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집

[390호 공간 & 공감]

2023-04-27     박진영

엄마 집은 왜 항상 뭐가 많을까. 김치 가지러, 핸드폰에 애플리케이션 설치해드리러 등 엄마네 집에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갈 때마다 짐이 많고 복잡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내 집도 아니면서.

20평대 방 3개 기본 구조 아파트에 엄마 아빠 두 분이 살고 있지만, 살림은 다섯 식구가 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부엌. 주방의 핵심은 냉장고다. 냉장고를 중심으로 동선이 짜인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함께한 냉장고를 은퇴시키고 4도어 대용량 냉장고를 장만하셨다. 언니들과 필요한 일 있을 때 사용하려고 가족보험 목적의 회비를 매월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는데, 적은 돈이 꽤 쌓여 엄마네 냉장고 구매할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새로운 냉장고가 들어온 지 1년이 지났는데 아직 비닐이 그대로다. 오염되는 것이 싫으셔서, 아끼느라 뜯지 않으신 것 같다. 엄마네 냉장고는 이것 말고 김치냉장고가 두 대 더 있다. 이 김치냉장고는 뚜껑을 여는 장독대식이라서 꺼내기가 불편하고, 또 사용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새것으로 교체를 권했지만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것을 바꿀 필요가 뭐가 있냐’라며 그냥 사용하신다. 요즘 나온 것들은 에너지 효율뿐 아니라 디자인 혁신도 이루어져 여러모로 공간 효율을 높일 수 있음에도, 고장이 나기 전까지는 기존 것을 사용하실 것 같다.

주방의 중심 냉장고‘들’에는 소비기한을 알 수 없는 묵은 김치부터 폭삭 익어야 맛있는 파김치, 고구마 짝꿍 동치미, 독특한 향과 매운맛이 일품인 갓김치까지 온갖 김치가 저장되어있다. 그리고 각종 절임 반찬. 마늘과 양파, 고춧잎처럼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채소들과 곰취, 머위처럼 한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을 절여 만든 장아찌류가 가득하다. 분명 엄마 아빠 두 식구가 사는 집인데 이 많은 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한 번은 엄마가 친구분들과 여행 가신 동안 냉장고를 정리해드린 적이 있다. 오래된 양념들과 이제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것 같은 반찬류를 폐기하고 장아찌는 장아찌대로 깊숙한 곳에 넣고 빠르게 처리되어야 하는 나물류의 반찬들을 손이 잘 닿는 곳에 배치했다. 유물 발견하듯 오래되어 상해버린 반찬들도 있었고, 상한 건지 발효된 건지 나로서는 구분하기 어려운 김치류는 폐기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엄마는 냉장고 정리해줘서 고맙다는 말끝에 “혹시 파김치 못 봤니? 그거 외삼촌이 농사지은 파로 담근 거라서 버리면 안 되는 건데”, ‘아? 상한 게 아니라 곰삭았던 거였구나?’ 차마 버렸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주방은 뒤 베란다까지 계속된다. 그곳을 지배하는 건 ‘청’들의 줄지은 행렬. 생수 통, 담금주 통, 젓갈 통 등 담음새도 주재료도 제각각인, 효능이 참 많은 청들의 집합소다. 주로 매실청이고, 그냥 먹을 수는 없지만 청으로 담그면 먹을 수 있는 개복숭아청 역시 한가득하다. 과일과 설탕을 버무려 숙성시키면 과실의 진액과 설탕의 당 성분이 결합하여 각종 요리에 넣는다. 또 소화가 안 될 때면 과실 액기스를 따뜻한 물에 타 마신다. 남은 과육(건더기)은 꽉 짜서 고추장에 버무리거나 간장액에 담가 장아찌로 활용해 반찬으로 먹으니 버릴 게 없다. ‘엑기스’라는 용어 때문인지, 음료였다가, 양념이었다가, 소화제 역할까지 다방면에 두루 쓰이는 엑기스를 매년 만드신다. 작년 것, 재작년 것, 그 이전에 만든 것도 아직 그대로인데!

엄마 집에는 정원도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가꾸는 정원인데 죽어가는 식물들도 엄마 집에만 오면 살아서 나간다. 동네에서 금손으로 소문이 나서 키우다가 자신 없는 화분, 이사 가면서 버리기는 아깝고 가져가기는 버거운 화분들이 우리 집으로 온다. 하루는 엄마가 길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반쪽짜리 선인장을 주워오셨는데, 정성 들여 보살핀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곧 노란색 꽃을 피워냈다. 1단으로 시작한 이 넓적한 선인장은 이제 3단으로 성장하고 있다. 엄마의 베란다 정원에는 허브란 원래 작고 아담한 식물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무섭게 성장하는 장미 허브, 이에 질세라 고개를 빳빳이 들고 꽃대를 자랑하는 제라늄 집단, 윗집에서 이사 온 군자란과 잎이 다쳐서 헐값이 되어 길거리에 나앉았던 서양란까지 종류 불문하고 서식한다. 화초가 있으니 곤충도 있다. 쌀뜨물 먹이고, 바람 쐬어주고, 추우면 안으로 더우면 밖으로 그렇게 살뜰히 챙긴 식물 식구들은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분양되고, 지인들 선물로 부지런히 출가하는데도 어느새 또 자라고, 새끼까지 친다.

지난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 영화는 내내 혼란스럽다가, 며칠 동안 긴 여운을 주었다. 모든 것을 소멸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조이(극 중 딸, 스테파니 수)와 에블린(극 중 엄마, 양자경)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중에서도 에블린이 딸에게 하는 말.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어디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해도 난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끝’ 내고 싶은 딸과 그런 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엄마의 서사를 보며 (물론 이 영화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지만) 불현듯 엄마 집이 다르게 보였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시절에 셋째 딸로 태어난 나는 자라면서 ‘딸’과 얽힌 이야기를 원하지 않아도 들어야 했다. 아들 낳으려다 실패해서 네가 나왔구나, 존재를 실패로 규정하는 말부터 ‘딸은 평생 AS 해줘야 한다’라는 말,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신붓감으로) 데려간다’라는 말까지.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또’ 딸이라는 말을 듣고 지금 막 지구별 여행을 시작한 나의 얼굴도 보지 않고 시골로 곧장 내려가셨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내가 환영받지 못한 게 억울하고 서글퍼서. 그런데 영화를 본 지금 전혀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난다.

엄마가 아들 없이 딸만 셋 키우며 들었을 수많은 말 속에서 딸을 지키고, 시절을 견뎌야 했던 그 마음. 목욕탕에서 세 딸을 차례로 목욕시키고 나면 정작 자신은 기력이 다 빠져 대충 씻고 돌아와야 했던 엄마의 모습도 그려지고. 다섯 명이라고 택시 잡기도 어려워 시골에서 이고 지고 온 보따리에, 자식들 등에 업고 손에 잡고, 고단했을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지켜낸 딸이 나다.

영화 속 엄마 에블린과 나의 엄마를 떠올리니 엄마 집의 그 수많은 짐들 속에 담긴 ‘혹시 몰라서’의 마음이 보였다.

엄마는 집을 자신의 안식처이자 동시에 딸들을 위한 ‘혹시 모르는’ 대기 장소로 기꺼이 삼았다. 각종 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수건들, 금융 상품에 가입해서 받은 세제들, 그릇과 도마, 주방 살림과 이부자리 어느 것 하나 우리를 위하지 않은 게 없다. 생각해보면 결혼 준비로 신혼살림을 꾸릴 때, 냉장고와 세탁기처럼 주요 가전과 가구는 나와 반려인이 마련했지만, 식기류와 같이 바로 사용해야 하는 것들은 그동안 엄마와 아빠가 오랫동안 준비해주신 상자를 받아서 바로 사용했다. ‘진박사 줄 것들’(집에서 별명이 진박사)이라고 쓰여있는 상자 안에는 OB 베어스 우승 기념 컵 2박스, 행사 기념 수건들, 성경 통독 완주 기념으로 받은 용기들, 그 밖에 세제와 그릇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당시에는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불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뭐든 주고 싶은 그 마음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사진: 필자 제공 

김치가 떨어지면 맡겨놓은 사람처럼 빈 통 들고 가 엄마네 냉장고를 털어가기 일쑤인 내가, 내 살림은 간소하고 산뜻하게 군더더기 없이 꾸리고자 하면서 엄마네 집은 짐이 많다고 불만을 쏟아놓는다. 그 짐에 최소 20%는 내 몫일 것이다. 결혼하면서 지금 당장 입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옷들은 원래 살던 집 그러니까 엄마 집에 두고 왔으니까. 혹시 몰라서 앨범이며 또 어렸을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신발 상자에 고이 담아 내가 사용하던 방 옷장에 그대로 넣어놓고 왔다. 엄마는 내가 ‘혹시’ 찾을지도 모르니까 버리지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본 적 없고, 한 인간을 온 생을 다해 지켜본 적 없는 나는 여전히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라는 이름이 그런 사랑과 희생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어떤 부모들은 남보다 못하기도 하니까.

또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지난 지금, 여전히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좋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주목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 마음’은 애씀과 분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집을 기꺼이 타인을 위한 장소로 내어주는 엄마 마음에 내 마음을 비추어보면서, 봄맞이 대청소를 핑계로 엄마 집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내 물건 치우러 가야겠다. 이왕이면 빈 통 말고 두 손 가득히.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