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시대, 교회의 용기
[391호 A/S 커버스토리] 389호(2023년 4월)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 - 한계상황에서 복소수의 삶을 사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듬는 합집합의 구성적 공동체
변화는 한계상황에서 온다
3년간의 팬데믹 상황이 한국교회에 가져다준 변화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집합 금지’는 과거에 교회가 사회 변화에 대해 투정했던 몇 가지 난관(주5일근무제, 종교인 과세 등)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었다. 항상 예외가 될 명분을 갖고 있던 교회도 이번만은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교회의 가장 큰 정체성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IT 기술의 힘을 빌려야 했고, 그 덕에 수십 년간 굳건했던 예배의 좁은 정의(定義)는 매우 광범위한 범주로 밀려났다. 교회 역시 존립을 위해 수용 가능한 신학의 마지노선까지 교회의 의미를 넓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제는 매주 교회 건물에 가지 않아도, 심지어 캠핑 가는 차 안에서 화면을 끄고 예배를 드려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제 대면 예배, 총동원 체제 중심의 성장/관리 방식도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월호 커버스토리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가, 역설적이게도 거리를 두자 교회의 본래 의미를 성찰하게 되고, 결국 다시 교회로 돌아간 사람들의 ‘순한 맛’ 이야기다. 필자들은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위기의식, 하나님을 다시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교회로 돌아가게 된 주된 동기였다고 말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영영 교회를 떠날 수 있었던 이들이 교회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한계상황을 겪은 후의 절박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야스퍼스의 말대로 인간은 한계상황에서만 자기를 각성하고 현재를 초월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한계상황에서 교회가 스스로 변화되거나 이들의 회귀에 기여한 바가 있는가?
팬데믹이 끝나가자 ‘코로나는 더욱 선교에 매진하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신호’라는 메시지가 설교와 글로 선포되는 것으로 봐서, 여전히 교회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팬데믹조차도 그동안 그래왔듯 ‘믿음으로 넘어가야 할 고난’ 중 하나 정도로 여기며, 여전히 교회의 존재론적 한계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인생에는 그림자가 있고 삶은 복소수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요한의 이와 같은 종교적 은유는 교회 역사에서 모든 인식론을 통일했고, 결국 우리는 어두움을 죄악으로 보게 되었다. 융은 신(빛)에 대한 이런 이해가, 대극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인간 정신이 균형을 상실하여 한 부분이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들어가 원형(archetype)을 이루고 있다가 다시 균형을 잡으려는 무의식의 강한 정동에 사로잡히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요한 같은 강력한 무의식은 실제 본인의 임상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라며, 하나님이 어두움이 전혀 없는 존재라고 의식적으로 확신하는 이들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계시하는 것이 ‘욥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실 때 어두움을 없앤 것이 아니라 빛으로 어두움을 덮으셨고, 그 결과 빛과 어두움이 공존, 순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당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어두움도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지만(요일 3:9)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 존재라는 사실은, 요한의 표현이 해석의 다양한 차원을 내포하는 은유임을 반증한다. 분명 의로움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실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는 은유적으로 어두움을 죄악으로 보지만, 사실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계명인 ‘안식’은 어두움 속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불을 꺼야 잠을 잘 수 있다. 레비나스의 말대로, 의식하는 자아는 잠을 통해 이루어진다. 잠들지 못하는 무의미한 ‘깨어있음’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상실하며, 이름도, 얼굴도 없는 텅 빈 사건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의식이 어두움을 경유하는 잠(무의식)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때의 그 ‘깨어있음’으로 비로소 자기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잠은 신의 축복이다(시 127:2). 결국 인간은 반드시 어두움 속에서 자야만 하는 존재, 빛과 어두움을 교차하는 존재이며, 의식은 잠을 자는 능력이 된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깨어 있으라”는 은유는 역설적이게도 온전한 인간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빛만 있는 곳에서는 빛이 빛일 수 없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도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던 기독교 역사는 오랫동안 어두움을 부정하고 억압했으며, 그 어두움은 깊은 죄의식과 욕망이 되어 다시 인간을 공격했다. 우리는 늘 깨어있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교회는 오직 빛만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고, 신도들은 교회에서 자기의 어두움과 그림자를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는 실수(實數)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수학에서 허수(虛數)의 발견은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허수는 제곱하면 -1이 되는 수, 즉 √-1을 말하며, 보통 i(imaginary number)로 표시한다. 허수는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빛의 파동방정식, 다차원의 근의 공식, 우주의 초광속 입자들, 양자역학, 양자컴퓨터 등은 허수가 전제되어야 성립한다. 우리의 삶에도 실수로는 설명이 안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 실수와 허수는 공존하고 중첩(中疊)되어있는 것이다. 이성-광기, 소유-존재, 문명-카오스, 언어-직관, 과학-예술, 물질-정신, 의식-무의식, 현실-꿈, 필연-우연, 실체-사건, 운명-열림, 입자-파장, 빛-어두움, 아폴로-디오니소스, 일상-기적, 삶-죽음, 육체-영혼…처럼 말이다. 자기 것을 항상 나누어주는데 이상하게 더 부유해지며,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데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빛과 어두움, 깨어있음과 잠을 교차하는 존재이듯, 삶은 실수와 허수가 교차하는 복소수(a+bi)인 것이다.
교회에도 그림자가 있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6)
“네가 네 안에 있는 것을 일으킬 때 네가 가진 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만일 네가 그것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너를 파괴하리라.”(도마복음 70)
갑자기 재앙이 닥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항상 중첩되어있고, 재앙은 우리가 안전하고 행복할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다. 이 중첩은 때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종종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교회 역시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이 임재하시지만, 공동체의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파괴적인 어두움 역시 공존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도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이다.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의 한계상황, 세계의 무의식을 보았다. 자영업자들은 파산했고,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다. 패닉에 빠진 수백만의 젊은이들은 무리한 고위험 무형자산 투자로 더 큰 빚더미에 앉았고, 세대 및 젠더 갈등은 무척 심화되었으며, 정치 현장도 더 암울해졌다. 깊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성도를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고, 예배를 회복하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에는 큰 관심이 없다. 로메로 신부의 말대로, 성도 자체가 교회이며, 두 명만 모여도(마 18:20)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는(계 3:20) 신자들이 빛과 어두움의 대극을 조화시키며 깨달음을 통해 온전한 참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에 동참하고 온전한 참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갖는(벧후 1:4)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몸소 보여주신 맏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그를 따르는 형제가 되었다(롬 8:29). 이를 위해 교회는 무엇보다 성도의 삶의 허수와 그림자를 보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한 영혼이라도 이 거룩한 여정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예배와 교제, 선교, 구제에서 여전히 그림자를 부정하고, 신자들이 자기의 상한 심령을 안고 올 수 없는 곳으로 남아있다.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이미 재난 상태에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웠는데, 팬데믹이라는 재난이 이를 성찰할 수 있는 강제적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그림자를 살피는 계기로 삼지 못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대하 36:21, 새번역) 구약의 역사서는, 땅도 7년마다 어두움 속에서 안식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5백 년간 지키지 않았던 유다 땅에서, 하나님이 강제로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이주시켜, 밀린 70번의 안식년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다니엘도 노년이 되어 그 연수의 비밀을 알았고(렘 29:10-11, 단 9:2),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70년 후부터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안식은 창세기 저자의 창작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땅에도 그림자가 있고 안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도,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 백성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에 대한 통찰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
합집합을 공동체라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1990년대까지 공동체는 교집합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고백, 교회 생활 방식이 통일되고, 예배 및 프로그램 참석, 헌금, 봉사 등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마치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약관에 동의하듯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회적으로 공동체 개념이 합집합으로 바뀌고 있으며, 교회 역시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최소한의 교집합을 갖고 있지만, 교회는 각자가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양성의 수용과 소수자성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므로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하지만, 그 진통 역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교집합이 아닌 개성의 영역은 서로의 그림자가 충돌하는 다층적인 영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회적 배타성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교회들이 과연 자기 그림자를 인정하고 신자들의 성숙을 요구하는 이런 방식의 공동체를 어느 수준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말씀과 교리로 진압하고 다시 교집합에 헌신하게 만들고 그 교집합을 강조하려는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신자를 붕어빵처럼 찍어내려 하지 않고 각자가 개성화를 이루면서 신앙인으로 성숙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공적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광장의 대형 집회도 주도 세력 없이 시민 각자가 판단해서 촛불을 들고 모이는 시대다. 동기는 모두 다르지만 목적은 동일하며, 목적을 달성하면 자연스럽게 해산하고, 다른 형태로 다시 구성되는 것. 이것이 오늘날 합집합 공동체의 특징이다. 이것은 광장이라는 공적 영역이 있기에 가능해진다. 개성을 인정받는 대중은 다중이 되고, 공공성을 향유하는 공동체는 공통체가 된다(안토니오 네그리). 교회가 사회 속에서 사적 소유와 배타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한, 다양성의 발현은 요원한 과제가 될 것이다. 삶의 허수, 그림자는 교집합이 아닌 다양성 안에 포진되어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림자를 보듬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성적 현존이다”
볼프의 이 말은 보편 교회와 지역교회의 중첩성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다. 하나이며 사도적인 모든 백성의 모임인 보편 교회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 현현으로서의 지역교회는 놀라울 만큼 유연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이것을 지역성과 장소성, 계급성에 국한시켰다. 마블 히어로물과 멀티버스에 익숙해진 우리는 모든 가능성의 중첩과 무한대로 존재하는 사건의 열림은 믿지만, 교회 역시 무한한 형태로 열리고 닫힐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직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형제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는 동네 카페의 구석 자리는 왜 교회가 될 수 없는가. 10년을 다닌 교회에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마침내 할 수 있게 된 직장 신우회는 왜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새로운 가정이 교회에 들어왔음에도 공동체가 동일한 역동으로 존재하며 그 새 가정이 교회의 역동에 적응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모두의 교회일 수 있는가. 사람의 구성이 바뀌면 이미 그 교회는 다른 교회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새로운 소자(小子)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리스도가 나의 내면과 상황에 맞는 구성적 현존으로 드러나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된다.
팬데믹 기간에도 예배의 형식 유지와 대면 모임, 각종 프로그램에 사활을 걸었던 교회는 길을 잃었던 반면, 개인적 만남, 소그룹 모임, 셀모임, 직장 심방, 작고 빈번한 수다 모임을 가진 공동체성이 강한 교회들은 신자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김형국). 팬데믹은,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뿌리줄기인 리좀(rhizome, 들뢰즈)처럼, 위계나 구분을 따지지 않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중심이 없이 자유롭게 모양을 변형하며 퍼져나가는 새로운 현실 교회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가 이질성과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보편 교회를 신뢰하여 지금의 교회를 변화에 활짝 열어놓는다는 의미다. 더불어, 실재하는 보편적 그리스도는 교회가 관념론에 흡수되어 분해되는 것을 막아주는 근거가 된다. 비록 관념적으로 교회는 항상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실재론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짧은 글의 제목(부제)인 ‘한계상황에서 복소수의 삶을 사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듬는 합집합의 구성적 공동체’를 오늘날 교회의 의미로 제시했다.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외로워서, 그리워서 교회를 다시 찾는 것은 교회가 그들의 그림자까지도 보듬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바른 신앙의 방법론을 너무 일찍 제시하기 이전에, 교회는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에 귀 기울이고, 모두를 환대해야 한다.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는 불가능하지만, 무조건적 환대가 전제되지 않으면 조건적 환대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무조건적 환대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알고 있다. 신자들 자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들의 합집합을 구현하기 위해 교회는 신자들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형태를 바꿀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공적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팬데믹은 이것을 가속시킬 만한 충격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나마 재앙이 가진 유익은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것을 실천할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교회는 그 충격을 교리로 해체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모두를 환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진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칼 융, 《욥에의 응답》(《인간의 상과 신의 상》, 솔)
미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새물결플러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사월의책)
김형국, 《다시 재난, 다시 하나님 나라》(비아토르)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새물결)
최규창
바이오벤처기업 대표.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를 썼고, 《헤아려본 세월》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탈교회》 등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