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독교사관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역사신학자
[391호 책과 사람] 《20세기, 세계, 기독교》 저자 이재근 교수
“20세기 말 전형적 기독교인은 더 이상 유럽에 사는 남자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사는 여성이다”라는 말이 잘 보여주듯이, 20세기 이후 세계기독교의 흐름은 변화무쌍했다. 1900년에 세계기독교 인구 중 80%를 차지하던 백인의 비율이 100여 년 뒤 20%대로 낙하한 것이 단적인 예다. ‘엄청난 지각변동’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변화가 이어졌고, 기독교의 지형도는 전혀 딴판이 되었다.1) 변화된 상황은 변화된 관점을 요구할 터. 이 역동적인 변화상을 고려하여 종교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국제정치학 및 인접 영역에 대한 폭넓은 시야로 세계기독교를 연구하는 학문이 세계기독교학이다. 이 학문적 관점이 등장한 지 1세대 정도 지난 지금, 한국은 아직 ‘초보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세계기독교사관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며 성실하게 활동해온 학자가 있다. 이재근 교수다. 그는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교단 신학교인 광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기독교역사학회 등에서 관련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이재근 교수는 세계기독교학 권위자이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 세계기독교연구소장으로 있는 브라이언 스탠리에게 지도를 받아 미국 남장로교의 세계 및 한국 선교 정책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주저로는 세계화된 복음주의 지형도를 20세기 맥락에서 정리하고 ‘21세기 세계 및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과 전망’을 압축적으로 짚은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와 존 스토트, 빌리 그레이엄, 조용기 등 익숙한 인물부터 페스토 키벵게레, 판디타 라마바이, 존 모트 등 생소한 인물까지 20세기 세계기독교의 풍경을 오롯이 드러내는 21인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20세기, 세계, 기독교》(이상 복있는사람)가 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가 출간된 지 딱 반년이 된 5월 8일, 성남종합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카페에서 이재근 교수를 만났다. 올해 가을부터 격월 연재(《20세기, 세계, 기독교》의 한국 기독교 버전)로 세계기독교 관점에서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한국인 인물들을 본지 지면에 소개할 이재근 교수와 나눈 대화를 인터뷰로 정리했다. 그의 연구 영역에서부터 역사를 보는 관점, 저서와 역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담았다.
- 주력하시는 연구를 소개해주세요.
저는 세계기독교사라는 전체 틀에서 한국 기독교를 세부적으로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연구 분야는 세계기독교사와 한국기독교사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한국에 세계기독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잖아요? 한국기독교사만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서 전공자들과 토론하면서 주로 한국기독교사 쪽으로 논문을 쓰고 있어요. 한국교회사의 한국인 인물이나 사건의 의미, 혹은 외국인 선교사 연구입니다. 그런데 주제도 어렵고 학술적으로 세부 내용을 다룬 논문이라서 책으로 출판하기는 힘들어요. 출판하는 책은 논문 주제와 상관없이 학계나 출판계에서 대중화하려는 의도로 의뢰한 연구예요. 복음주의, 세계기독교, 종교개혁과 관련한 책들이죠. 학계의 엄밀한 기준에서는 학술적이라고 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바탕이 되는 강의나 기고보다도 훨씬 느슨해진 형태로 대중화돼서 나오죠. 그럼에도 일부 독자는 제가 내는 책이 여전히 너무 학술적이라서 어렵다고 불평하기는 하죠.
- 세계기독교사관으로 교회사를 연구하신다는 말이잖아요? 이 사관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요?
글로벌과 세속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먼저는 기독교 자체가 지리적 또는 일반 역사적 의미에서 세계화됐다는 뜻이에요. 기독교 자체가 보편화돼서 모든 민족과 열방에 퍼진 종교가 된 상황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제하고 있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등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요소를 갖고 시작되었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보편적 종교가 아니었잖아요? 팔레스타인이나 로마제국 혹은 서양에 한정돼있었죠. 인류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어요. 기독교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존재했죠. 20세기 오면서 세계화가 되었어요. 모두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세계에 널리 퍼졌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외양, 특징, 본질을 더는 서양 중심으로만 볼 수 없다는 거죠. 서양은 기독교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전반적으로 세속화된 상태입니다. 이전의 모습이 부분적으로만 살아있죠. 세속화는 심화될 테고, 신앙의 기본 틀도 잃어버리고 기독교의 특징들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로 변하겠죠. 기독교를 설명하고 확산하는 주체는 서양 사람들이 아니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가 지닌 의미를 고민하며 새로운 차원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 난점은 없나요?
가톨릭과 개신교, 유럽과 미국, 유럽 내 여러 종파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서양이 기독교의 중심일 때는 비슷한 면이 강했어요. 2천 년 동안 가꾸어온 중심성이 유사했기 때문이에요. 나름 정의도 내릴 수 있었고, 외형도 규정할 수 있었죠. 이제 서양이 기독교의 중심이 아니기에, 연구하려면 비서양을 규정해야 하죠. 그런데 비서양 사회는 매우 거대하고 다채롭거든요. 아시아만 해도, 한국인과 중동 아랍인은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일 수 있어요. 한국인은 오히려 아랍보다 영미 쪽에 더 친화성을 느끼죠. 아프리카, 남미도 다 다르죠. 다른 면모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낼 수는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만들어놓은 ‘복음주의’라는 틀에 따라 공통 요소를 어느 정도 갖지만, 장기적으로 이 공통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중심성 없이 해체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어요. 점점 규정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죠. 그런 점에서 20세기 세계기독교는 정해진 틀로 보기는 어렵고요.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이며, 만들어가는 과정에 놓인 무척 모호한 실체로 볼 수 있습니다. 중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이 개념에 불안을 느끼기도 하죠.
- 세계기독교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작업은 고려해야 할 영역이 많은 만큼, 매우 폭넓은 시야를 요구받을 텐데요. 교리 수호를 중시하는 보수 교단의 신학교에 몸담고 계십니다. 연구나 교수 활동에 상충되는 면은 없나요?
세계기독교를 연구하고 가능한 한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보려고 하지만, 저도 소속은 존재하고 제가 자라온 전통이 있죠. 우리가 한국의 민족주의에 집착하지 말고 세계시민이 되자고 하면서 다양한 세계 전통을 연구한다고 해보죠. 한국이나 한국 민족만이 최고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한국인 정체성은 있으니까 모든 것을 한국화해서 보잖아요? 제게도 전통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누구든 자신이 자라난 전통으로 연구 주제를 녹여내고 적용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세계기독교학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어느 정도 그런 경험을 갖고 시작해요. 그렇게 확장되기도 하지만, 연구가 대개는 자기 전통으로 수렴되죠.
물론 학교에 세계기독교학을 직접 다루는 과목은 없죠. 현실적 여건상 제 세부 전공이 아닌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등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이 기초 지식을 쌓도록 도와야 하니까요. 학생들이 지닌 학문 역량이 발전하면 제가 쓴 책도 읽으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겠죠. 물론 현대교회사, 선교학을 가르칠 때는 세계기독교학을 언급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역사니까요. 우리가 속한 영역 바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사실로서 알려줍니다. 학생들이 다른 전통과 자기 전통을 비교·대조하며, 때로 대화하면서 전통을 창의적으로 계승해나가는 데 고민이 깊어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죠. 딱히 갈등 요소가 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 세계기독교학 관점에서 현재 기독교가 직면한 앞으로의 도전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워낙 변화무쌍하고 규정하기 어려워서요. 제가 한국에서 2010년대부터 ‘20세기’를 이야기하면서 세계기독교학, 세계기독교 지형도를 언급했는데요. 서양에서는 1990년대부터 나왔던 논의들이죠. 1990년을 기준으로는 벌써 30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세계가 변하는 속도가 정말 빠른데, 그 속도만큼의 변화가 30년간 진행됐습니다. 저만 해도 귀국한 지 10년이 지나니까 서양 학계에서 현재 무슨 논의를 하는 중인지 잘 몰라요. 가끔 동향을 체크하지만 10년 동안 있어온 변화와 학문적 축적을 따라갈 수 없죠. 항상 뒤처져 따라가는 처지라서 변화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말하면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들 것 같아요.
- 확실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네요.(웃음)
역사가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죠. 필요한 자세와 역할, 미래와 대안이 어떻다는 내용을 논문으로 써달라고 요청받으면 환장할 노릇이죠. 역사가의 일은 과거 이야기를 팩트체크하고 정리하는 거죠. 교회사학자 모임에 실천신학자나 공공신학자가 오면 ‘왜 옛날이야기만 해? 그래서 어쩌겠다고?’ 물어보곤 하죠. 그러면 ‘우리는 도무지 모르겠는데?’라고 반응할 수밖에요.(웃음)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많이들 하지만, 역사가는 대부분 미래 이야기 별로 안 해요. 팩트로 역사를 드러내려 했을 때 복원된 내용 자체가 명확하지 않거나, 찾아낸 사실들을 조합한 그림이 복원한 역사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경우도 많거든요. 자료를 발견해도 어떤 의미를 찾아서 적용할지는 더 어려운 문제죠. 의미를 부여해서 분명한 이야기를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해요.
- 과거를 읽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네요. 한국교회에서는 ‘초대교회 때로 돌아가자’ ‘종교개혁 시대로 돌아가자’ ‘Again 1907 평양대부흥’ 같은 식으로 메시지를 설파하면서 편의대로 과거 유산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요. 어떤 태도로 과거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건강한 역사 읽기 방식일까요?
과거 유산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아요. 기독교가 뿌리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종교가 아니니까 중요하죠. 한국 사회를 보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는 ‘잘 살아보세’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던 시대였잖아요? 구호를 외치며 모두가 힘을 내는 시대에 교회도 그런 식으로 발전해왔죠. 그래서인지 자극이 필요할 때마다 특정 시대를 이상화해서 구호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초대교회 때로, 종교개혁 시대로, 1907년 부흥의 시기로 돌아가자고. 다 의미 있는 시대였죠. 서양도 그런 구호를 외쳤고,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다만, 돌아가자고 이상화한 대상이 사실과 관계가 없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해요. 임의로 특정한 모습을 설정해놓고 구호를 외치는 경향이 있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 어떤 초대교회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313년 이전인가요, 이후인가요? 초대교회 양상은 1세기와 2세기가 또 다르고, 지역별로도 달라집니다. 문제는 구호를 외칠 때 명확하지 않은 실체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종교개혁 시대도 중세와 마찬가지로 마녀사냥이 계속 존재했거든요. 종교개혁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비기독교인들을 학대하거나 종교개혁의 다른 계파나 전통에 속한 이들과 치열하게 싸우자는 뜻은 아닐 거잖아요? 종교개혁‘들’(Reformations)로도 표현되는 만큼, 면모가 다양하거든요. 실체와 이상에 대한 그림이 분명치 않으면 헛되고 알맹이 없는 구호가 될 수 있죠. 폭력적 과거로 연결될 수도 있고요. 목회자나 운동가는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동원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니 구호가 필요할 수 있어요. 학자는 재갈을 물리는 사람이니까 ‘다시 생각해봐라.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와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주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20세기, 세계, 기독교》가 출간된 지 딱 반년 지났더라고요. 어떤 반응들이 있었나요?
책이 별로 안 팔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같고요.(웃음) 출간 직후 출판계와 언론에서는 약간 주목을 받았죠. 〈국민일보〉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고요. 몇몇 학자가 서평도 썼는데, 일반 독자의 반응은 전혀 모르겠네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는 나온 지 한 달 만에 2쇄 찍었거든요? 이 책은 10년 뒤에나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웃음)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는 선교단체들에서 강의 요청을 꽤 받았어요. 연속 강의도 하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이번에는 아니었죠. 코로나 이후 북콘서트나 강독회 같은 대면 모임이 줄어들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요. 주제가 어려워서 그럴 수 있다고 봐요.
- 두 책의 내용에서 보완했으면 싶은 부분은 없으신가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만 해도 2014년 강의한 내용이 2015년에 출간됐으니, 벌써 8년 전이죠. 예시 중 업데이트할 부분이 있어요. 서양의 세속화를 말하며 주일에 교회 가던 사람들이 축구장에 가게 됐다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웨인 루니, 프랭크 램파드, 스티븐 제라드를 언급했는데요. 지금은 다 은퇴해서 감독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웃음) 6번 나눠 진행한 강의를 묶어서 언급하지 못한 세부 내용도 많아요. 세계 복음주의를 주제로 잡으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는 내용이 부실한 책으로 볼 수도 있겠죠.
《20세기, 세계, 기독교》는 복음주의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위한 기획입니다. 다루는 인물이 스물한 명이잖아요? 충분히 다뤘다고 봐요. 물론 더 많이 고를 수도 있었겠죠.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전기적으로 발굴해 소개하는 일도 학자 역할이니까요. 후보군은 있었지만 책 분량 문제도 있고 해서 넣지 못했습니다. 처음 출판사로 보낸 원고가 단행본 700쪽 분량이라서 대폭 줄여야 했어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더 소개하려면 출판계와 독자층이 연결돼야 하는데, 평전식의 저술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좋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는 서론적인 책이죠. 범위는 복음주의에 한정되지만 《20세기, 세계, 기독교》처럼 ‘세계’라는 글로벌 관점으로 다뤘다는 게 특징이에요. 《20세기, 세계, 기독교》에서 ‘복음주의’ 외에 ‘비서양’ ‘오순절’ ‘혼종’으로 인물군을 나눴는데요. 이들 중 다수가 복음주의 카테고리로도 묶이니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가 큰 틀에서 각 인물이 자리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죠. 두 책은 ‘20세기’를 다룬다는 공통점도 있어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를 거시사나 개론,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미시사나 각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역사 글쓰기의 특징 같기도 한데요. 교수님의 글에는 감정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고 객관화해서 균형 잡힌 서술을 하려는 느낌이 많이 묻어납니다. 본디 지향하시는 문투인가요?
브라이언 스탠리가 했던 말 같은데요. 자신은 기질적으로도, 훈련받은 과정으로도 역사가라고요. 저는 기질적으로는 훨씬 열정적인 스타일이었어요. 공부와 독서를 좋아했지만, 역사를 특별히 더 좋아하지는 않았고요. 유학 가서, 브라이언 스탠리와 공부하면서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가라는 자리가 갖는 위치를 습득한 것 같아요. 같은 역사가라도, 한 노선만 따르는 학교에서 쭉 공부하고 현장도 제한적이었다면 달랐겠죠. 특정 공간, 특정 인물, 특정 전통을 선호하고 우러르며 다른 것을 배제하는 발언을 자연스럽게 했을 거예요.
제가 주로 활동하는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는 신학자가 아닌 일반 역사가도 있거든요. 평신도거나, 종합대학에서 활동하거나, 주제만 기독교를 다룰 뿐 정통적 의미에서 기독교인으로 부를 수 없는 분도 있죠. 같이 연구하고 발표하면, 계속해서 객관성에 대한 엄정한 요구를 받습니다.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요. ‘역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다르다’ ‘자꾸 인물을 성인으로 만들지 마라’ ‘신앙적 용어로 설명하지 마라’, 지적을 당해요. 글은 선택적 훈련이라고 봐요. 영성을 강조하면서 주관적 감정을 녹여낸 에세이는 학계에서 유통될 수 없거든요. 객관성을 요구받다 보니 글이 냉담하게 보이기도 하죠. 사실 저는 제 문체와 집필에 불만족스러워요. 에세이나 문학적인 글에 더 관심이 가거든요. 장기적으로는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죠.(웃음)
- 《복음주의 인물사》, 《복음주의 세계확산》 등 복음주의와 관련한 주요 저작을 번역하기도 하셨는데요. 번역하신 책 중에 브루스 고든이 쓴 장 칼뱅의 다면적인 면을 드러낸 평전 《칼뱅》이 인상 깊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의뢰한 책이었어요. 미국 예일대 출판부의 종교개혁자 전기 시리즈 중 하나였죠. 마르틴 루터, 존 녹스를 포함해 몇 사람 더 있었죠. 종교개혁 500주년에 딱 맞는 루터의 평전(스콧 H. 헨드릭스, 《마르틴 루터》)이 2017년 손성현 박사님 번역으로 먼저 나왔고, 제가 번역한 《칼뱅》은 2018년에 나왔죠. 원서는 칼뱅 출생 500주년인 2009년에 출간된 상태였어요. 제가 개혁주의, 장로교단 출신이고, 교단 신학교에서 강의하는데, 우리 진영에 직접적인 유익을 주는 책 한 권쯤은 작업해보자 싶었죠.
-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갖고 있던, 가차 없고 단호하면서 딱딱해 보였던 칼뱅의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어요. 시대 상황에 맞물려 처세할 때 타협적인 면도 있고, 종교개혁 진영 내 갈등을 중재하려는 장면이 돋보이더라고요. 한 인물이 제대로 소개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한 인물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입체적 면모를 조명하는 책은 왜 늦게 출간될까요? 안타깝게도 두 권 다 판매가 부진했다고 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잖아요?(웃음) 인물을 자꾸 객관화해서 보려고 하니까요. 아예 죽일 놈으로 묘사하든지, 성인처럼 받들든지 해야 인기를 끌죠.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냥 ‘사람’이죠. 루터나 칼뱅은 이미 500년 이상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우려먹었어요. 더 우려먹을수록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쌓이고, 왜곡된 이미지들이 강화됩니다. 다 벗겨내고 진짜 편지 텍스트로만 쓰다시피 한 책이라서 무미건조한 면도 있죠.
유명 선교사들 유적지를 가보면, 성격의 극단적인 면, 자랑할 만한 업적, 순교 등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구성하잖아요? 자극적인 소재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힘을 쏟죠. 실제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일상적이고 빤하죠. 학자들은 맨날 그런 자료들을 살피거든요. 편지나 보고 등을 보면 자극적인 내용은 거의 없죠. 끊임없이 순회하고, 삼시 세끼 밥을 먹고, 가정생활하고, 다른 선교사와 회의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며 일상을 살죠. 이렇게 무미건조한 내용을 독자들이 좋아할까요?
- 교수님의 연구가 사회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길 바라시나요?
독자들이 ‘사실’이라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별로 큰 기대가 없어요. 제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불타오르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요. 대부분이 갖고 있는 전제들이 있잖아요? 신학생들은 열정을 갖고 신학교에 들어오기에 더 그렇죠. 열정이라는 것은 왜곡된 감정, 왜곡된 배움에 의해 형성된 경우가 많아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법, 비교하는 법, 냉정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워서 무모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 제 역할이라고 봐요.
-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대중적인 책도 써야겠지만, 한국기독교사와 관련해 제가 가진 학자 네트워크가 있으니까요. 그 안에서 다른 이들이 쓰지 않은 주제를 발굴해 논문을 끊임없이 써야죠. 더구나 학교도 광주에 있고, 제 세부 전공도 남장로교거든요? 남장로교는 북장로교나 북감리교에 비해 연구가 미진해요. 지역적으로도 서울이나 평양이 아니니까 훨씬 열악하죠. 꾸준히 연구해서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일을 이어가려 합니다. 복상에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야기도 해야 하고요.(웃음)
1) 이재근, 〈세계기독교학의 부상과 연구 현황: 예일-에딘버러 선교운동역사 및 세계기독교학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0호》(2014), 377-378쪽 참고.
진행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