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화해의 첫걸음
[389호 A/S 커버스토리] 388호(2023년 3월) ‘진정한 사과’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게 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아무런 뉘우침이나 사과 없이도 그 죄와 벌이 사라지는 것처럼 가르쳐온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고통당하는 피해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가해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자유를 만끽하며 기뻐하는 게 기독교의 참 신앙은 아닐 것이다.
사과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 입힌 것에 대한 진심 어린 유감 표명이다. 잘못된 문제를 수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겸손과 회개의 행위다. 진정한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해를 끼친 것을 보상하는 일이다. 사과는 반성과 반성의 표현으로 정의되며 화해와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한 몸짓이다. 진심 어린 사과는 단순한 말을 넘어 피해를 복구하고 해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수반한다. 그래서 진정한 사과에는 겸손과 진정성이 필요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인정한다. 여기에는 발생한 피해에 책임을 지고, 보상을 제공하고, 결과를 수용하는 일이 포함된다. 진정한 사과가 받아들여지면 용서와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진정성 없는 사과는 의무감이나 체면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변명이나 명분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진정성과 반성도 부족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과는 오히려 분노, 불신, 분개를 계속해서 낳게 된다. 쌍방의 잘못이라고 해서,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먼저 화해를 요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정한 사과나 용서, 화해를 할 의무가 면해지지는 않는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억압과 불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적 폭력 등으로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경우 과거를 깊이 이해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폭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히틀러 치하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동조했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의 재판에서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당당한 태도로 일관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유대인 피해자로 그 현장에서 재판을 지켜보았던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을 통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고의 결여와 구조적 불의로 야기될 수 있는 거대한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적했다.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국가나 조직에 의해 자행된 거대한 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며, 폭력을 만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구조가 어떻게 피해자들을 가해해 왔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고통받으며 살아온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명예 회복과 합당한 보상, 상담과 치유, 재발 방지책 마련 등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과를 위한 치유와 화해의 중요한 단계다.
1996년 캐나다 성공회는 원주민이 교회를 통해 겪은 “큰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 사과는 캐나다 원주민의 식민화에 대한 교회의 공모와 식민화가 원주민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교회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지역사회를 돕기 위해 고안된 성공회 치유 기금 개발과 함께 이루어졌다. 영국성공회는 2006년 2월 총회에서 노예 매매를 옹호했던 과거에 대해 사과했다. 노예제도가 ‘비인간적이고 부끄러운’ 결과를 불러왔다는 성공회 내부 논의 결과에 따라 사과를 결정했으며, 교회가 ‘노예로 삼은 이들의 자손들에게 해를 끼친 점’을 사과했다. 2007년 미국 장로교는 노예제도에 연루된 일과 그에 따른 인종차별을 공식 사과했다. 사과문에는 인종차별을 옹호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모든 유색인종에 대한 억압을 자행해온 교회의 죄악을 인정하고, 교회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정의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국 상원은 2009년 6월 노예제와 인종차별법에 대해 사과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상원이 흑인 노예제도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으로, 이 결의안은 “노예제에서 고통받은 흑인과 그들의 선조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밝히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모든 미국민이 인종적 편견과 부당함,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데 노력해나갈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어떠한 배상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밝혀 흑인 노예 후손들에 대한 배상 문제에는 선을 그었다.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만 경제적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1833년 영국 하원에서 노예제 폐지를 위해 당시 2천만 파운드(현재 가치로는 수백 조 원)를 지불하기로 결의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잘못은 인정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사과는 대의명분을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역사적 진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진지한 역사적 탐구로 자녀들의 과오가 발견된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하면서 가톨릭 2천 년 역사에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청했다. 이 사과문에는 노예무역에 연루되고, 토착민을 부당하게 대우했으며, 홀로코스트 기간에 유대인을 보호하지 못한 교회의 죄를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교황은 잘못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명하고 화해와 치유를 촉구했다. 특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빌미로 일으킨 십자군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일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신앙적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피의 보복이 지속되면서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간 십자군 전쟁의 악순환은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타인의 살육을 정당화하는 비인간화의 극치였다.
진정한 사과는 치유와 화해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피해와 고통에 대한 일정한 대가를 지불했을지라도 ‘무한책임’을 지는 마음과 태도가 없다면 진정한 사과로 보기 힘들다. 경제적 보상으로 모든 책임을 다했다는 식의 논리는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다. 독일에서는 총리가 새로 취임할 때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죄와 함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을 구출한 체코인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8년 독일 대통령 이름으로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독일 최고 명예인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유대인 학살을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이유다. 일제 치하에서 36년간 고통받은 한국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을 비롯해 수많은 역사 왜곡에 대한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도 요원하기만 하다. 올바른 역사 인식과 역사의식이 형성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진정한 사과의 사례는 회개의 힘과 관계 회복을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사과의 목적은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여 자신의 체면과 명분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다. 사과는 피해 당사자에게 저지른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보상하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과는 피해 입힌 데 대한 깊은 후회와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에서 나온다. 이것은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와 화해로 나아가는 강력한 회개 행위다.
진정한 사과는 표현 이상의 행동을 포함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보상을 통해 헌신하는 일을 포함한다. 구조적 폭력과 억압이 존재하는 경우, 착취로 이어진 제도적 부당성을 인정하고 상황을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야 사과가 성립된다. 진정한 사과는 개인이나 국가를 깊은 수렁과 늪에서 탈출하게 한다. 진정성 없이 사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벌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앞으로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진정한 사과는 용서, 평화,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동서와 남북, 성별과 세대 등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이 시대에 평화와 정의의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이는 치유와 화해의 첫걸음이다.
김유준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교회사 겸임교수로 강의하면서 연세차세대연구소장으로 캠퍼스 사역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대안을 모색해왔다. 2023년 1월 1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주빌리교회를 개척하여 청년 창업과 취업의 발판이 되는 카페와 청년 학사를 운영하며, 북촌문화마을공동체(K-Culture Campus)를 비롯한 주빌리커뮤니티를 세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