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390호 커버스토리]

2023-04-27     이길용

나귀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던 예수를 향해 군중들이 소리 높여 ‘평화의 왕’임을 선포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심보가 틀어진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에게 한 소리를 하자, 이에 대한 예수의 답이 바로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였다. 사람들 입을 막을 수 없다는 은유적 표현이었지만, 21세기 찬란한 문명을 세운 인류에게 이 말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 정말 우리 세대 돌들이 소리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세계

최근 들어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미래 사회를 규정지을 법한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소형화된 중앙처리장치(CPU)의 등장이 있다.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을 생각해보자. 대략 1만 8천여 개의 진공관과 전선으로 이루어진 이 기계는 높이만 5.5미터에 길이는 24.5미터였고, 무게는 3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인공물이었다. 거기에 운영체제도 없어서 연산 명령을 내리려면 전문가가 늘 해당 진공관을 전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인내심 있게 반복해야 했다. 말이 컴퓨터지 지금 우리가 들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도 한참 모자라는 능력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반도체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CPU의 처리 능력이 향상되고 소형화가 가능해졌다. 사실 컴퓨터의 여러 부품 중에도 CPU의 크기는 매우 작은 편에 속한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CPU의 능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된 ChatGPT의 경우, 초당 1백조가 넘는 연산 능력을 지닌 컴퓨터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0과 1의 2진법 세계지만, 엄청난 속도의 연산 능력으로 이제 사람이 하는 많은 작업을 더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반도체 덕분이다. 그런데 바로 이 반도체가 ‘돌’에서 나온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래의 주성분인 규소에서 반도체 원재료가 나온다. 주변에 널린 값싼 모래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던 셈이다. 모래에서 규소, 즉 실리콘을 원기둥 형태로 추출해 미세하게 원판 형태로 자른 다음, 그 위에 여러 가공 작업을 거쳐 회로를 그려내 만들면 집적 반도체가 된다. 반도체는 전기가 통하는 도체와 통하지 않는 부도체의 중간 정도 물질로 특정 신호에 따라 전류를 통하게도 그렇지 않게도 할 수 있기에, 물질인데도 0과 1로 이루어진 논리적 관계를 구현할 수 있다. 더 정밀한 가공 능력이 개발되면서 반도체의 집약과 소형화가 이루어졌고,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연산 능력을 구현하게 되었다. 그렇게 돌에서 나온 CPU가 온갖 전자 기기에 붙어 21세기 현대와 미래를 견인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돌들이 소리 지르고 있다. 세상엔 온통 돌들의 외침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돌에서 나온 반도체들은 점차 인류의 많은 영역을 제 것으로 바꿔버리고 있다. 대표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 2016년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 바둑기사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세돌은 5회에 걸친 대국에서 1승 4패라는 매우 초라한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다. 경우의 수가 체스보다 월등히 많은 바둑의 경우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던 그때까지의 ‘믿음’은 기계 학습을 거친 알파고의 활약에 산산이 부서졌다. 알파고가 취한 전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전에 학습한 데이터에 기초해 매번 가장 승리 확률이 높은 다음 수를 뿌려대는 식의 매우 단순한 전략이었으나, 엄청난 속도의 연산 능력을 지닌 ‘돌’(시스템 반도체)들의 도움으로 인간의 지능을 이길 수 있었다.

결국 이 대국 이후 이세돌 기사는 은퇴하게 되었고, 인류는 인공지능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은 산업혁명의 연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8세기부터 등장하여 인류 문명의 발전을 기하급수적으로 앞당긴 이 산업혁명이 지닌 사회 문화적 정신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비용 절감’을 위한 산업혁명

요약하자면, 산업혁명은 ‘비용 절감’이라는 경제적 요구에 기인한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울타리 치기 운동’이라 불리는 인클로저 현상이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가치가 없거나 소유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땅들을 공유하는 관습이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흉년기에는 이런 땅에서 나는 야생식물류로 허기를 달래거나 가축들 방목을 위해 활용되곤 했다. 그러나 이후 장원제도가 느슨해지면서 이런 공간마저도 대지주가 울타리를 치고 소유권을 확정하는 일이 늘어났고, 많은 농민들이 몰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늘어난 도시 노동자들이 곧바로 산업 역군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의 높은 임금 때문이었다. 자본가들은 높은 인건비로 허덕였고, 이 난국을 풀어낼 묘안이 필요했다. 이때 제임스 와트가 저렴한 가격의 석탄을 주원료로 하는 증기기관을 만들어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1차 산업혁명의 시작이다. 높은 임금을 대체할 노동력 확보가 산업혁명의 주요한 동인이었다. 당시엔 생산공정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기에 대체할 대상은 인간의 ‘근력’이었고, 증기기관은 요긴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기관의 덩치와 부산물로 생기는 대기오염이 문제였다. 이를 해결한 것이 2차 산업혁명이었다. 증기기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는 전기의 산업화가 2차 산업의 핵심이다. 한 명의 장인이 생산공정 전체를 책임지는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포드시스템으로 대표되는 분업의 시작이 2차 산업혁명의 핵심이었다. 인류는 이를 통해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이제 선택은 구매자가 아니라 생산자 몫이 되었다. 구매자는 이전과 다르게 선택을 제한받는 입장이 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1·2차 산업혁명의 한계를 극복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전기 동력에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이 접목하고, 거기에 환경친화적 재생에너지 생산방식이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 시대의 한계도 뚜렷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여전한 장벽이 문제였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정보가 축적되고 있긴 했지만, 아직 한계치를 뛰어넘지 못한 정보처리 능력이 온라인을 오프라인의 종속변수에 머물게 만들었다.

온과 오프의 세계를 결합한 것은 눈부시게 발달한 중앙처리장치였다. 1초에 수백조의 연산이 가능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이제 정보를 처리하고 가공하여, 그럴듯한 결과물로 내놓는 것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수십조, 아니 그 이상을 헤아리는 막대한 양의 자료도 엄청난 속도의 CPU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데이터베이스화와 패턴 분석이 가능해졌다. 고양이를 인식하기 위해 수천만 장의 사진을 입력하고 패턴을 스스로 찾아 판단하라고 하면 된다. 이전 방식처럼 고양이에 관한 고유적 특징을 정보화하여 입력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더는 없게 되었다. 원하는 판단과 분석이 있다면,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나 정보를 입력하면 된다. 그럼 24시간 졸지도 먹지도 않는 기계가 수천만의 경우를 분석하여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 적용한다.

최초의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력을 대체하면서 생겨났다면, 21세기의 산업혁명은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을 대체하고 있다. 이 역시 비용 절감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변화이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인류는 지성적 가치를 가파르게 상승시켰다. 책을 읽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적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고급 활동이며 이런 작업의 경제적 가치가 높게 평가받게 되었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고임금 직업이 이런 정보처리와 관련돼있다. 법조계, 의료계, 증권계, 금융계 등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직종들은 대부분 막대한 정보를 취급하고 담당하여 특정한 패턴을 찾아 미래적 판단에 활용하는 것들이다.

막대한 양의 정보를 초 단위로 처리하는 CPU의 등장은 이런 직종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고유한 영역으로 치부되던 정보처리 능력을 인공지능이 대체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질문이 주요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철학적·신학적 물음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이었던 지능과 학습을 기계가 훌륭히 처리해내면서 이제 물음은 다시 인간에게로 수렴되고 있다. 지능과 정보처리 능력이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니라면, 과연 인간이 기계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찬란한 4차 산업혁명의 도입부에서 인간은 아주 오래된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되었다.

인간다움의 의미를 다시 묻다

앞서 이야기했듯 종교개혁 이후 5백여 년 동안 인류는 이성-논리적 세계 속에 살았다. 책을 읽고, 지식과 정보를 얻어, 이를 가공하고 실생활에 적용하여 높은 부가가치를 내면 대우를 받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개인화되었고, 타인과 접촉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 환경 속에 살았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정된 공간 안에 한 사람의 정보 제공에 의존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정보 전달 체계는 인류 모든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에 선 사람은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독점한 이들이었고, 대중은 이들의 정보 중 일부분을 필요에 따라 제공받는 구조가 인류의 삶을 오래도록 지배했다. 이런 환경 아래 인류는 개개인의 인격적 접촉보다 ‘내’가 소유한 지식과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평가받는 데 익숙해졌다. 문제는 신앙생활 역시 이런 환경에 고정되어 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보요 지식이 되었다. 신앙도 그랬다. 많이 알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유능하고 훌륭한 신앙생활로 평가되어 하나님에 관해서도 인격적 접촉보다는 그에 관한 정보가 더 우대되는 환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도 학교 같았고, 학교는 교회 같았다. 학교에서도 공부, 교회에서도 공부가 주를 이루었다. 코람데오(coram deo), 우리의 생활 세계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해 배우고 암기하는 일을 신앙처럼 착각하는 시대를 살아갔다. 교회는 코람데오의 현장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책 속에 쓰인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암기’하는 일을 신앙의 핵심인 양 착각한다. 이런 유의 정보처리는 이제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니라는 시대를 우리는 살게 되었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다시 하나님과의 인격적 조우에 있지 않을까. 지식과 정보로만 좁혀졌던 하나님의 임재를 전인적으로 체험하라는 것이 오히려 빅데이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아닐지.

현대는 간접 체험의 천국이다. 벗들이 모여도 눈을 마주 보고 손뼉 치며 말을 섞기보다, 각자의 폰을 보며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장면이 현실이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지식과 정보를 좇아 바로 앞의 인격체를 간접 접촉의 대상으로 만드는 현장이 오늘이다. 고작 십수 년 만에 인류는 간접 체험의 세상 안에 갇혀버렸다. 상대방의 체온을 느끼며, 이웃의 존재가 내 생활의 한 부분을 간섭하는 최고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 시대, ChatGPT의 시대는 도리어 인간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보와 데이터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을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다시 사람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인간만의 특별한 기능이라 여겼던 지능을 훌륭히 대체하는 기계 지능 앞에 우리는 겸손히 다시 인간의 의미를 묻는다. 이제 결과로서 정보에 집착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물음에 더 집중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정보 관련 결과는 사람이 인공지능의 풍성함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지식과 정보가 인간다움을 구별 짓는 특징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이란 누구인가, 관계란 무엇인가, 사랑함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전에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질문이 다시 불꽃을 띄며 우리 앞에 서있게 되었다. 바로 인공지능의 득세 덕분에. 시스템 반도체가 되어버린 돌들의 외침에 이제 인간이 신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돌들이 소리쳐 인간다움을 일깨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새로운 신앙생활의 패러다임

이제 더는 학습과 공부가 인간다움의 뿌리요 바탕일 수 없다. 그런 기계적 학습 너머 인간다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신앙 역시 학습이나 공부와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교회는 전혀 새로운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간접 체험을 넘어 인간다움을 제대로 깨우칠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웃의 손을 통해 온기를 느끼며, 공부가 전부인 세상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며 공감하는 즐거움을 일깨워줄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맥락에 현대의 돌들은 잊혔던 인간다움의 고갱이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격자에 가둬두기에는 사람이란 존재는 더 풍성하고 깊고, 또 감동적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 하나님은 또 어떠하신가! 그런 점에서 교회는 제대로 된 ‘하나님 체험’을 위한 조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실제적 이웃과 공감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춤을 추고, 빅데이터가 활개 치며, ChatGPT가 횡행하는 시대는 교회로선 새로운 기회의 때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 그리고 암송 속에 묶어두었던 ‘코람데오’의 믿음을 우리의 전인적 실존 속에 수행할 수 있는 때이다.

그러니 교회의 구조도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만나기’에 수월한 공간으로 재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중앙 집중적이고도 1인 중심적 구도의 공간은 코람데오의 공감을 위해서는 적절치 않다. 높은 강단의 1인을 중심으로 편안한 장의자에 앉아 수업에 임하듯 진행되는 지금의 예배를 넘어, 함께 느끼고 체험하는 공감의 현장적 전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역시 대규모 일회성 집회에 집중하기보다 얼굴을 맞대고 인격을 교류할 수 있는 소그룹으로 나뉘어 함께 코람데오를 느끼며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등장은 지금 논리-이론 중심의 신앙생활을 반성케 하며, 참된 코람데오의 믿음을 일깨우는 유익한 기회가 될 것이다. 

돌들의 외침에 귀를 제대로 기울이기만 한다면….

이길용 
서울신학대학교 학부에서 신학, 서강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고,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 신학부에서 종교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신대 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미래사회와 교회》 《루터》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 《신인류와 문화콘텐츠, 그리고 대중문화》 《이야기 세계종교》 《뇌과학과 종교연구》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