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는 안식일에 치유 기적을 행하셨을까?

[390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3-04-27     전남식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1-6)

오래전 일이다. 주일예배 때 뇌병변장애 아이 때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며, 그 아이를 다른 공간으로 분리시켜 달라는 교인들의 요청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대형교회였다.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미국에 방문 중이던 담임목사는 결국 아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다른 교회로 가는 게 좋겠다고, 다시 말하면, 교회를 떠나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큰 충격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지하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작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 대형교회에는 뇌병변장애 아이와 그 부모를 위한 자리가 없었던 반면,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아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 건물 지하의 작은 교회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충분했던 셈이다.

보이지 않는 등급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러자 회당 안이 술렁거렸다. 왜 굳이 안식일에? 이것이 술렁이는 사람들의 불만이었다. 왜 예수는 안식일에 그를 고치셨을까?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구별된 날, 구별된 장소에 모임으로 자신의 정체성, 즉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한쪽 손 마른 사람도 거룩한 날에 회당에 참여했다. 우리 예상과 달리 장애인도 회당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자 집약체인 회당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거룩한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등급이 존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귀족, 권력 계급은 1등급, 평민은 2등급, 장애인은 3등급. 그 누구도 등급에 따른 지정석을 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지정석, 등급이 존재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차별과 연관해 설명한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야고보서 2장에 따르면 회당에는 보이지 않는 등급이 존재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위한 “좋은 자리”가 있었던 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리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였다. 회당에 이런 차별이 존재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로 결단한 “내 형제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이런 차별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2:9)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거룩, 구별을 지우는 구별

왜 굳이 안식일이었을까? 안식일에 장애인을 회당에 받아준 일만으로도 유대인은 칭찬받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회당에 들어간 장애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자체만으로 자신도 거룩한 백성에 속해있다고 안도했을까?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예의 주시한 사람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였다.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막 3:2).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3:3) 예수께서 그를 한가운데로 부르셨다. 이 말을 통해 그가 이전까지 주변, 또는 구석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3등급 지정석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3등급 지정석에 앉아있던 그를 한가운데로, 사람들 사이로 초청하셨다. 자연스럽게, 가운데 지정석에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야 했다. 그러고는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잠했다. 한동안 침묵했다.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안식일에 악을 행해서도 안 되었지만, 선을 행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했지만, 동시에 살리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등이 당시 종교에 기반한 사회 전체를 혼돈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의도적 침묵 속에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다.

안식일, 거룩한 날에 거룩한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고치심으로, 보이지 않는 등급 지정석을 뒤섞었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지우셨다. 거룩의 등급은 사라져야 했다. 등급은 곧 차별이며, 아무리 거룩한 날에 거룩한 사람들 틈에 있더라도,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등급과 차별이 존재하는 한, 그 사람에게는 행동에 대한 제약과 위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식일에 장애인을 한가운데로 불러 세우심으로, 예수께서는 단순히 한 사람을 고치신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고치는 행위를 통해, 곧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인식도 동시에 고치셨다. 한 사람을 치유하는 행위를 거룩한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일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를 고치심으로, 유대 사회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장벽을 허무신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 치유 기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나 사도들, 예언자들의 능력에 감탄하곤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거기서 멈춘다. 치유 기적이 치유받은 당사자, 즉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일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 기적이 당사자가 속한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 즉 공동체적 치유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또한 치유받은 자가 그 후로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훗날 질병이 재발했을 때 공동체 내부인들이 어떤 식으로 그를 바라보았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사자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에 따른 곤경이 찾아오겠지만, 치유받은 자의 재발과 그렇지 않은 자의 곤경에도 차별적 시선이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김은정은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치유 행위의 폭력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그는 치유를 “타자가 지닌 차이를 지우려는 힘의 행사”이며, 이를 “치유 폭력”(curative violence)이라고 명명한다. 치유가 장애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장애는 치료와 치유의 대상이고,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불편한 존재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다. “치유와 관련된 폭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 첫째, 장애와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여지를 없애는 폭력이다. 둘째, 치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장애인들에게 신체적·물리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다.”(38쪽)

치유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홍덕 목사는 《장애신학》에서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자신의 딸을 예로 들면서 이런 식으로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딸이 다운증후군이 치료된 전혀 새로운 몸이 된다면 그 딸을 자신의 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운증후군을 가졌더라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이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다. 김홍덕 목사의 논지는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을 교정하자는 취지일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태초의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안에 장애인이나 연약한 사람이 있었을까?’와 같은 주제로 논쟁을 벌여보았을 것이다. 그 논쟁에서 나는 장애인이나 약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고, 각종 동식물이 존재했다. 단일성이 아닌 다양성이 에덴의 특징이었다. 그곳은 다양한 존재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강한 자가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약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존재했듯이 말이다. 몸은 약해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머리도 좋고 건강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다만 장애가 있어도 소통이나 이동에 불편이 없고, 고통이 없다면 말이다. 요지는 고통은 치료해야 할 대상이며, 장애나 약함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장애나 약함이 죄의 결과라는 인식이 장애와 약함을 치료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만약 치료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죄인이라는 도식이 성립되고 만다. 따라서 장애인, 특히 중도 장애인보다 태생적 장애인은 더더욱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향한 제자들의 질문(요 9:2)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장애나 약함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죄의 결과가 아니라면 왜 이 세상에 장애를 비롯해 약함, 질병 등이 존재하는 것일까? 정해진 답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장애인이나 연약한 자, 소수자가 속해있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배타적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 내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그들이 낫기를 기도한다. 기도는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행동이다. 연약한 자가 있으면 더 건강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장애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들이 이동하고 소통하는 데 따르는 불편을 최소화하도록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일은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하며, 이성애자는 동성애자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비장애인과 장애인,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인정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모습 말이다.

성경 속 장애인

성경 속 장애인 중 몇 사람을 떠올려보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이었다. 그는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않았다고 기록하는데(창 32:32), 이는 장애를 입은 야곱을 향한 공감과 배려로 이해할 수 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그의 유모가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급히 도망하다 떨어뜨려 다리를 다쳤고 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신의 식탁에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삼하 9:10). 이사야는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내 종”, 즉 하나님의 종이라고 언급한다. 오히려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로 묘사된다.

성경에서 장애인이 치유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은 사실이다. 피부병 환자의 피부가 깨끗해지고, 맹인이 다시 보게 되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가 말하고 듣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비장애인과 더불어 장애인도 부르시며, 전리품을 동등하게 나눠 갖는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사 33:23).

레위기 19장 14절에는 청각장애인을 저주하지 말고, 시각장애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장애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 할 이동의 권리를 포함해 기본 권리가 박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욥은 친구들과의 마지막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욥 29:15, 새번역)

장애가 있으면 일상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장애가 개선되고, 치료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당장 그런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적의 일상화는 불가능하며, 일상화된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장애가 치료되는 데 있지 않고, 장애인에게도 현실 속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욥과 같이 그들의 눈과 발, 입이 되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환대라는 추상적 개념이 장소를 통해 구체화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 성원권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성원권을 부여하는(혹은 부여받는) 지리적 실체가 ‘장소’이다. 그 장소에서 인간들은 상호작용의 의례를 거치며 사람이 된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단순히 한 개인의 신체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애인을 향한 공동체적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욥이 했던 말처럼, 장애인을 비롯한 약한 자의 손발이 되어주는 것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그러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되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집이 세워져 갈 것이다(요일 4:12). 그것이 김현경이 한 말처럼, 인간이 사람이 되고 환대라는 추상적 개념이 구체화되는 ‘장소’로서 교회가 되는 것이리라.

전남식
대전 노은동에 있는 꿈이있는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침례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 신학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지은 책으로 《나답게 산다는 것》(공저)이 있고, 《영광의 회복》 《성령과 은사》(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