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복 아래 문신, 문신 아래 살갗
[390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얀 코마사의 〈문신을 한 신부님〉
치기 어린 마음이었을 겁니다. 막 가석방된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이 자신을 ‘신부’라고 소개한 까닭 말이죠. 다니엘은 소년원을 나와 목공소로 복역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어떤 남자와 마주칩니다. 소년원에서 나왔냐며 너 같은 애들은 다 티가 난다는 무례한 말을 듣습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들어간 성당에서 만난 비슷한 나이의 엘리자(엘리자 리쳄벨)도 그에게 목공소에서 왔냐고 묻죠. 다니엘은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을 돌리죠. 행색과 외모에서 전과자 티가 나는 것도 싫고, 자신의 과거로 이후 삶까지 단정 짓는 편견도 싫었을 테지요.
그렇지만 어느 정도 진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년원에서 복사(미사 때 사제를 도와 시중드는 사람)로 봉사하거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기도하던 다니엘의 모습은 사뭇 진지해 보였지요. 출소하는 날 토마시 신부에게 전과자는 신학교 입학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사제복을 훔쳐서 나왔습니다. 훔친 사제복은 이후 그의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신부가 되고 싶었던 다니엘의 순수한 열망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니엘은 한번 우겨봤을 뿐인데 신부로 지내게 됩니다. 평소 알코올 의존도가 높았던 마을의 주임신부는 이 젊은 사제에게 자신의 교구를 잠시 맡기고 비밀리에 치료를 위해 마을을 떠나지요. 이로써 별생각 없이 시작했던 다니엘의 거짓말은 마을 주민을 상대로 한 사기극이 되어버렸지요. 그런데 의례나 형식에는 영 어색한 이 가짜 신부가 내뱉는 설교에 마을 사람들이 감흥을 받기 시작합니다.
망을 봐주던 신부(들)
사실 마을에는 최근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여섯 가정이 있었고, 마을 전체가 죽은 청년들을 추모하던 중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점잖은 유족들이 망자를 잘 보내고 슬픔과 울분을 해소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하다가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되지요. 사고로 죽은 사람은 일곱인데 청년들의 유족들이 상대 운전자에게 모든 잘못을 씌우며 그의 시신을 마을에 안치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가해자인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내 온갖 모욕과 욕설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엘리자의 어머니이자 주임신부를 돕는 성당의 집사 리디아(알렉산드라 코니에츠나)가 주도해왔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임신부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리디아는 주임신부가 그녀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주임신부를 앞세워 이 비극의 원인을 상대 운전자에게 돌리며 그를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마을 시장 역시 자신의 사업과 정치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부가 마을의 분란을 잠재우고 그저 축복기도나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리디아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주임신부가 편의를 봐주는 꼴이 되었던 셈입니다. 마을의 평안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마을 전체가 한 여인에게 정신적·언어적 폭력을 행하는 동안 주임신부는 이를 묵인했던 것이죠. 마치 영화 첫 장면에서 소년원 죄수들이 교도관 몰래 한 명을 괴롭힐 때 망을 봐주던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가짜 신부는 어떻게 마을을 변화시켰나
만약 다니엘이 신부 행세를 지속하길 원했다면 그도 주임신부와 동일한 선택을 했어야겠죠. 그러는 편이 안전했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의 거절 의사와 시장의 압박, 헛간 방화, 그리고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소년원 동기의 협박까지…. 다니엘이 여인을 외면할 이유는 수없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죽은 운전자의 장례를 치르고 마을에 묻기로 결단합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죽은 운전자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람을 죽였다’라는 사실, 자신도 용납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을 그도 감당하며 살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운전자도 죽은 마당에 그의 아내에게 자행됐던 손가락질과 따돌림이 얼마나 부당한지 알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을 겁니다.
사제로서 자격은 미달이었지만 온갖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다니엘은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하고, 소수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운 상황에서도 입막음을 위해 헌금을 쓰지 않았고, 토마시 신부가 데리러 왔을 때도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고 추모예배를 기다리는 신도들 앞에 섰지요. 그리고 사제복 아래 가려졌던 흠 많고 상처투성이인 몸뚱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읊조림도 아니고, 빗살 사이로 사제에게 털어놓는 소곤거림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민낯의 예수와 그를 사제로 알고 따랐던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 어떤 소리보다 또렷하게, 어리석음과 과오로 뒤덮인 자기 자신을 드러낸 행위였습니다.
다니엘이 다시 맞닥뜨린 것
영화 〈문신을 한 신부님〉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마지막 시퀀스 때문에 더욱 훌륭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옳은 길을 선택했던 다니엘, 그가 자신을 포장하고 숨기는 데 활용했던 사제복을 벗고 나간 이후 마을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집 안에서 숨어 지내던 여인이 미사에 참석했고 리디아 역시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죠. 그런데 다니엘의 노력으로 마을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장면과 교차편집되어 나오는 다니엘의 이후 장면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용서는 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사랑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 죄가 무엇이든지요.”
마을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설교했었죠. 하지만 소년원으로 돌아간 다니엘은 용서를 설교하던 예전 모습과 달랐습니다. 다니엘 덕분에 용서가 일어난 마을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다니엘 자신은 단체 식사 기도를 무시하고 누가 자신을 고발했는지 집착하는 등 과거에 사로잡힌 듯 보이죠. 원망과 분노가 들끓는 현실에서 그는 의심하거나, 정신없이 맞거나, 맞서 때리기를 선택했고, 그 결과 또 다른 살인을 낳았을지도 모른 채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두고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중죄를 지은 죄수가 어쩌다 보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신부 행세를 하며 권력과 결탁한 나태한 종교를 비판하는 영화’쯤으로 끝났다면 고민을 덜 했겠지만, 재수감된 다니엘은 악에 받쳐 정신없이 상대를 가격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다니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절규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하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분노와 절망이 향하는 곳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한 그의 심정을 전혀 이해 못 할 것은 아닙니다. 모범수였던 다니엘은 신부가 되어 개과천선하고 싶었지만,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가짜) 신부가 되어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옳은 일을 행했지만, 다시 수감자 신세가 되었지요. 죽은 동생에 대한 원한을 갚겠다며 다니엘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보누스도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렇게 다니엘은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거대한 절망에 빠져버렸던 것이죠.
작정하고 덤비는 보누스의 주먹 앞에서 다니엘은 그간의 억울함을 쏟아냅니다. 자신은 일부러 죽인 게 아니고, 다른 죄수들과 달리 신앙인이며, 망을 볼망정 집단 괴롭힘에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또한 죄를 만회하기 위해 쏟았던 그의 노력 즉, 기품 있는 사제복을 걸치고 설교하며 봉사하는 우아한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 앞에 격분하며 그 절망을 날것 그대로 표출합니다. 마치 점잖게 예배드리며 울분과 슬픔을 삭이던 마을 주민이 악을 쓰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던 장면처럼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처절한 사투 끝에 다니엘은 구원의 길에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깊은 절망 뒤에 찾아올 탄식의 순간, 그는 이제 변명의 여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게 되겠지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구원이라면, 다니엘은 비로소 그 출발선에 선 게 아닐까요. 밑바닥까지 발가벗겨진 그가 이제는 은총으로 덧입혀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박일아
영화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 좀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는 한 걸음이라고 믿는다. 영화평론과 인문학 강연을 하면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와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