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저 ‘집’이 필요했을 뿐인데…
[391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로칸 피네건의 〈비바리움〉
학생들을 만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눈빛에서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흘러나옵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요?” “이번에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이야기겠죠.” 저는 평소 사람들에게 ‘영화는 쉬워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시각과 청각을 적절히 이용하는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인 매체이지만, 화면과 소리가 관객과 제대로 된 소통을 나누지 못한다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영화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어리석은 아집에 불과할 테니까요. 영화 〈비바리움〉은 겉으로는 집을 통해 ‘공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속에는 ‘가족’이라는 이상향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고요. 가족이 어떤 ‘소통’을 이뤄내야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내재할 수 있는지를 주장하는 작품입니다.
많은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 데 오랜 시간과 공을 들입니다. 당연히 그 노력에는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애틋함이 있지요. 뻐꾸기라는 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뻐꾸기는 서식지에 짧게 머무는 철새이기 때문에 알을 낳으면 둥지를 틀고 오랫동안 품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탁란조’(托卵鳥)에 속합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맡겨 기르게 하는 걸 ‘탁란’이라고 하는데요. 뻐꾸기는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스스로 숙주의 알이나 둥지 주인의 새끼를 밖으로 밀어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어미의 사랑과 먹이를 독차지하면서 성장하지요. 영화 〈비바리움〉을 살펴보려면, 우선 뻐꾸기의 생태를 알아야 합니다. 뻐꾸기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이 행위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영화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 ‘9’의 의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젬마(이모겐 푸츠)는 어느 날,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새끼 새를 발견한 학생 몰리(몰리 맥캔)를 만납니다. 슬퍼하는 몰리에게 그녀는 뻐꾸기의 습성에 관해 설명해주지만, 몰리는 이내 “둥지가 필요하면 직접 만들면 되잖아요”라고 되물을 뿐이지요. 그러자 젬마는 “자연의 섭리야. 그냥 이런 일도 생기지”라고 답합니다. 이는 엄격히 말하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닙니다. 몰리의 질문은 ‘둥지’를 향하는데, 그녀는 ‘뻐꾸기’에 대한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죠. 영화 초반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전체 맥락을 제대로 짚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바리움’(Vivarium)은 ‘동물사육장’을 뜻하는 말인데요. 누가 어떤 이유로 무엇을 사육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은 젬마와 그녀의 연인 톰(제시 아이젠버그)이 미래를 함께 보낼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인 마틴(조나단 아리스)에게서 욘더(yonder)라는 마을을 소개받습니다. 모양과 구조, 크기와 색이 모두 똑같은 주택들이 엄청난 규모로 나열된 욘더는 이상하고 독특한 기운을 자아내지요. 아니나 다를까, 젬마와 톰이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사이 부동산 중개인 마틴은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두 사람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 뛰어다니지만 똑같은 형태의 주택들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소개받은 ‘9호집’으로 돌아오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내 그들은 이 기이한 현상 안에 갇혀 그들이 소개받은 ‘9호집’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사실 ‘9’는 아라비아숫자 중 마지막에 놓인 숫자입니다. 때로 99.9999…처럼 완전체가 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반복되는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두 사람의 방향이 욘더 내에서 온전치 못할 것을 암시하는 하나의 기제가 되기도 하죠.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기제는 또 다른 텍스트를 형성합니다.
‘관계’와 ‘행위’
욘더는 ‘저쪽, 저 너머’(there)를 뜻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편에 이러한 알 수 없는 현상을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한순간에 갇힌 이 황당한 공간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들에게 박스 하나가 도착하죠. 박스 안에는 남자 아기가 있었습니다. 박스에는 ‘아이를 기르면 풀려난다’는 문장이 적혀있습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관계’와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붉은머리오목눈이 어미 새에게 낯선 뻐꾸기 알이 맡겨진 것처럼요. 젬마와 톰에게는 그저 ‘집’(둥지)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집’은 둘이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두 사람은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희망을 찾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무력감에 지쳐갈 뿐이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표면적인 교류만 존재합니다. 그토록 원했던 ‘집’이라는 공간에 있지만, 어떤 의미 있는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죠. 아이는 뻐꾸기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밥을 달라는 투정만 할 뿐입니다. 아이에게 두 사람은 밥 주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집’이라는 공간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때 집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서 존재합니다. 무한대의 ‘9호집’을 빠져나오기 위해, 젬마와 톰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키웁니다. 그러면서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애를 씁니다. 때로는 그들이 타고 온 차량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9호집’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매일같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아이의 뒤를 밟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죠. 결국 톰은 집 앞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던 도중, 무심코 버린 꽁초에 불타버린 바닥의 재질에 주목하게 되고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와 반대로 젬마는 집 안에서 아이와 계속 씨름하며 탈출구를 찾아내고자 애씁니다. 한 명은 땅을 파고 한 명은 집을 지킵니다. 그들은 그저 안식과 미래를 안겨줄 집이라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 더 이상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소통을 위한 열쇠,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
어느 곳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그들 스스로 땅을 파내려가 만든 공간에 묻히고 맙니다. 젬마가 성장한 아이에게 “우린 집을 바랐을 뿐인데”라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엄마도 참, 여기가 집이잖아”였습니다. 감독 로칸 피네건은 여기에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그만의 통찰과 풍자를 덧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갈구하는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죠. 그는 이러한 시선을 반복해서 장면에 녹여냄으로써 영화에 새로운 텍스트를 계속해서 부여하고 있습니다.
젬마는 ‘9호집’과 같은 ‘관계’와 ‘행위’의 공간이 매트릭스처럼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욘더를 찾아온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과 똑같이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양육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렇듯 무한대로 벌어지는 연속적인 순환을 보며 절망합니다. 자기 새끼가 아닌 줄도 모른 채, 쉼 없이 먹이를 물어 나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어미 새처럼 이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또한 결국 다시 처음부터 순환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 부동산 중개인으로 대변되는 마틴(세난 제닝스/이안나 하드윅케)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 추정될 뿐, 어떤 존재인지 속 시원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조물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틴은 ‘공간’이 주는 의미를 어떠한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을까요. 영화 중반부터, 아이 마틴이 복잡한 미로처럼 보이는 TV 화면을 시청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반복해서 나오는 이 장면은 ‘집’(부동산)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공간’(가치)이 아닌, 여러 의미 있는 행위가 모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소통이라는 행위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지요. 우리가 집을 갈망하는 것이 안식과 휴식 때문이라면, 가족 간 소통은 그러한 갈망을 채울 힘을 만들어냅니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가족의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금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영화에 담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쳐다보는 복잡한 형상의 TV 화면, 그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통’의 영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영화 초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뻐꾸기의 탁란 행위와도 강하게 이어집니다. 현대사회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는 공간, 그곳에서의 ‘집’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소통의 공간을 찾아 헤매는 마음과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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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니스트.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보았고, 누벨바그의 전성기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말한 ‘시네필의 3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한 영화를 몇 번씩 반복해 보기를 즐기고, 그 영화에 관한 생각을 글로 기록하기 좋아한다. 〈씨네플레이〉 〈월간경남〉 등 여러 매체에서 영화 칼럼을 연재하고 대학에서 강연하는 등 영화를 널리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그때 그 영화처럼》, 《다시, 영화를 읽는 시간》, 《오늘도 두 번째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