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메타버스는 누가 다 먹었을까?

[390호 커버스토리]

2023-04-27     이민형

장사꾼들의 세상

코로나 확산으로 온라인 예배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을 무렵,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기술 출현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향후 몇 년 안에 교회의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당시 목회자들 관심은 아직 채 완성이 되지 않은 온라인 예배에서 ‘메타버스’로 급격하게 움직였다. 마침 그즈음 비대면 시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을 몇 차례 썼던지라 개신교 내 ‘메타버스’ 도입 논의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다. 당시 교회의 기술 유입에 대한 나의 주장은 매우 일관적이었는데, ‘메타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타버스’는 아직 기업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술이기에 종교 영역에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지만, 우리(한국교회)는 아직 시작조차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리고 ‘아직은 많이 이르다’는 주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실 기독교의 기술 유용에 관해 썼던 글 대부분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반응은 둘로 갈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반응과 그것이 옳다는 식의 반응. 전자의 반응을 보인 이들은 대다수 새로운 기술에 흥미가 높은 30-40대 목회자들이었던 반면, 후자는 연령대가 훨씬 높거나 아주 낮은 목회자들에게서 나왔다. 기술의 목회적 유용을 향한 관심이 순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교회를 대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것이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유독 새로운 기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가 따로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더불어 내 관심이 동년배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비대면 예배, 온라인 예배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에 내가 연구한 것은 손으로 만지고, 향내를 맡고, 몸을 움직이고, 공간을 만드는 기독교의 유기적이고 물질적인 종교 매개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코로나19로 인한 멈춤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면의 시대가 재개되면서 놀라울 정도로 빨리 ‘온라인 예배’ 논의가 사라졌다. 분명 ‘온라인 예배’로 수혜를 누렸던 많은 이들이 있었고, 그것의 은혜를 경험했던 이들도 있었을 터인데, 우리는 더 이상 온라인 예배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 동안 사람들이, 특히 목회자들이 쏟았던 관심만큼 활용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온라인 예배는 규모 면에서는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사정상 교회에 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서비스로 안정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도 한때 온라인/비대면 신앙생활을 연구했던 입장에서 규모가 축소된 이후 거기에 투입되었던 인력들은 어찌 되었을까를 걱정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여기에 닿았다. ‘그럼 메타버스는?’

2023년 3월 ‘메타버스’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했던 대다수 기업이 사업 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연이어 발표했다. 그들은 ‘메타버스’가 귀환할 것이라는 여지를 남겼지만, 당장 그것이 기업의 제1논리인 수익성 면에서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회사명을 ‘메타’로 바꾼 기업조차도 ‘메타버스’ 사업에서 일보 후퇴를 발표했으니, 이 정도면 당분간 ‘메타버스’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주변에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발표를 들었을 때, 몇 해 전 나의 예측이 맞았음을 이야기하며 우쭐하고픈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리라.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보다 훨씬 큰 감정이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씁쓸함. 도대체 왜 그렇게 신기술에 혈안이 되어서 아직 상용화도 되지 않은 기술을 교회에 유입해야 한다고들 했을까? 막상 그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들이 쏟아내던 메타버스 논의는 다 어디로 갔을까? 매번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논리를 내뱉을 만큼 그들은 뻔뻔하고 교회는 만만한가?

언박싱은 사실 그들의 선교적 사명

한국교회가 새로운 기술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글에서 “얼리어답터(Early-adopter) 한국교회는 신기술을 언박싱(Unboxing)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나름 캐치프레이즈처럼 만든 문장이라 어느 정도 일반화의 오류를 감내하고서라도 사람들 시선을 끌어보려는 의도를 담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 문장이 전제하는 일반화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소위 개신교 진영에 몸담은 이들 중 일부가 ‘메타버스’에 이어 ‘생성 AI’에 대한 관심을 종용하던 그즈음에 일어난 일이다.

‘생성 AI’란 흔히 알고 있는 인공지능의 한 종류이다. 21세기 초까지 인공지능은 대부분 개발자가 직접 입력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사물을 분류하거나 인지하는 정도의 기능만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급격한 발달 이후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 즉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확장되었다. 더 이상 개발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할 필요 없이 인공지능은 어떤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그 정보를 근거로 주제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정보를 검색하고, 식별하며, 인지할 수 있게 된 인공지능에 개발자들이 추가한 기능은 주제와 관련한 글이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일이었다. 이윽고 인공지능은 문자 정보뿐 아니라 음성 정보, 이미지 및 영상 등 정보를 활용하여 글을 쓰거나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생성 AI’의 시작이었다.

이후 다양한 ‘생성 AI’가 개발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픈AI에서 개발한 ‘chatGPT’라는 텍스트 기반의 인공지능이다. 이용자가 글로 질문하면 글로 답한다. 짧은 서술형 답변뿐 아니라 일정 주제어를 주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써달라고 요구하면 장문의 글도 생성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다. 물론 아직 완벽에 가깝다고 볼 수는 없다. 이용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묻는 경우 답변이 달라지기도 하고, 온라인에 퍼져있는 정보를 근거로 글을 만들다 보니 간혹 엉뚱한 답변을 내놓거나 사실과 다른 글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chatGPT’는 이용자들의 반응을 또 하나의 정보로 삼아 끊임없이 학습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실수와 오류에 대한 이용자들 지적이 쌓일수록 점점 더 완벽한 답변을 낼 수 있는 인공지능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상황이 그래서인지 2022년 11월 ‘chatGPT’의 온라인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로 수많은 사람이 ‘생성 AI’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신학자, 목회자 혹은 기독교 관련 직업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이들은 ‘생성 AI’와 목회의 접목이라는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다. 성경 본문을 제시하니 설교문을 작성했다는 내용, 절기와 공동체의 상황을 참고하여 기도문을 만들었다는 내용, 교인 중 한 사람이 처한 상황에 해답을 제시하거나 상담을 진행하였다는 내용 등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 대부분 ‘생성 AI’의 목회적 활용에 대한 예시로 시작해 인간 목회자의 활동 영역 축소에 대한 염려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은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한국교회 내 ‘메타버스’ 소동을 겪어본 입장에서 이 역시 섣부른 바이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그래서 그들이 퍼뜨리는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기술에 이토록 적극적인 이들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생성 AI’를 연결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주로 30-40대, (세대 구분을 신뢰하지 않지만, 편의상 이야기하자면) 후기 X세대와 초기 M세대에 해당하는 이들, 굳이 말하자면 ‘메타버스’의 목회적 유용을 주장했던 이들이었다.1) 세대 구분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유행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기실 한국 사회의 30-40대는 아날로그 세상에서 태어나 디지털 기술이 발전되어온 모든 과정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일례로 이들은 필름 카메라부터 초기형 디지털카메라, DSLR, 미러리스 카메라와 스마트폰 카메라까지 현대 카메라의 발전 단계를 모두 경험한 유일한 세대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세대들도 비슷한 과정을 지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디지털 기기의 평균적인 사용 정도에서 30-40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 디지털 기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에 20대를 보낸 이들은 단순히 사용자 수준을 넘어, 가장 적극적으로 디지털 기기의 정보를 공유하고, 직접 만져보며 후기를 작성하고, 일부는 그 관심을 이어 개발자가 되기도 한, 말 그대로 디지털 기기와 함께 공진화(coevolution)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태도에 있어 이들은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얼리어답터’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새로운 무엇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종종 개인적인 사용 경험을 넘어 집단 규모의 활용을 제안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이 만들어낸 ‘메타버스’나 ‘생성 AI’를 목회 영역에 접목하고자 하는 담론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종교의 논리보다는 기업 논리에 더 가깝게 들린다. ‘이제 곧 ○○의 시대가 온다. 그러니 어서 준비해야 한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논리적인 설득력이나 종교적인 당위성보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시대 예견에 근거한다. 이런 담론에 대해 도대체 왜, 종교 영역에서 그것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시대’라는 단어가 주는 위기감은 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나만 혹은 우리 교회만 뒤처지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어느새 머릿속의 나는 두 손 가득 신기술이 담긴 봉지를 들고 있게 된다. 기업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은 결국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상품을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과 흡사하다는 의미이다.

차라리 터미네이터가 온다고 하라

그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서 ‘메타버스’는 조금 아니었지만 ‘생성 AI’의 시대가 온다고 하자. 도대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교회가 그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가? ‘○○의 시대’라는 표현에 책임질 수 있는가? 생각해보자. 몇 해 전 그들이 주장하던 ‘메타버스의 시대’는 결국 ‘메타버스라는 (아직 정의할 수 없는) 기술이 개발 과정을 거쳐 세상에 소개된 시기’에 불과했다. 어느 기업도 그것의 상용화를 이뤄내지 못했으며, 교회보다 몇 배는 많은 자본을 가진 방송국들도 이 기술을 활용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가 실패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머릿속에서 위기감을 조성하던 ‘메타버스 시대’의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 구현된 적이 없다. 과연, ‘생성 AI’의 시대는 다를 것인가?

자크 엘륄은 《The Technological Society》에서 기술의 자율성이 이미 인간의 통제 수준을 넘어섰으며, 인간은 기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남은 선택은 기술에 저항하다 패배하거나, 기술의 노예가 되는 두 가지 중 하나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사실 매우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다.2) 엘륄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으나, 지금까지 인간 사회에서 기술과의 갈등과 대립이 충돌로 이어졌다거나, 기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따라서 현대사회 상황에 맞게 그의 주장을 해석해보자면, 엘륄의 논점은 기술의 지배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섣불리 새로운 기술의 유용성을 높게 평가하거나, 활용 가능성을 긍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기술의 지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들이 종종 사용하는 ‘○○의 시대’라는 표현은 그러한 기대감을 명칭하는 매개를 통해 재현한 것일 테니 말이다.

한편 기술철학자인 랭던 위너는 엘륄과 조금 다른 부분을 지적한다. 《Autonomous Technology》에서 위너는 현대사회의 기술이 “표류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발전에 대한 욕망으로 인간은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그 결과 기술의 영향력이 본래 목적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엘륄이 예견했던 기술 지배의 현실과는 조금 다르다. 위너는 표류하고 있는 기술을 바로잡을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의견을 모은 후, 여기서 결정된 방향으로 인간이 기술을 통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3) 기술의 인간 지배라는 다소 극단적인 예견보다 현실적인 분석이며,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의 시대’는 기술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혹은 일부의 기술 소유자들이 다수 시민을 통제하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생성 AI의 시대’는 이 기술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강해질 때 혹은 이 기술을 통해 일부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려 할 때 이 세상에 도래할 것이다. 반면 대다수 인간이 이 기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한 정도에서 활용한다면, 결코 ‘생성 AI’는 표류하는 기술이나 인간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생성 AI의 시대’를 준비할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생성 AI 기술이 상용화 단계에 이른 시기’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기술이 기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활용의 선을 정하고, 동시에 이 기술의 남용(이는 기술이 스스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남용한다)으로 인해 파생될 부정적인 영향 등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chatGPT 4’ 이후의 AI 기술 개발을 잠시 멈추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하니, 약간의 시간을 번 셈이다. 우리는 이 기간에 ‘생성 AI’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누군가의 소셜미디어 포스팅 하나에 안절부절못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기술의 위치는 어디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렇다면 왜 ‘생성 AI’ 기술이 기독교, 특히 개신교 내에서 화두가 되는 것일까? 기실 기술과 개신교는 근대사회라는 같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점에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보와 발전, 개발과 성장 등의 단어가 기술과 어울리면 보존과 유지, 개선과 상생 등의 단어는 종교 영역에 더욱 어울린다. 다만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 갈수록 커져왔지만, 종교의 영역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보니, 기술과 종교의 관계는 기술이 종교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생성 AI’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대다수 기독교인은 이 기술이 목회, 특히 설교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다. 물론 ‘생성 AI’가 작성한 설교 원고에 거짓 정보가 들어있을 경우나 타인의 저작물을 함부로 사용한 경우에 대한 염려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상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들 이면에는 설교를 작성하는 목사의 역할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매주 성도들에게 은혜로운 설교를 혼자 힘으로 작성하는 목사의 노고와 능력에 대한 존경― 이 축소될 것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다. 성도들 입장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이들이 직접 본문을 해석하여 작성한 설교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온라인에 퍼져있는 정보들을 조합하여 만든 설교를 듣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 역시 적잖은 걱정거리인 듯하다.

물론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가 ‘생성 AI’에 본문으로 정해진 성경 구절을 입력하고 설교를 써달라고 하여 그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사실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들은 성경 본문의 주석, 성경 본문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한 정보, 설교 주제에 어울리는 예문이나 예화 그리고 곁들일 수 있는 이미지나 영상을 얻기 위해 온/오프라인 공간에 퍼져있는 자료 조사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자료 조사 수준의 노동을 AI가 대신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목사는 AI가 찾아놓은 자료를 분석하고, 정하고, 해석하여 양질의 설교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목사의 역할을 돕는 것이고, 목사의 노고와 능력에 대한 평가 역시 낮아질 일도 없으며, 성도들 역시 시간에 쫓겨 준비가 덜된 설교를 들을 일이 없으니 두루두루 좋은 일이 아닌가?

이처럼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크게 위협이 되지 않을 선에서 ‘생성 AI’의 목회적 활용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생성 AI’가 개신교 목회에 위협적일 수 있다는 뉘앙스의 글들이 퍼지는 이유는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생성 AI’ 교육 프로그램 등을 판매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개신교의 언어 중심성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다른 종단이나 종파에 비해 개신교는 유독 ‘언어’라는 매개에 집중한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독교 개혁의 모토 아래 개신교의 영성은 설교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저 모토가 인간의 언어만이 유일한 종교적 매개임을 주장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개신교는 언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매개를 ‘우상’ 혹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이미지, 몸짓, 가구, 건축, 향 등 다양한 물건이 매개가 되어 인간의 오감을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에 비하면, 개신교 문화는 청각(과 약간의 시각)만을 사용하는 매우 언어 중심적인 문화이다.

이러한 매개 편향성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온전히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설교는 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언어를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개신교 신앙생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교회에 나올 수 없었던 개신교인들은 귀로 말을 듣는 신앙생활이라도 계속해야 했으며, 약 3년이 흐른 지금 교회로 다시 돌아온 그들의 신앙은 더욱 언어 중심적인 형태가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대규모 언어 모델’이라 불리는 ‘생성 AI’가 그 이름만으로도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개신교의 신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이다. ‘말씀’과 인간의 언어가 같은 의미가 아닐 뿐만 아니라, 육신은 언어만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만이 영위하던 언어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종교 행위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다양한 감각을 사용해 신을 예배할 수 있고, 그렇게 신앙생활이 지속되는 한 종교의 역할이 축소될 리 없다.

덧붙여서 인간의 언어 영역에 침범한 기술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기술이 등장한다 해도 인간의 종교성이 위협받을 일은 없다. 기술이 인간의 종교 행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학습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결코 합리적이지도, 계산적이지도 않다. 종교의 대상인 신은 더욱 그러하다. (사랑 때문에 불멸자가 필멸자의 형식을 취해 죽음을 맞이하고, 부활함으로 새 생명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고백을 과연 AI가 스스로 할 수 있겠는가?) 겨우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술이, 혹여 인간의 능력보다 월등하다 한들, 신의 영역에 도전하며, 신을 믿는 행위를 파괴할 수 있을까? 기우에 불과한 ‘생성 AI의 시대’의 도래를 불안해하는 것보다 개신교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을 찾아 정진하는 것이 시대의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종교의 역할이지 않을까 한다. 기계의 논리로는 결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사랑을 베푸신 이를 따라 사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겠다.

■ 주

1) 최근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목회자들이 ‘chatGPT’ 사용 실태 조사를 했는데, 40-50대 목회자들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본 글은 목회자들 사용 경험과는 별개로 신기술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Vintage Books), 84쪽.
3) Langdon Winner, 《Autonomous Technology: Technics-out-of-control as a Theme in Political Thought》(MIT press), 88-90쪽.


이민형
보스턴 대학에서 실천신학(기독교 문화)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교수이며, 기독교 문화와 대중문화, 미디어와 문화 콘텐츠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 읽기 연구와 더불어 기술철학과 기독교가 교차하는 지점의 선교적 의미, 유기적 종교 미디어에 담긴 영성과 물성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