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민민씨가 게임을 고르는 방법

[391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3-05-31     이민형

게임,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한 방송국 뉴스 프로그램에서 ‘게임의 폭력성 유발’에 대한 보도를 담당한 기자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감한 실험을 진행한 것이 중계되었다. 그는 한 PC방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후, 여러 학생이 게임에 한참 몰입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PC방 전체 전원을 내려버렸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함께 탄식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그들이 “폭력 게임의 주인공처럼 난폭하게 변해버렸다”고 멘트를 덧붙였다. 예능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지만, 공중파 방송국의 메인 뉴스 시간에 보도된 내용이었다. 지나친 비약과 설득력 없는 해석, 무엇보다 맥락 없는 실험 보도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저 보도를 송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인터넷의 보급 이후, PC방 증가, 온라인 게임 문화 발달 등으로 청소년층의 게임 이용이 많이 증가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어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심이란 주로 게임을 향한 어른들의 시선을 의미한다. 게임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는, 혹 있다고 해도 단순한 형식의 비디오/컴퓨터 게임만 경험했던 그들에게 청년/청소년을 중심으로 널리 퍼진 온라인 게임 열풍은 이해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문화였을 터이다. 그러니 그들 눈에는 게임이 가진 문화적 의미보다는, 그것이 초래한 폭력성과 중독성이 (어린) 사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먼저 들어왔을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게임은 ‘유해한 매체’로 각인되었다. 기실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세대가 ‘즐기는’ 문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시선은 늘 보수적이었으니 게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새삼 새로운 것도 없다. 다만 그러한 태도 때문에 게임에 대한 논의가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게임의 유해성을 넘어선 게임 자체에 관한 진지한 탐구가 이루어진 것도 최근의 일이 되었다. 더불어 대중이 즐기는 문화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언제나 몇 발 늦는 교회의 관점은 여전히 유해성에 머물러있고, 그것이 ‘영적’으로 어떻게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와 같은 담론만을 형성하고 있으니, 종교적 관점에서 게임에 대한 해석은 매우 한정적인 수준이라 평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FPS 게임 중 하나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2〉. (출처: Valve 유튜브)

하지만 게임의 역사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갖춘 문화 체제로 발전해왔다. 게다가 인터넷의 보급 이후 온라인 게임 시대가 열렸고, 최근 VR 기술을 응용한 체험형 가상현실 게임까지 등장하면서 그 영역은 급격하게 방대해졌다. 게임은 더 이상 ‘아이들의 놀잇거리’로 치부할 수 없으며,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굳건한 문화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 한 편의 글에서 게임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이 글을 읽을 분들의 게임 이해도를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게임의 유해성 논란에 대한 변명만을 늘어놓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이번 글에서는 꽤 오랜 시간 다양한 게임을 접해본 입장에서 게임을 선택해온 나름의 기준을 소개하고, 그 기준에 얽혀있는 게임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준 1: 스탠드 얼론

애초에 게임은 창작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을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게임의 역사가 인터넷보다 먼저 시작된 까닭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만들어진 게임을 보통 ‘비디오게임’이라 부른다.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수용자의 수가 1-2명으로 제한적이기에 ‘스탠드 얼론 게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임의 창작자는 기계언어를 활용하여 자신이 기획한 세계를 만들고, 수용자를 그곳으로 초대한다. 게임의 수용자는 특정한 기기 ―‘게임기’라 부르는 게임용 콘솔이나 개인용 컴퓨터― 를 사용하여 창작자가 만들어낸 세계에 접속하고, 그 안에서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규칙에 따라 일정한 임무를 수행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게임 내에서 창작자와 수용자가 직접적으로 만날 확률은 매우 낮으며, 그들은 대부분 게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매개로 소통한다.

하지만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게임의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바뀌었다. 흔히 인터넷을 활용한 게임을 ‘온라인 게임’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비디오게임과 달리 다수의 사용자가 개별 컴퓨터를 인터넷에 연결한 후,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온라인상의 게임 세계에 접속하여, 동시에 게임을 즐기는 형태를 말한다. 온라인 게임이 상용화된 이후 게임 안에서 수용자끼리의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면서, 게임의 커뮤니케이션은 수용자 간 소통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창작자가 이야기꾼 역할을 하던 비디오게임과 비교하면 창작자의 역할은 수용자들이 안정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게임 메커니즘을 유지, 보수하는 관리자로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수용자 간 경쟁 혹은 협동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게임일지라도, 그들의 활동은 게임이 펼쳐지는 특수한 환경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온라인 게임 역시 기본적으로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한 창작자와의 (간접적) 상호작용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소년 완다가 죽은 소녀의 생명을 살리고자 거상들과 벌이게 되는 싸움을 소재로 삼은 〈완다와 거상〉. (이하 출처: PlayStation 유튜브)

이처럼 게임은 창작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 정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간접적 상호작용이 주를 이루는 비디오게임과 둘 사이의 최소한의 교류를 기반으로 사용자들끼리의 활동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게임이 그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비디오게임이 영화나 소설과 같이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놓은 이야기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라면, 온라인 게임은 스포츠 경기처럼 수용자들 실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큰 범주에서는 ‘게임’이라는 하나의 문화 형식 안에 들어가지만, 내용물을 놓고 보자면 특성 면에서 상당히 차이가 난다. 결국 비디오게임과 온라인 게임 사이에서의 선택은 전적으로 수용자의 게임 성향에 따라 나뉜다.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지만) MBTI 유형 검사 결과 I형 인간으로 분류되는 민민씨는 아무래도 스탠드 얼론 게임을 선호하는 편이다. 혼자,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과 게임을 즐기는 것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게임 개발자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혼자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타인의 창의력에 감탄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그에게는 게임 역시 창작물로서의 ‘가치’가 돋보일 때 가장 좋은 유희 수단이 된다.

기준 2: 세계관

그래서 민민씨가 게임을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여기는 두 번째 기준, 아니 온라인 게임은 거의 하지 않으므로 비디오게임이라는 범위 내에서 게임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탄탄한 스토리 라인이다. 게임이 만들어지는 환경은 이미지로 구성된 가상현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물리적 조건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공간이다. 창작자는 이 초월적 세계를 배경 삼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따라서 게임의 스토리는 현실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설득력이 필요하지 않다. 지나치게 역사를 왜곡하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라면 이 세계의 이야기는 신화든 공상과학물이든 리얼리즘이 가득한 다큐이든 관계없이 대부분 용인된다.

대신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짜낼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세계관이다. 영화, 소설, 연극 등 서사를 펼쳐내는 여타의 창작물이 그러하듯 세계관은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창작자가 설정한 세계관이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지 못하면 독자, 관객, 게임 이용자들은 좀처럼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한다. 많은 게임 창작자가 세계관 구상에 상당한 공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 속 세계를 규정하는 법칙과 규칙, 특성 등은 게임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기에 세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이야기가 시작된 배경과 주인공이 나서야 하는 이유는 게임의 수용자가 게임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 때문에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게임은 결코 가벼운 오락거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시리즈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임들을 보면 탄탄한 세계관에 감탄이 나온다. 한 편의 서사가 펼쳐지는 게임을 만들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여러 편의 게임에서 어그러지는 부분이나 어색한 부분이 없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 창작자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OSMU(One Source Multi Use, 하나의 원작을 다양한 형식으로 활용하는 것) 문화 산업이 발달하면서 게임을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경우들 ― 〈레지던트 이블〉 〈던전 앤 드래곤〉 〈언차티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등― 이 있다. 다른 형식으로 전환해도 흥행에 성공하는 게임을 살펴보면 그만큼 원작이 완성도가 높은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영화나 만화를 게임으로 제작하는 OSMU도 진행되곤 하는데, 이는 전자에 비해 흥행 성공률이 상당히 떨어진다. 영화나 만화 원작자들이 창작한 세계관은 게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구현될 것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영화/만화 원작 게임은 원작을 알고 있는 수용자들을 제외하고는 쉽게 몰입하기 어렵다. 더불어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도 화자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나 만화와 달리 게임은 수용자의 개입이 중요한 요소이기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서사를 펼쳐내는 경우가 많다. 간혹 서사를 포기하고 영화나 만화의 캐릭터만을 유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사가 중요한 민민씨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게임이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1〉 트레일러 한 장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HBO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어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방영되기도 했다.

기준 3: 재현

이처럼 게임은 기본적으로 개발자와 이용자 간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되는 서사를 전달하는 미디어다. 미디어의 기본 기능이 재현(representation)인바, 게임을 평가하는 데도 얼마나 재현을 잘하는가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게임 이용자들은 개발자가 만들어낸 게임 세계를 표현한 이미지가 미적인 가치가 있는가 또는 현실 세계를 얼마만큼 이질감 없이 구현했는가를 놓고 게임의 질을 판단하기도 한다. 게임의 서사가 개발자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경우 게임 속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는 탄탄한 세계관 못지않게 게임의 질을 높이는 요소로 평가된다. 치밀하게 짜인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배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탐사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반면 실존하는 공간이나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 게임의 경우,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연출된 가상의 세계는 실재와 흡사할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 현실감 있는 그래픽 재현은 이용자들이 게임에 더욱 몰입하여, 마치 자신이 실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의 배경 이미지 재현이 훌륭하다고 해도 사용자들이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연출에 성공한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이용자들이 잘 만들어진 이미지에 감탄하고 그것에 압도되어 누릴수록, 결국 게임을 즐기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의 이미지 구현은 게임 속에서 이용자가 얼마만큼 자유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론 게임의 세계에서 완벽한 자유란 없다. 게임 속에서 이용자가 조작하는 캐릭터는 기계언어와 이미지로 만들어진 게임 속 존재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의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도란 이용자가 조종하는 캐릭터가 게임 내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자유도가 부족한 게임은 제작자가 미리 짜놓은 일정한 동선을 벗어날 수 없다. 저 멀리 보이는 게임 속 세상이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어디까지나 그래픽 배경에 불과할 뿐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반면 자유도가 높은 게임은 이용자가 원하는 만큼 게임 속 세상을 탐험할 수 있다. 흔히 이런 게임을 ‘오픈월드’ 게임이라고 하는데, 제작자가 기본적으로 설정해놓은 이야기 외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게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게임의 기본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고 게임 속 세상에서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는 일을 즐기는 이용자들이 있으며, 그들의 이러한 특성을 파악하고, 게임의 서사와는 무관한 미니 게임을 배경 곳곳에 숨겨놓아 배경을 탐험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게임도 존재한다.

이처럼 이미지로 재현된 게임의 가상현실성과 게임 속 캐릭터의 자유도는 현실의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성과 자유도가 높으면 무조건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게임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한 게임 연구에 따르면, 지나친 리얼리즘이 오히려 게임 이용자들의 흥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 연구자들은 탄탄한 세계관과 현실적인 묘사, 높은 자유도로 호평받은 〈레드 데드 리뎀션 2〉에 대해 이용자들과 비평가들이 공통으로 제기한 불만을 조사했다. 그들의 불만은 게임 안에서 흐르는 시간이 상당히 지루하고 길다는 데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의 시간과 속도가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게임 속 캐릭터는 이동, 탐색 등 행위를 할 때 지극히 현실적인 동작을 취했고, 그 결과 게임 이용자들은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고 한다. 결국 이는 게임 몰입도를 반감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는 게임의 가상현실성이 가지는 양면성을 바로 보여주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이용자들은 생생한 이미지와 그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자유도, 심지어 깊이 있는 서사를 통해 빠져들 수 있는 ‘(게임이라는) 공간의 현실성’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즐길 수 있는 ‘시간의 가상성’을 요구한다. 자칫 모순처럼 들리는 이 두 가지 요구 사항은 결국 게임의 이용자들이 원하는 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게임을 하는 동안만큼은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무엇인가에 몰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사회에서 게임은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그러한 현실 자각을 가진 이용자들은 시간의 축약을 통해서라도 유희와 가책의 줄다리기를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게임이라는 여가 생활이 시간을 낭비하는 활동으로 인지되는 순간 이용자는 현실 사회의 경제 논리 앞으로 소환되고, 그 부담으로 인해 결국 게임을 즐길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 2〉 플레이 영상. (출처: Rockstar Games 유튜브)

깐깐한 민민씨 역시 게임의 사회적 역학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이러한 인식을 멀리하며, 게임을 즐겨왔고, 게임을 영화 감상이나 독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활동이라 주장하며 게임 세계 변증에 앞장서왔다. 하지만, 사회적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그만큼 다른 일에 많은 시간이 요구될수록, 상대적으로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든 게임 시간을 마주할수록, 게임 세상 속에서 조바심을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임의 높은 작품성과 서사의 완성도, 그리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유도는 어느 정도의 현실 시간과 등가적 가치를 지닐까? 사회적으로 어른이 될수록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게임이 유치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간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의 논리가 게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지만, ‘부족한 시간’은 현대인 모두에게 공통적인 제약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민씨는 그 이상의 현실적인 논리가 게임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지막 기준을 정해놓았다.

기준 4: 과금과 자동 사냥

온라인 게임보다는 비디오게임을, 세계관이 탄탄하고 서사에 깊이가 있는 게임을, 그래픽 연출이 뛰어나면서도, 자유도가 보장되어있어 상상의 세상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을 즐기는 민민씨는 게임을 예술로 본다. 해서 자본의 논리가 그 세계를 망가뜨리는 일을 매우 경계한다. 물론 게임은 산업의 산물이고, 자본 없이는 기획과 제작이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수익을 올려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의 삶이 보장된다. 그래서 정당한 가격을 내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게임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게임 이용자들끼리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 추가적인 비용 부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은 무한 경쟁을 긍정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가 게임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민민씨는 소위 ‘지나친 과금을 유도하는’ 게임은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지키려 노력한다.

더불어 성장과 경쟁이 주를 이루는 게임 시스템 자체를 이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추가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 ‘무과금’ 게임의 경우 대부분 이용자가 들이는 시간만큼 게임 속 캐릭터가 성장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용자가 들이는 시간은 게임 속 시간과는 그 가치가 다르다. 아니, 다르다고 인식하는 이용자들이 많다. 게임 개발자들 역시 이용자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적 부담에 대한 염려를 알고 있다. 해서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바로 ‘자동 사냥’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동 사냥’(Botting)은 게임산업진흥법에 따라 규제되던 불법행위였다. 지금도 허가되지 않은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게임 내 재화를 수집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시간적 부담과 게임 캐릭터의 성장을 향한 욕구, 그리고 게임 내 재화를 독점하고 그것을 다른 게임 이용자들에게 팔아 재정적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까지 더해지면서, 이용자가 게임을 하지 않아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불법행위는 좀처럼 종식되지 않았다. 이는 분명 성장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지만, 이용자들이 줄어들면 그 자체로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게임 회사 처지에서는 그들의 욕망을 자극해서라도 게임 판매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 프로그램 없이도 ‘자동 사냥’이 가능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대부분 RPG 게임에 장착된 이 시스템은 게임 이용자의 시간과 노력을 아껴주면서, 캐릭터가 성장하고 비용을 더 들이지 않아도 좋은 아이템을 수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인 발전이라고 여겨진다. 게임 이용자들은 그저 게임을 켜고 접속하고 자동 사냥 기능을 실행하면 된다. 그들이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아도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이용자들이 확인하는 것은 다른 사용자들의 캐릭터보다 강해지고 부유해진 자신의 캐릭터이다. 오직 성장과 수집, 경쟁만을 목표로 화면조차 보지 않고 컴퓨터가 알아서 진행하는 게임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희나 여가를 위한 활동이 아닌 성장주의에 물든 투기 활동은 아닐까. 대중교통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심지어 거리에서도 ‘자동 사냥’ 기능을 켜놓은 수많은 게임 이용자를 보며 깐깐한 민민씨는 게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그래서 게임이란

게임이란 무엇일까. 기술과 예술이 적절하게 섞여 만들어진 현대인의 신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상의 공간, 현실에는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상상 속 자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초월적 매개, 합의된 규칙에 따른 나름의 윤리를 세워나가는 대안적인 세계. 흡사 종교와 같지 않은가. ‘게임은 종교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유해성만을 파헤치거나 도덕이나 윤리만을 이야기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가 다양해지고 있는 세속사회에서 유사한 종교성을 가진 문화는 종교적 영역의 탐구 주제가 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자, 일단 휴대폰을 들고 앱스토어를 열어 ‘게임’ 항목을 눌러보자. 당신의 눈앞에는 수많은 모험이, 장대한 서사가, 환상적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현대인의 종교성이 숨 쉬고 있다.

생귄의 한마디

민민님, 우리 연재에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해서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분야이고 그만큼 게임 산업도 빠르게 성장한다는 뜻일 텐데, 기독교 내부에서는 진지하게 다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로 게임 중독에 대한 염려와 경각심을 알리는 측면과 게임을 청소년 사역의 통로로 이용한다는 몇몇 ‘괴짜 목사님’ 이야기 정도가 다였던 듯합니다. 반면 어떤 게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게임이 가진 다양성이나 사회적 기능, 그에 따른 장단점 등에 대해 열린 태도로 고민해볼 기회조차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글은 ‘깐깐한 게임 유저’로서 유의미한 기준들을 소개해준 것 같아 고맙기도 합니다.

전 게임을 즐기는 타입은 아닙니다. 아마도 외향적인 성향인 E 유형이라 직접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을 더 선호해서인가 봅니다. 그래도 콘솔을 이용한 축구 게임은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우정을 돈독히 느끼는 경험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때론 혼자서 게임 세계와 마주하는 경험이 마치 독서나 미술, 영화를 감상하는 그런 경험과도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색다른 이해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자신을 어떻게 투영하는지, 또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원인과 동기가 다양하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자 경험일 수 있는데, 덮어놓고 게임 중독자나 폐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성급함은 내려 놓아야겠습니다. 그보단 지나친 선정성이나 폭력성, 중독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돈 벌 궁리만 하다가 윤리적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게임 산업계에 대한 감시가 더 필요해 보이고요. 그래야 게임의 아름다움과 다채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