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월담기: 국뽕을 넘어 세계와 함께

[390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3-04-27     김상덕

국뽕이 차오른다

나도 모르게 보게 되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다. 소위 ‘국뽕’ 영상이다. 물론 귀여운 댕댕이 영상도 거부하기 힘들지만, 무언가 홀린 듯 클릭하게 된다.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 ‘자랑스러운 한국인’ 등의 수식어로 시작하는 영상들은 애국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내용을 포함한다. 국내 스포츠 선수들이 해외 톱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거나 올림픽과 같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신이 난다. 우리나라 가수 공연을 보고 감탄하는 외국인 리액션이나, 해외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국인 수상 모습과 해설 영상,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한국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거나,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감탄하는 반응 등이 주를 이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국뽕’ 콘텐츠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애국심과 자긍심을 부추기는 콘텐츠부터 배타적 국가주의와 다른 나라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조장하는 영상까지 큰 틀로 묶여 생산되고 소비된다.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대중문화 속 국가(민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생각해보려 한다. 다소 방대한 주제이지만 ‘국뽕’과 애국심, 민족주의와 탈국가주의, 나아가 지구촌 시대의 한류 현상을 세계기독교 관점에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민족주의

왜 손흥민 선수의 성공이 나의 기쁨이 될까? 그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속한 팀을 위해 뛰는 프로 선수인데, 우리는 그의 몸짓에 함께 웃으며 멋진 골 장면에 열광한다. 마치 내 일처럼 말이다. 스포츠 선수와 팀을 좋아하는 팬심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스포츠비즈니스와 소비심리주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팬들이 보여주는 열광성·집단성 등을 들어 유사종교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손흥민 선수가 한국인으로서 세계 최고 리그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응원하고, 이를 좋아하는 감정은 독특한 경험이다. ‘축구를 좋아해서’ ‘손흥민 선수의 플레이나 인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한국인이라서’ 응원하고 그의 성공을 마치 ‘우리’ 성공으로 여기는 이 감정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한민족이라면 거부하기 어려운 독특한 정서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엔 한국이라는 나라의 고유한 역사적 맥락이 자리한다. 고유하다는 것은 우월하거나 배타적인 의미보다는 한국인끼리 공유되는 서사와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적인 것 그리고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외세의 침략,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통치의 수난,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남과 북 분단의 아픔, 그리고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억압과 좌절,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깊은 유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국인 서사는 주로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을 함께 극복해가는 공동체적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민족이 곧 자신이며, 민족의 흥망성쇠는 곧 나의 생존과 깊이 연결된다. 특히 일제 식민 통치에 저항하며 민족은 곧 억압에 맞서 싸운 역사적 주체이자 도덕적 주체이며, 운명 공동체인 셈이다. 이런 민족주의적 특징은 한국 역사 가운데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1990년대 말 IMF 외환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자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LPGA 경기에서 박세리 선수가 보여준 맨발 투혼에 온 국민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고 보면, 유독 스포츠 선수의 선전에 기뻐했던 사례가 많은데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연아퀸 김연아, 캡틴팍 박지성 그리고 오늘의 손흥민까지 이어진다. 이들의 활약은 한국인의 억눌렸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고 목이 터져라 환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 선수들에게 동질감과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는 개인의 성공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명예를 회복한 사건이다. 세계가 보는 가운데 말이다. 스포츠 ‘국뽕’을 자극하는 선수 대부분은 국외 무대에서 선전을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요한 건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다. 손흥민과 그의 팀 경기에 밤을 지새우지만, 국내 프로 리그에는 무관심한 모순적 현상도 종종 벌어진다.

절대 져서는 안 되는 경기도 있다. 한일전이 그렇다.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뽕’ 감정은 역사적 맥락과 분리되기 어렵다. 그래서 바른 역사의식과 진정성 있는 대화, 상호 문화 교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일부 지식인층이나 양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한일전에 격앙된 감정을 자제하기란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국뽕’ 현상의 배경에는 한국의 역사, 민족주의 그리고 애국심이 자리한다. 그렇다고 ‘국뽕’을 애국심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국뽕’ 관련 이미지. 해외에서 많이 알려지거나 좋은 성적을 거둔 우리나라 인물, 기업, 콘텐츠 이미지가 합성됐다. 

국뽕은 애국심이 아니다

‘국뽕’은 애국심과 다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문제가 아니지만(종종 추천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를 무조건 비판하고 상대적 우위를 취하려는 방식의 접근은 잘못된 태도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가주의를 애국심과도 구별해야 하듯이 말이다. ‘국뽕’이란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인데, 국수주의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배경을 유래로 갖는다. 이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고 세심한 관찰이 필요해 보이지만, 논의의 시작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자국을 무조건 비판하는 ‘국까’와 이에 역으로 대응한 ‘국뽕’ 간의 싸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국뽕’ 콘텐츠가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플랫폼 특성상 레거시 미디어에 비해 자극적이고 과장된 주장들이 쉽게 생산되고 유통된다. 앞서 말했던 손흥민 선수 사례는 애국심과 자긍심 정도로 볼 수 있는 수준이지만, 모든 콘텐츠가 ‘순한 맛’은 아니다. 다수 콘텐츠가 ‘국뽕의 치사량을 넘어서고’ 있다. 이런 콘텐츠들 특징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장해서 강조하거나, 주변국을 지나치게 깎아내린다는 점이다.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잘못된 정보를 거르지 않고 사용하며, 모든 것은 한국이 최고라는 신념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왜곡되어 사용된다. 과장되고 열광주의적인 맹목성은 ‘국까’와 ‘국뽕’ 모두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런 맹목성은 ‘국뽕’ 콘텐츠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상흔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나라를 지켰으며 위험을 극복한 민족’임을 강조한다. 또한 ‘작지만 강한 나라’ ‘한강의 기적’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세계 일류 국가로 거듭난 유일한 나라’ 등 극복과 성공 내러티브가 자주 사용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우리나라를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으로 보는 일종의 선민사상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단군 설화와 《환단고기》를 엮는다든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세계 평화의 중심지, 동방의 빛나는 별, 세계 선교의 중심이나 제2의 이스라엘 민족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접근에는 유독 종교적 수사가 동원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필자가 ‘국뽕’ 현상을 진지하게 살피는 이유는, 애국과 보수 그리고 기독교 서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종종 도를 지나친 맹목성을 동반하는 일련의 사회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2) 결국 ‘국뽕’ 현상은 한국인의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적으로 재현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국가(공동체)를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시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류도 국뽕인가?

대중문화를 국가주의라는 관점으로 살필 때, ‘국뽕’ 현상과 유사한 사례로 ‘한류’를 들 수 있다. ‘한류’(韓流)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외국 문화 현상을 부르는 방식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곳은 중국 언론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대만에서 H.O.T.나 클론 등 한국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 중국 언론에서 ‘한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한류 연구에서 한류 용어의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한류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먼저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고 소비한 현상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는 사실이다. ‘국뽕’과 한류는 모두 한국 문화에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사례라는 데서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국뽕’은 한국인 입장이 중요하지만 한류는 한국 문화를 소비하는 외국인 입장이 더 중요하다는 차이가 있다.

초기 ‘한류’는 중국과 일본 등 몇몇 국가에서만 일어난 현상이었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중국 한류의 시작이었으며 한국 대중문화 전파의 시작이었다. 이후 H.O.T.와 클론 등이 각각 중국과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한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본 한류 원조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은 일본 내 중년 여성의 폭발적 관심을 끌어냈다. 가부장적 사회와 대중문화의 소비층 모두에서 소외되었던 일본 중년 여성에게 〈겨울연가〉 속 한국 남자 배우의 친절하고 상냥한 역할은 그들에게 전에 없던 문화와의 조우였다. 욘사마(배용준)의 인기는 그야말로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일본 사회와 대중문화 영역에서 소외되었던 중년 여성은 일본 대중문화의 새로운 소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넘어, 중동 지역까지 이르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최고 시청률이 무려 90%에 이르렀으며, 국내 언론은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다. 이후로도 〈별에서 온 그대〉, 〈태양의 후예〉 등이 인기를 끌 때마다 한류는 국내 언론으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류로 인한 경제적 가치와 한식·패션·뷰티·관광 등 관련 시장에도 호황기를 가져오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별에서 온 그대〉가 흥행하자 국내에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치맥’을 이벤트 상품으로 제공하는 여행사들도 생겨났다. 게다가 한국어, 한국 전통문화 등, 한국 전반을 향한 관심과 호감도가 높아지면서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국내에선 한류의 성과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여전히 국가주의라는 ‘국뽕’이 존재한다.

한류가 ‘국뽕’이라니 불경스럽지만, 이는 한류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문화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 사이를 이어주는 효과적인 소통의 장이다. 우리는 문화를 통해 타 문화를 이해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언어와 사회에 관심을 두게 된다. 타 문화를 배우려면 필연적으로 타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상호 간 배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 입장을 우위에 놓고 상대방 문화를 열등하게 여기거나, 상대를 계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나 교류가 아니라 식민주의적 사고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한류가 인기를 끌자, 각 나라 우익 단체가 한류에 대한 맹목적 비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혐한’ ‘반한’ 감정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전히 국가주의적 프레임이 한·중·일 사회 속에서, 특히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한류, ‘국뽕’과 국가주의라는 오명은 정당한 것일까?

신한류, 세계가 BTS에 집중하는 이유는

다행히도 모든 문화는 변한다. 고정되거나 정체되지 않고 적응하고 진보한다. 한류를 분류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소비자와 지역, 장르 등이 확장됨에 따라 크게 ‘한류’와 ‘신한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계층에 의해 소비되던 초기 한류 모델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계층이 다양한 장르를 소비하는 신한류의 단계로 발전했다고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디지털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능동적인 팬덤의 형성과 온라인을 활용한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성장 등이 한류를 세계적 현상이 되도록 하였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한류 소비자들은 기획사나 한국 정부 차원의 홍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로 자신의 선호와 애정을 쏟아부었으며 새로운 문화 현상이 되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역시 BTS(방탄소년단)가 있다. BTS의 놀라운 음악적 성과는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한류 연구에서 BTS의 중요성은 단순히 음악 이상의 사회현상으로 봐야 한다. 이런 관심을 방증하듯 2020년 1월 영국 런던에서는 BTS를 주제로 한 국제 학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회를 주최한 킹스턴 대학교의 콜레트 발망(Colette Balmain) 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글로벌 사회에 살고 있고, 고정됐던 경계를 상품과 사람들이 어떻게 넘나드는지 관심이 있었다”면서, “방탄소년단은 지역적 요소, 즉 한국적인 것(Koreanness)을 유지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그리고 세계를 대변해 말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사례”라고 개최 이유를 밝히고 있다.3) 한마디로, BTS의 음악은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이라는 말이다.

단지 BTS 노래가 한국어라서 혹은 국악이나 한국적 요소를 가미했기에 한국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고민과 메시지가 한국의 동시대적인 것을 담아냈다는 의미이다. 마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 전통문화를 가미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적’이고 ‘지역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실 〈기생충〉의 영화적 화법을 보면, 한국이라는 지역성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였다. 하지만 그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런 이유로 〈기생충〉은 세계의 관객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말을 인용한 봉준호의 수상 소감은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리고 이는 BTS로 상징되는 신한류의 흐름과도 공명한다. BTS 노래에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동시에 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보편적 메시지라는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세계가 보고 있다, 탈경계의 문화

세계가 보고 있다. BTS로 상징되는 새로운 한류 현상을 소비자 입장에서 표현한 말이다. 그동안 한국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자는 한국인이거나 한국적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민족 혹은 국가주의가 자리했다. ‘국뽕에 취한다’는 말은 지극히 한국이라는 국가적 경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즉 한국 대중문화 소비자가 한민족이라는 고유한 서사와 정서를 이해한다는 제한된 가정에서 통용되는 문화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문화 상품 안에 내재한 메시지도 한국의 경계 밖을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이 경계는 국가일 수도 있고, 주류 문화일 수도 있다. 한국 중심 역사관부터 한국 사회에 내재한 가부장적 문화이거나, 서울이나 수도권 중심 문화일 수도 있다. 대체로 ‘한국’이라는 경계를 통해 배타적 정체성을 공유한 집단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반대로 경계 밖 존재들이 소외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소외된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젊고 예쁘고 멋진 사람들, 능력 있는 화려한 직업군의 이야기, 정치적이거나 자극적인 소재들에 밀려 덜 중요하거나 신중히 고려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를 가리켜 미디어 감수성, 다문화 감수성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세계가 보고 있다’는 말은 그 경계가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미디어 감수성은 이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 되었다. 이런 시청자층의 다변화는 대중문화 제작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를 들어,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은 동남아 시장 개척으로 폐지 위기를 극복했다. 국내에선 인기가 식었지만, 동남아 지역에서의 인기는 예상외로 뜨거웠다. 그 계기로 〈런닝맨〉은 동남아 국가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아이돌 스타를 섭외하거나, 국내 전통 시장을 소개하는 등 동남아 시청자를 적극적으로 고려해 변화를 이뤘다. 지난해 SBS는 필리핀 지상파 채널 GMA와 공동 제작한 프로젝트 〈런닝맨 필리핀〉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4)

반면 의도치 않은 오해와 갈등도 발생한다.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TV쇼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순항하던 중 돌연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등장인물 원기선(이도영) 장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 역사 왜곡이라는 이유였다. 한국 시청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장면일 수 있었지만, 베트남 시청자 입장에선 그럴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를 다양한 배경의 시청자가 보는 상황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문화 다양성과 미디어 감수성의 필요는 더 이상 논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마주한 현실이다. 문제는 대중문화에는 제작자의 의도와 숨은 의도(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의도까지도)가 모두 전달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가 보고 있다’라는 말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한류에 담긴 의식적·무의식적 메시지들이 세상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설익은 소통 방식이 모두에게 항상 좋을 수는 없기에 오히려 역효과를 우려하기도 한다. 튀르키예 출신 방송인 겸 아시아엔 편집장인 알파고 시나씨는 한국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한국 전통 게임을 소재로 활용한 점을 자랑스러워하며 ‘국뽕’에 빠지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드라마 속 한국 전통문화 아이템이 없어도 이 드라마는 히트를 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거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현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인간 본능을 잘 표현했다는 차원에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 한국의 전통문화가 소개되어서 이렇게 뜬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점이 잘 표현되어서 뜬 것이다.”5)

한국의 경계에 아슬하게 걸치며 살아가는 그의 눈에도 보이는 보편적 공감대가 일부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혹은 애국심이나 소속감 등, 무엇이든지 간에 정도가 지나치면 우리 시선을 좁게 만들고 누군가를 배제하게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미 탈국가주의나 탈경계 인문학과 같은 개념으로도 다뤄지는 주장이지만, ‘국뽕’과 한류 현상과 관련해서 좀 더 쉽고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세계가 보고 있다고 말이다.

바울과 세계기독교

이 글의 마지막에 기독교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 담론이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생경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연재 초기 글을 아직 기억한다면) 기독교는 오랜 시간 여러 문화와 역사적 상황을 거쳐오면서 형성되고 재형성된 결과이며 끊임없이 소통하고 적응하고 변화하고 있음을 이미 여러 차례 다루었다. 특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란 별칭답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의 진리를 재해석하며 기독교를 유대인의 민족종교에서 모두를 위한 구원과 선교로서 세계기독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유대인에게 할례와 같은 율법이 가진 중요성은 곧 그들의 정체성과 마찬가지였으나, 바울은 이방인에게도 할례/율법 외의 방식으로 구원 가능성이 있음을 논증했다. 그것은 율법을 가진 자나 모르는 자나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보편적 진리의 선포이자, 하나님의 구원은 그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주를 믿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임을 설파한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이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피조물”(고후 5:17)이 되고 그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는”(롬 10:12)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당대 유대인이라는 민족 정체성과 율법을 받는 선민의식이라는 경계를 초월한 변화이다.

오늘날 국가주의라는 경계는 세계화 흐름 속에 당면한 가장 중요하고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미 다문화의 흐름으로 접어들었으며, 다양한 배경(경계)을 가진 개인과 집단이 함께 살아갈 것을 고민하고 있다. 만약 아직도 한국교회 내에 애국과 보수의 가치를 국가주의와 혼동하거나, 맹목적 선민사상이 결합된 종교적 배타성이 존재한다면 바울의 외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만 ‘국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도 ‘국뽕’ 수준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한류가 다양한 시청자를 통해 세계 속의 현상이 된 것처럼, 한국교회도 변화가 절실하다. 그 시작은 먼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민민의 한마디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너의 이야기를 해봐”였어요. 탈식민주의 신학이 만들어놓은 일종의 태도였는데, 은근히 불편했습니다. 제국주의 피해 사례나 가부장제와 같이 아시아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권력주의의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시선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루는 날을 잡고 이야기했습니다. “진정으로 탈식민주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에게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한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라. 너희들이 나에게 해줄 위로는 나 역시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위로일 뿐이다.” 퍽 공격적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뽕’을 꺼트리려면 이 정도는 얘기해야겠다 싶었지요.

제 얘기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로는 제게 “너의 이야기”와 같은 이상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저 자신 안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관점도 빼내려 노력했습니다. 인류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있어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내세우는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한식은 맛있는 음식 중 하나, 케이팝(K-pop)은 좋은 음악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매우 오랜 시간 고민하고 이 지점까지 오게 되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그런 자세가 이미 장착이 되어있는 것 같아요. 지난번 월드컵 때만 해도, 그들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치며 스포츠를 (국가 대항 경기가 아닌) 스포츠 자체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국뽕’이네 한류네 하는 것도 조만간 구시대의 산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이 사회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이미 나라라는 경계를 넘어섰으니까요. 종교는 음… 늘 시대에 조금씩 뒤처지는 특수성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해요.

■ 주

1) 나무위키 ‘국뽕’ 참조.
2) ‘국뽕’을 이해하려면 국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state) 개념은 근대의 산물로, 과거 민족 공동체나 왕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국가의 근본은 개인이며 국가는 개인으로부터 위임된 권위에 의해 이뤄진 체계이다. 근대국가 개념에는 개인과 국가 공동체 중 개인 권리가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상적으로 그렇고 현실에서는 국가라는 다수의 공동체나 담론, 서사가 개인을 희생/소외시키곤 하는데, 이를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라고 한다. 유럽 사회에서 국가주의란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적 체제로서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반면, 한국은 국가라고 하면 ‘한민족’을 떠올리곤 한다.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서 한국인의 강력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란 서구 국가주의와 다르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는 앞서 다룬 역사적 맥락과 관련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김진현 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철학과현실 122호〉(2019), 9-64쪽.
3) 김효정, “전 세계 ‘학자 아미’들 BTS를 논하다...런던서 글로벌 학회”, 〈연합뉴스〉(2020.1.12.).
4) 김예슬, “SBS, 공동제작한 ‘런닝맨 필리핀’ 현지서 흥행”, 〈쿠키뉴스〉(2022.9.6.).
5) 알파고 시나씨, “‘국뽕’ 아닌 보편성 공감에 달린 한류 성공[알파고의 한국 블로그]”, 〈동아일보〉(2021. 10. 29.). 


김상덕(생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언론사진의 역할에 대한 공공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과 다양한 창조적 실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커피를 좋아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미술 작가인 아내(민정See)와 평범한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강의와 글쓰기, 방송 및 유튜버 등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