로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파업에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에 대응한 셈이니, 시기가 문제라면 정부에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세부적인 판단보다 앞선 것은 사람들에게 있는 ‘의사’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면서,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전염병 확산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들이 제 역할을 충실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의사들 파업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기실 이 땅에서 건강과 생명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관심사이며,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은 의사라는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낮아진 자존감에 대한 보상 심리는 의사를 향한 기대감으로 표출된다. 의사들에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실력과 정확한 판단력, 오차 없는 예측, 지치지 않는 체력, 환자들 마음을 돌보는 따뜻함, 이 모두를 갖춰주기 바라는 셈이다. 물론 지나친 바람이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또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의사의 상(像)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드라마 속 의사들이 이를 증명한다.1)

그들의 시작

2020년 의료 파업으로 의사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항간에서는 2019년 인기리에 막을 내린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두 번째 시즌 방영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2019년 방영 당시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이 드라마는 ‘성인들을 위한 판타지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이상적인 병원, 특히나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을 그려내며 이를 본 시청자들에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남겼다.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환자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는 환상 말이다. 그런데 그 환상이 2020년 의료 파업이라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많은 시청자가 의사에 대한 상대적 실망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고, 결국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에 대한 기대감 감소로 이어졌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현실과 창작물의 세계를 연결하며, 때때로 착각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사람들에게 민감한 주제, 중요한 역할의 직업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가 그리는 의사 모습은 현실 사회에서 의사를 인지하는 데 적잖이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 드라마를 통해 전달된 의사들 모습은 그동안 한국에서 제작된 여러 의학 드라마를 통해 축적된 의사 이미지의 총체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학 드라마 또는 메디컬 드라마란 병원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배경으로 의료인들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특정 장르의 드라마를 말한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의학 드라마를 전문직 드라마로 분류하기도 한다.) 의학의 분과가 많다 보니 서사의 가지가 다양할 것 같지만, 사실 의학 드라마, 특히 한국에서 제작된 의학 드라마는 일정한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먼저 사람의 생사를 다루는 장르가 대다수 그러하듯, 의학 드라마 서사의 긴장도는 높은 편이다. 다만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과정이 긴장감을 높이는 액션/스릴러 장르 작품들과 달리 의학 드라마는 의사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과정을 통해 긴장감을 높인다. 하여, 의학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대부분 주요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이며, 의료 지식과 기술로 사람을 살리는 신적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반면, 환자들과 수련의들, 간호사들과 같은 주변 인물들은 의사의 능력에 매우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는 존재로 묘사된다. 또한 의학 드라마에는 병원이라는 체제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대다수 드라마에서 병원은 냉정한 의료 산업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병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며, 기업이고, 규율이자 조직이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의료인들은 조직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현실주의자이거나 체제보다 사람이 우선임을 주장하는 온정주의자로 묘사된다.

한국의 의학 드라마는 이 두 개의 기둥, 즉 전지전능한 의사와 냉혹한 병원을 전형적인 이미지로 구축하는 방향으로 서사를 발전시켜왔다. 그 시작은 1980년 방영된 〈소망〉과 1994년에 방영된 〈종합병원〉이었다. 사실 제작 시기만 따져보자면 두 드라마를 하나의 세대로 묶는 것이 다소 무리일 수 있다. 두 드라마 사이에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있고, 그로 인해 장면 연출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 부분에서는 두 드라마 사이에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창기 의학 드라마였기에, 두 드라마는 모두 ‘진정한 의사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원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따라서 의료 행위에 대한 전문적인 묘사보다는 의사의 본분에 대한 윤리적 정의를 강조하는 서사가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환자의 외상 치료뿐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도 해결하는 것이 의사의 책임임을 강조하는, 인류애가 넘치는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들의 상대역으로는 개인의 의학적 역량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인물이나 병원 운영을 우선시하는 인물들이 배치되어, 주인공의 윤리적 직업관을 돋보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초창기 한국 의학 드라마는 이상적인 의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만 빈약한 서사로, 주인공의 훌륭한 직업관이 의료 행위보다는 사람과의 관계, 특히 연애 관계에서 매력 포인트로 돋보였을 뿐이라는 단점이 초창기 의학 드라마의 한계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들의 변화

2000년대 이후 서양 드라마, 특히 미국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 소개되었고, 멜로드라마나 트렌디 드라마가 주를 이루던 프로그램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르물에 대한 기호가 생겨나면서 다양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의학 드라마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의학 드라마가 병원을 배경으로 의사가 등장하는 휴먼 멜로드라마 서사를 펼쳤다면, 이후 제작된 드라마들은 의사들 세계를 보다 정밀하게 다루었다. 특히 수술이나 시술,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상담을 진행하는 장면이 대폭 증가했고, 의학 용어나 병원에서 사용하는 줄임말 등이 대사에 등장했다. (이로 인해 용어 해설 자막이 추가되었고, 이는 곧 의학 드라마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저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병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는데, 병원 자체가 하나의 체제이자 권력으로 묘사되면서 주인공과 마찰을 일으키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었다. 병원은 더 이상 실력 있고, 인성 좋은 의사들이 신에 가까운 전형성을 마음껏 뽐내는 곳이 아니었다. 병원이 의사를 통제하려 하거나, 의사가 병원을 가지려 욕심을 내는 서사를 통해 의사의 신적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서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본주의사회에서 병원이 가진 의미와 책임을 묻는 내용도 추가되어 의학 드라마는 단순히 의사의 두 손이 아니라 병원과 의료 시스템, 나아가 의료 정책 모두가 사람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작품은 2007년 방영된 〈하얀거탑〉이었다. 일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의학 드라마로 실력과 인성을 ‘겸비’하지 않은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준혁은 천재 의사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지만, 그 의술을 자기 뜻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병원의 권력도 쥐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환자들 마음을 돌볼 시간에 병원 내 정치에 관여하고, 출세를 위해 의사들 사이에서 적을 만드는 일에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가 담당한 환자들은 최고의 수술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이외의 돌봄을 받지는 못한다. 그와 대척점에 있는 최도영은 병원 내 권력이나 출세에 큰 욕심이 없고, 환자 중심 의료 활동이 의사의 본분이라 생각하여 치료에만 전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의술에 있어서는 장준혁에 미치지 못하고, 주변 의사들에게도 그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그는 외과의가 아닌 내과의이다.)

뛰어난 작품성은 차치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실력이 출중하지만 출세욕이 있는 의사와 이상적인 의술을 펼치지만 실력이 최고는 아닌 의사를 내보이며 기존 의학 드라마들이 공식처럼 내세웠던 의사의 전형성을 둘로 갈라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장준혁이라는 인물은 〈하얀거탑〉 이후로 제작된 의학 드라마의 캐릭터 설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인공 역의 의사들이 실력은 뛰어나지만 인격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수술실에서 정도 이상으로 호통을 치는 의사, 출중한 실력을 가졌지만 개인적 아픔 때문에 시골에서 의료 활동을 하는 까칠한 의사, 과욕을 부리다 좌천되어 지방병원에서 진료를 하지만 의술만큼은 뛰어난 의사 등 ‘장준혁형(形) 의사’는 한국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불어 그러한 의사 곁에는 늘 최도영형 인간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수련의나 이제 막 전공의가 된 나이 어린 의사들 혹은 매우 나이가 많은, 은퇴 직전의 의사들로 그려졌다. 그들은 아직 실력과 경험은 부족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거나, 이미 어느 정도 병원 생활에 달관한 지경에 이르러 일종의 교훈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포스터

다시, 그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완벽한 의사라는 하나의 신적 전형성을 둘로 나누어 각각의 인물들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인간적 원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한국 의학 드라마의 진일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마치 신과 같이 완벽하게 묘사되던 의사들 이미지가 마침내 결점을 가진 인간의 위상으로 낮아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존재들이지만, 그들 역시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현실적인 의사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즈음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이 등장했다. 의술, 인격, 신념을 나누어 부여받은, 그래서 인간미가 있던 의사들 이미지가 이 드라마로 인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보다 더 신성한 의사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다섯 명의 주인공이 있는데, 이들 각자는 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의사로서 뛰어난 실력(심지어 모두 외과의), 정확한 판단력과 창의적이고 의학적인 접근, 오랜 수술 시간도 의지로 버텨내는 체력 그리고 환자들 상황을 헤아려가며 그들의 마음을 토닥이는 인성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수려한 외모는 기본,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가질 수 있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퇴근 후 모여서 밴드까지 해내는 그들은 말 그대로 ‘갓생’을 사는 의사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이 아프지 않아도 병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후 일반인과 의사의 간극은 현실과 드라마 속 세계만큼이나 벌어졌다. 다시 그들은 신의 반열에 들어섰고, 나머지들은 존경과 실망의 감정이 교차하는 현실을 살게 되었다. 이토록 쉬이 변하지 않는 드라마 속 의사들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살펴보다 보니 문득 그것이 그저 드라마 작가들의 관점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엘리트주의는 의사라는 직업을 그 정점에 올려놓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똑똑하고, 실력이 있으며, (심지어) 이타적이라는 일종의 환상은 의학 드라마 속 캐릭터에 반영된 현실 사회의 욕망이요, 드라마를 통해 강화되는 관점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의사라는 직업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오랜 시간 공부하고 경험과 직관을 갖춰서 한 분야 전문가가 된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다룬다. 그들을 향한 일종의 존경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만이 그러한 존재는 아니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건강한 시민들은 언제 어디선가 터져나갈지 모를 잠재적 불안이 가득한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직장이, 그들의 삶이 한 개인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지는 몰라도, 다수의 안위와는 분명 연관성이 있다. 그렇게 놓고 보자면, 유독 의사를 향한 지나친 기대감과 환상은 여전히 이 사회를 쥐고 있는 성공 중심 사고, 서열 의식, 오직 고위와 고소득만을 열망하는 천박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의사에게도 독이 된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은 그들 역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의사들은 자신들 의지와 상관없이 시민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대중문화를 통해 의사 이미지가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에서) 성역화될수록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의사도 환자도 자신의 모습, 자신의 원형성에서 분리된 채 무조건적으로 기대하고 그 기대감만을 충족하기 위해 기능하는 전형적인 모습의 사회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육체는 치료받을지 몰라도, 모두의 영혼은 병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의사와 환자(시청자) 모두는 각자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성숙한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의식의 성숙을 어찌 시작하느냐이다. 철저한 욕망 중심 사회에서 그러한 관점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다수의 의식 변화에 효과적인 대중문화가 그러한 역할을 해 주어야겠지만, 적어도 한국 의학 드라마는 아직 부족하다 싶다. 그래서 웹툰 〈내과 박원장〉을 추천한다. (원래의 의도대로라면 종교를 이야기해야겠지만, 종교 역시 엘리트주의가 지배하고 있고, 엘리트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지 않은가?) 19년 차 내과의가 직접 그린 이 작품은 TV 속 의사들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박 원장이 고생 끝에 개인 병원을 차렸다가 TV 속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현실 속 의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병원 유지, 가족 생계, 환자 유치 등을 매일 신경 쓰다 보니 머리마저 벗겨진 그의 짠내 나는 현실을 지켜보다 보면, 존경보다 동정심이, 기대보다 유대감이 생긴다. 물론 일부 내용이 의사 중심적이라던가, 아무리 현실이 궁핍하다 해도 의사가 아닌 사람들의 삶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 역시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판타지 드라마에 속은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귄의 한마디

저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존경심은 있었습니다만, 무채색 건물에 매일 많은 환자들을 대하는 삶이 고단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매해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한다는 걸 듣고는 좀 의아해했습니다. 참 순진했습니다. 의사의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 등은 잘 몰랐던 거죠. 어떤 면에서 〈하얀거탑〉은 저의 순진한 생각을 깨뜨려준 작품이었습니다. 작품 속 의사들이 제 환상이나 기대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의사라고 하면 슈바이처를 떠올리던 제 인식의 지평이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 의사와 마주하게 했으니까요. 민민님이 언급한 ‘전공의 파업’과 ‘슬의생’ 사이 간극은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최근 지방 병원에서는 높은 연봉을 줘도 의사를 구하지 못한다는 뉴스를 접하기도 했고요. 반면 ‘국경없는의사회’나 다양한 의료봉사를 해오신 분들도 겹쳐 떠오르고, 저나 가족에게 따뜻하게 최선을 다해주신 의사 선생님도 떠오릅니다.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의사의 전형성과 인간이라는 원형성 사이에 복잡하고 미묘한 모순과 갈등이 공존한다는 지적에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

의사는 인간이지 신이 아닙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인간의 생사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 같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이 아플 때는 더욱 그렇더군요. 기도는 신께 하지만, 눈앞의 의사가 곧 신과 같은 존재인 것이죠. 병원이라는 공간도 드라마 장르에서는 매력적입니다. ‘생로병사’라는 말처럼 질병은 삶의 일부와 같습니다. 그러니 병원이라는 공간은 우리네 인생 이야기가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매력적인 공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메디컬 드라마는 질병이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 사회문제들을 다루기에 적합한 장르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VIP 병동이라는 소재에 눈길이 가곤 했습니다. 같은 환자인데,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점이 마음 한편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현실 같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디컬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사회를 비추어 봅니다. 또 교회란 공간은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야겠지요. 전형성과 원형성의 모순이 존재하고, 같은 환자(죄인)인데 다른 대우를 받는 공간처럼 여겨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추가합니다. 거듭난 의사, 거듭난 병원을 말하려면 말이죠. (다음 글로 법률 드라마에 대해 써야 할 것 같은 부담마저 드네요.)

■ 주

1)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사는 대부분 남성이고, 외과의이며, 반듯한 외모를 가진 고상한 지성인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들은 환자와 상담하는 장면에서 많이 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드라마 속 이미지는 특정 직업, 즉 의사에 대한 사람들 인식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인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류희선 외 3인, ‘드라마에 나타난 의사 이미지와 의사와 환자 간 커뮤니케이션 유형에 대한 연구’, 의료커뮤니케이션, 제6권, 2011, 54-72쪽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