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사각형을 못(안)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391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 이 글은 2022년 8월 28일(성령강림 후 제12주)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전능의 모순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을 예수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한 주간 살아가시면서 수고가 많으셨지요? 또 유튜브를 시청하고 계시는 믿음의 동지들에게도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말 자체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는 쉬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두 가지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는 오래전 페이스북에서 봤던 글인데요. 어느 목사님이 이런 글을 올리셨습니다.
전능한 존재는 자신도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거운 돌을 창조할 수 있는가? 만약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들어낸다면 돌을 만든 시점에서 전능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돌을 만들 수 없다면 그 시점에서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어느 쪽이 되든 모순이 생기고 만다.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가 참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군요?) 저는 이 글이, 우리가 평소 전능이라는 말을 굉장히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질문 하나 더 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둥근 사각형’도 만드실 수 있나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데 말입니다. 제가 지금 말장난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막연하게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지’라고 생각해왔다면, 더 이상 그 막연한 생각에 머물지 않길 바라는 취지와 바람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나는 이야기는 예전에 어느 젊은 교인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분은 제게 ‘세월호’ 사건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꼭 물어보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세월호가 빠지는 걸 막지 않으셨는지’ 말입니다. 저는 그분의 질문이 몹시 반가웠습니다. 세월호 침몰에 대한 그분의 안타까움, 분노, 혹은 답답함이 묻어나는 그 질문은 한국교회라는 어두운 터널 끝에 보이는 한 줄기 빛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저는 세월호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고 그저 아파하고 분노했던 그 교우의 정서야말로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주제의 맥락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대개 그런 질문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런 악한 일을 얼마든지 막아주실 수 있고, 또 무조건 그러셔야만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품는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고 몹시 반갑지만, 한번 차분히 생각해볼 일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면, ‘인간의 불의함’을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불법이 뭔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픈 현실입니다.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이런 경우에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님, 전능하시다면서요! 왜 애들을 안 구해주신 거예요!”라기보다는, “하나님, 대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지 저한테 빨리 좀 알려주세요.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로서는 정말 애석하게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별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후자의 반응보다는 전자의 반응을 보이는 일에 익숙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말에 대한 깊은 오해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불법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든 결과를 좋게 만들어주시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능이라면,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휴, 다행이다. 내가 불법을 저질러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이, “우와, 내가 불법을 저질렀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네? 참 희한하지만 어쨌거나 다행이네. 후훗!” 이러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페이스북에서 본 글, 그리고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두 가지 말씀을 드려 보았는데요. 그동안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찬찬히 다시 따져보실 수 있는 작은 실마리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전능
우리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삼위일체’로 고백해 왔습니다. 이제 그 전통에 입각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어떻게 설명해도 논리에 빈틈이 생기는 참으로 어려운 개념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어느 신학자의 표현을 빌려 최소한의 정의를 내려보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부터 사랑을 주고받는 친교 속에 계신 관계적 존재’1)이십니다. 딱딱하고 생소하게 들리십니까? ‘관계적 존재’라는 표현을 곱씹어 보십시오. 삼위일체라는 말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부정하거나 없는 존재 취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일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서로의 우월함을 내세우거나 굴복시킬 수도 없고, 혐오하거나 비웃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끝없이 ‘선물로’2) 내어주며 영원의 시간 속에 결합되어 존재하시는, 그야말로 ‘한 분’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살펴볼까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방식으로 영원히 한 분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어주는 일이라면 못 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능하십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선한 일을 하는 순간조차 ‘자기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전능인 것입니다.3)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 쓰신 책의 한 구절도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 무규범의 전능이 아니고, 사랑의 전능이다.”4)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둥근 사각형’도 거뜬히 만드실 수 있다는 ‘무규범의 전능’을 기대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또 인간이 어떤 불의를 저질러도 하나님은 무조건 그 결과를 좋게 만드셔야만 한다는 요구와도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선언은, 우리가 죄와 불의, 폭력과 전쟁의 현실 속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세상에 반영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기의 표현입니다.5)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투사해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전능하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그저 자기만 잘되면 다인 줄 알고, “역시 하나님은 전능하셔”라고 말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너무나 추해지는 슬픈 순간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해야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고민의 또 다른 표현이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말입니다.
문득 크리스마스가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 능력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선물로 내어준다는 말의 끝판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 이라고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런 전능하신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영상을 보고 계시는 믿음의 동지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밖에 모르는 우리들과 함께하셔서, 이 혼탁한 세상에 선물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1) 김진혁,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복있는사람), 53쪽.
2) 앞의 책, 54쪽.
3) 앞의 책, 62쪽.
4) 김기석, 《오래된 새 길》(포이에마, e북), 203, 404쪽.
5) 김진혁, 앞의 책, 64쪽 참조.
이현우
자유인교회 목회 및 감리교생태목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회와 교회 밖 세계를 단절시키는 목회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기독교는 그런 이상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증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