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389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누가복음 6:12-19, 새번역)
예수님에게는 열둘의 제자가 함께였습니다. 어느 한 밤, 급습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잡혀가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이 열둘을 뽑으시며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사도’는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는 아닙니다. 국어사전을 보다가 사도의 의미가 16가지나 된다는 걸 발견하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사도는 스승의 도리를 뜻하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는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한 도리를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사도는 진리와 반대로 생각하는 네 가지의 잘못된 사고방식 또는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가리킨다네요. 관청의 허가 없이 소나 돼지를 잡는 일도 사도라고 불렀다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사도의 사전적 의미들은 이렇습니다.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 또는 어떤 임무를 받고 파견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열둘의 사도를 부르시기 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도 아니고 산에 오르신 우리 주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열두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을 앞두고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만 확인됩니다. 그날 밤, 누가 그 길에 함께 올랐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 ‘홀로’ 산에 오르셨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와 그 일을 의논한단 말입니까. 고심 끝에 부르신 이 열둘은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시간은 단면이 아니라 입체로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도로 부르시는 시점에서 보이는 열두제자의 됨됨이와 자질이 아닌,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마침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열둘의 가능성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열둘의 씨앗을 통해 점점 커지게 될 하나님 나라에 시선을 맞추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반자가 될 유다의 이름까지 말이죠. 이 열둘은 주의 부르심을 받음으로,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이들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보잘것없는 인생들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제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도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정작 자신들은 그 거룩한 길에 놓인 무게와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아무것도 아닌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로 변화하게 됩니다.
열둘을 부르시기 전, 밤새 산 기도를 하신 예수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누가복음 6장 11-12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시던 그때는 그를 어떻게 해보려는 ―곧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모의가 시작되던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을 때부터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자신의 미래를 알고 계셨습니다. 목수인 아버지의 목공 일을 돕던 어린 시절에도, 아직 기적을 베풀 때가 아니라고 어머니의 제안을 만류하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의 귀결을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무거운 걸음 앞에서 우리 주님은 이 열둘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너희는 복이 있다
기독교에서의 사도는 거룩한 임무를 부여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임무를 위해 이 열둘을 부르신 것일까요? 그 당시 흙먼지 가득한 길을 걸으며 더러워진 예수님 발을 닦아줄 사람이 필요하셨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삼시세끼를 챙겨줄 요리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셨을까요? 머리 둘 곳 없었던 예수님의 고된 몸을 누일 장소를 마련해줄, 그런 사람을 찾으셨을까요? 이번에는 마가복음 3장을 찾아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를 읽다가, 사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잠잠한 침묵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갑상샘암 정기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주차장의 차 안에서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성경 구절을 읽는데 그만 울컥하며 두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어떤 대단한 일을 해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주님은 우리가 먼저 그분과 함께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었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있고자 부르셨고 함께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왔음에도 결정적 순간, 하나도 남김없이 흩어져버렸던 이 열둘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혼자 남겨지는 마음을 홀로 견디셨음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이내 겪게 될 이 일을 내다보시면서도 함께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그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의 말씀은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 “또 보내사”에 눈이 갑니다. 이 열둘은 과연 어디로 보내심을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을 부르신 이후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그 열둘을 부르신 후 함께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의 내려오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이지요. 열둘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열둘을 부르시고, 함께 만난 많은 사람의 아픔을 고쳐주신 주님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설교의 첫마디를 메시지 성경의 번역으로 전해드리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찾게 될 것이다(눅 6:20).” 이 열둘이 예수님과 함께 만난 이들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슬픔의 크기만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곳
이제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이 세상에 머무셨던 그때로부터 오늘의 시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2023년 4월, 우리 곁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월은 특히 더욱 그러한 달입니다. 어디 사월뿐인가요, 어느새 시월도, 아니 그렇지 않은 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온 지구가 아픔으로 점철된 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고통이 가득한 시공간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현장이 떠오르시나요? 세계선교만이 아니라 직장선교, 학원선교, 군선교, 북한선교, 경찰교정선교, 도시빈민선교 등 선교지라 부를 수 있는 현장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하지만, 보내심을 받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복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현장은 달라도 임무는 같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요10:10)” 하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처럼 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이 곧 선교의 현장입니다.
밤새워 기도하며 열둘을 선택하셨듯 우리는 모두 고심 끝에 지금의 자리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상도 선교의 현장입니다.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에 시간의 우선순위를 드리십시오. 우리 안에는 생명이 한 톨만큼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생명과 빛보다는 죽음과 어두움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예수님 곁에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도록 부단히 애쓰십시오. 이제 어두운 밤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선교 현장에 관해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으려 합니다. 2002년 선교한국 대회의 주제는 ‘열방을 향한 복음의 경주자, 바로 당신입니다’였습니다. 죠이선교회 대학생 봉사자였던 제게 주어진 임무는 사람들의 잠자리를 살피는 일이었죠. 뜨거운 여름밤, 저의 손에는 모기약이 들려 있었고요. 그들의 잠자리는 무진 불편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 급조된 푹신하지도 않은 바닥, 욕실도 없이 화장실에서 샤워해야 하는 ―충분히 불평할 만한― 환경이었는데 희한하게 사람들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수천의 사람들이 커다란 운동장에 모여 하나의 목소리로 찬양하던 때의 알 수 없는 전율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손을 들고 일어나 헌신의 뜻을 밝힌 것도 아니었는데, 저는 그때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생소한 나라로 보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말을 배우고 음식을 먹으며 예수님을 전했고, 짧고도 길었던 그 삶이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 제가 보내심을 받은 곳은 또 다른 현장이지만, 안정적인 삶의 자리를 뒤로 하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언어와 문화, 불안정성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그 삶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자매요 형제
경제가 심상치 않은 요즘이지요. 비단 한 나라의 일만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재정적 형편도 어렵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질 일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도 보입니다. 교회의 살림살이가 빠듯해지고 환율이 높아지면 우리 중에서도 멀고 먼 나라들로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군대를 떠나는 직업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을 보았습니다. 직업군인들에 대한 처우 개선 없이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그날 프로그램의 요지였죠.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숫자의 많음을 자랑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생명이 필요한 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로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책임 있는 응답을 했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자매요 형제이며 동지니까요. 집을 떠나 먼 곳으로 나간 동지들을 살피는 일이 어찌 마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곳으로 보내심을 받으셨나요? 주님은 무엇을 하라고 여러분을 그곳에 보내셨나요? 그곳이 어디든 여러분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발견하십시오. 우리는 고심 끝에 선택된 사람들임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가장 먼저 주님과 함께 있음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십시오. 그 후에 죽어가는 것들이 가득한 모든 곳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특별히 먼 곳으로 나가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이들을 기억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끊이지 않기를 빕니다.
김혜미
어린이들과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 목회자이며, 키르기스스탄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경험과 〈한국기독공보〉에서 취재기자로 일한 경험이 있고, 지금은 인하대 BK21 글로컬다문화교육연구단의 참여대학원생이자 박사과정생으로 난민, 이주민, 여성 목회자 등 소수자 연구에 힘쓰고 있다. 보내심을 받는 의외의 시공간에 머물기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