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로 돌아오겠다’는 선택
[389호 커버스토리]
오랜 기간 ‘우리 교회’라고 부르던 곳을 떠났다. 유년 시절과 20대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먼 곳에서 타지 생활을 할 때 종종 돌아와 재충전했던 곳, 계속 우리 교회일 것만 같던 곳이었다. 소그룹 모임 단톡방에 올라온 메시지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차별금지법 반대 청원’ ‘동성애의 무서움’ 등 한 그룹원이 나의 언짢은 기색에도 멈추지 않고 공유하던 카톡이 영 불편했다. 단톡방을 나왔고, 더 이상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무렵이라 모두가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서울에 살고 있다는 핑계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모교회에 매주 출석하지 않은 지 오래된 터였다. 나의 떠남은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사실 차별금지법 이슈는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돌아보면, 배타적인 교회 모습에 더해 교회라는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회의감이 점차 쌓였던 듯하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신문에 비춰진 여러 교회의 부도덕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모습에 실망했고, 이를 시정하지 않는 교회 제도에 염증을 느꼈다.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만 같던 떠남은 사실 오랫동안 내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떠나던 시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교회 짬이 몇 년인데! 찬양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부터 청년부 리더, 소그룹 장, 교회 내 여러 봉사 활동과 주중 예배 등에 쏟은 시간이 얼만데 이렇게 떠난다고? 영영은 아닐 거야. 지금은 교회를 나가는 게 오히려 더 답답한 상황이니 잠깐 신앙에 대해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어디까지나 나의 떠남은 교회 모습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기에, 교회를 언젠가는 돌아올 곳으로 생각하며 가나안 성도 대열에 합류했다.
떠난 자의 고민
교회에 대한 여러 고민들로 코로나 이전부터 마음은 이미 떠나있었지만 몸은 항상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우리 교회라고 불렀던 모교회와 내가 자주 나갔던, 거주지 근처 두 교회 공동체에 머물렀으니까. 그러나 교회를 물리적으로 떠난 이후, 처음으로 공동체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곧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어 나의 공백기는 예상치 않게 길어졌다.
공동체 공백기는 이상하고 편했다. 주일이 분주하지 않아 이상하면서도 개인 시간이 늘어나 편했고, 이내 익숙해졌다. 교회를 떠난 뒤 신앙에 큰 문제는 없었다. 어느 면에서는 더 나아지기도 했다. 비판적으로 여기던 교회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정죄하지 않고 평안을 얻었으니 말이다. 물리적 거리를 두니 내가 불편해하던 것들에 대해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공동체를 떠나있으면서 오히려 공동체가 무엇인지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교회에 나가는 신앙생활과 교회에 나가지 않는 신앙생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앙 공동체 유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고 보니 설교도 찬양도 기도도 인터넷에서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물론 할 수 있는 것과 진짜 하는 것은 별개다). 하지만 같은 설교와 찬양, 기도를 함께하며 나눔의 단계로 나아가는 일은 아직까지 교회 공동체에서만 가능해 보였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조금 추상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교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 공동체 모습은 어떠했나?’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1세기 초대교회 모습과 시대상을 다룬 책들은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성은 오늘날 교회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짙고 끈끈해서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교회와 나누기도 했고, 엄격하게 나뉘는 사회적 신분과 남녀 구별이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평등한 형제자매 관계를 맺었다. 신약성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울의 서신이 쓰이고 전달되는 과정에 공동체가 참여하기도 했다. 바울이 다른 지체와 함께 쓴 편지가 다른 공동체에 회람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 새삼 생각했다. 교회가 삶을 나누는 공동체여야 하는 까닭은, 이미 이러한 공동체성이 교회가 탄생하던 때부터 내재되었기 때문이라고.
다시 가볼까?
내게 교회는 언젠가 돌아갈 곳이었다. 애초에 영영 떠나리라 생각하며 떠난 건 아니었으니까. 매해 세우는 새해 계획에는 ‘교회 가기’가 있었다. 종종 현장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니 목표를 아예 이루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동체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매주 출석하지도 않았으니, 이루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3년 차가 되던 작년 하반기 어느 날,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종종 나가던 회사 신우회에서 기도 제목으로 좋은 교회를 찾고 있다고 나눈 일이 발단이었다. ‘기도 제목으로 부탁까지 했으면 나도 적극적으로 찾아야지’ 하는 생각에, 오래 미뤄둔 숙제를 하듯 교회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달 내내 온라인 예배가 아닌 특정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면서 가나안 성도 생활을 마쳤다.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건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 이유와 ‘그러고 싶다’는 소망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교회를 떠나있는 시기,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머리로 깨달은 게 실재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내 삶에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지 스스로 물었을 때는 갸우뚱했다. 그래서 교회에 돌아온 이유에 뭔가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기대한 독자가 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그냥 언젠가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그 언젠가가 작년이 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진 않았지만, 공동체와 함께하길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공동체를 떠나니 마음이 공허했어요’라든가 ‘외로웠어요’ 혹은 ‘신앙이 성숙해지지 않았어요’ 같은 이유가 있어 공동체를 다시 찾았다면, 한 편의 간증이 나올 수도 있겠다. 공허함, 외로움, 신앙의 성숙함에 대한 갈망과 같은 감정은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있을 때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고, 공동체 외에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공동체와 함께하길 원하는 마음의 정서적 뿌리에는 그리움이 있었다.
좋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이를 다시 찾는다. 나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들은 공동체와 공유하는 기억 속에 있다. 거창한 이유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쏟았던 기억,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예배했던 기억,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고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해줬던 기억, 내 것을 내어주었는데 도리어 채움을 받았던 기억, 이 모든 따뜻한 순간들은 내게 그리움이란 감정으로 간직돼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당위적 생각, 코로나가 완화된 상황 등과 맞물려 교회로 돌아오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오랜 신자의 재출석 도전
교회를 다시 찾는 과정은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오래 다닐 교회를 찾으려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 편안함을 느끼는 부분, 참을 수 없는 모습 등을 파악해야 했다. 과거 외국 생활을 하던 때 한국 이민 교회부터 현지 교회, 다양한 교파의 예배에 참석해보기도 했고, 3여 년간 가나안 생활을 하면서 서울의 웬만한 대형교회 예배 설교를 다 들어보기도 했다. 다수의 교회 경험에 비추어볼 때, 나는 소규모보다 대규모 인원이 모인 예배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한국 장로교 예배 형식이 익숙했다. 유년 시절부터 장로교 대형교회에 출석했던 배경에 영향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예배의 편안함 정도는 우선순위에서 끄트머리에 자리했다. 그보다 내가 참기 어려운 모습이 없는 교회, 그중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는 교회를 찾고자 했다. 그렇게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은 포지티브 리스트가 아닌 네거티브 리스트로 작성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몇 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성 목회자를 세우지 않는 교단에 가지 않겠다’였다. 여성 목회자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근거로 내세운 ‘성별 구분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왔고, 공동체 리더를 세울 때 별다른 이유 없이 여성이기에 배제하는 환경은 내가 생각하는 평등한 공동체와 거리가 멀었다. 이 한 가지 기준만으로도 여러 교회가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둘째는 ‘공개적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였다. 개인적으로 차별금지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교회 공동체 입장은 수용과 긍휼에 가까워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한국교회 다수의 입장과 배치되고, 앞서 교회를 떠난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시 찾은 교회를 같은 이유로 떠나거나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 입장이 선택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었다. 첫 번째 기준은 넘었어도 두 번째 기준까지 통과한 교회는 손에 꼽았다.
셋째는 ‘설교의 초점이 감정 호소에 있는 교회는 가지 않겠다’였다. 감정을 만지는 설교가 나쁘다고만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감동을 전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설교가 아니어도 다른 매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설교 시간에 기대하는 것은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얻는 일이었기에 설교의 초점이 감정에 맞춰진 곳은 피했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몇몇 교회를 찾아 집에 가까운 순서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굉장히 까다롭게 교회를 찾은 것 같지만, 사실 기준에 부합하는 교회 리스트 중 가장 처음 나갔던 교회가 좋아서 더 찾아보지 않고 그 교회를 계속 나가고 있다. 이 교회 첫 예배에서 발견했던 세 가지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먼저 설교자로 서는 기회가 담임목사뿐 아니라 일반 성도에게도 열려있었다. 그리고 교회가 지향하는 비전을 담은 예배 마지막 찬양의 가사에 공감이 됐다. 마지막으로 보통 담임목사가 일방적으로 성도를 향해 선포하는 축도를 교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형식이 인상 깊었다. 특히나 공동축도 순서는 다양한 교회를 방문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소한 모습이었다. 처음 교회에 방문했을 당시 이 순서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했고, 축도를 통해 전해지는 기도가 내 삶에 녹아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여러 좋은 모습들이 교회에 계속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첫 예배가 좋았던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예배드린 뒤 교인으로 등록하고 계속해서 출석 중이다. 하지만 이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앞으로 내가 잘 적응해서 교회에 정착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떠날지는 아직 모르겠다.
늘 내게 익숙한 이들과 어울리다가 이미 관계가 형성된 어떤 집단에 외부자로서 처음 관계를 맺어가는 경험을 참 오랜만에 해본다. 30대에 접어들고 나서는 새로운 누군가를 알고 관계가 깊어지는 일이 손에 꼽았는데, 그 어려운 일을 해보려 한다. 그 가운데 마주치는 수많은 뻘쭘한 상황들을 어색한 웃음으로 넘기고 서로를 알아가는, 꽤 품이 드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원해서 결정한 ‘교회로 돌아오겠다’는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교회에 등록하고 보니 이곳 운영 방식에 따르면 내가 청년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귀한 청년의 때를 아끼며 삶을 나누고, 내가 다시 찾은 교회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회에 남아있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익명
크리스천 30대 여성, 복음과상황의 꾸준한 독자로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관심이 많다. 유년 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교회에 출석했으나 이후 3여 년을 가나안 성도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