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되게 신나: 신학적 실존으로 산다는 것
[391호 커버스토리]
직업으로서의 신학
독일 사상가 막스 베버가 쓴 《직업으로서의 정치》(나남)를 떠올린다. 그는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썼다. 하나는 정치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람들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러나 대부분 실제로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따르는 것이 보통”(36쪽)이지만, 그래도 구분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 변수가 바로 ‘경제’라고 지적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은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인 데 반해,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유재산 제도의 지배하에서 한 개인이 이러한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를 〈위해서〉 살 수 있으려면 몇 가지의, 말하자면 매우 통속적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는 – 일상적 상황에서는 – 정치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을 소득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어야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부유하거나 아니면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개인적 생활여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6-37쪽)
우리는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는, 나아가 정치를 통해 부를 쌓고자 하는 탐욕에 영혼이 팔린 삯꾼 정치가들 때문에 정치가 타락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정치를 사사로운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대의’에 헌신하는 참 정치가를 그리워한다. 달리 표현하면 정치를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 인식하는 사람 말이다. 베버가 유명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줄곧 강조했던 내용은 이 책에서도 일관되게 공명한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 대신 ‘신학’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나는 신학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학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려면 아무래도 신학과 처음 만난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어느 날 홀연히 신학과 만나다
스무 살 파릇한 청춘의 몸으로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이들도 많다. 대체로 어떤 ‘체험’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목회자가 될 요량으로 신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내가 자라난 환경은 여성에게 ‘직업으로서의 신학’이 권장되지 않았거니와 심지어 가능하다는 암시조차 없었다.
다만 철학과를 가겠다고 하니, 한숨을 깊이 내쉬던 고3 담임선생님 얼굴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부유하거나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개인적 생활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아이가 취업이 보장된 실용학문을 마다하고 순수학문을 전공하겠다는 말이 퍽 당돌하게, 나아가 무모하게 들렸으리라.
홀몸으로 나를 키운 어머니가 “그 공부 한다고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기를 쓰고 말렸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졌겠지만, 다행히도 어머니는 ‘교회 물’을 비교적 잘 드신 분이셨다. 이런저런 목사님들에게 주워들은 풍월 가운데 어쩌다 ‘철학은 만학(萬學)의 왕’이라는 말도 있었는지, 도리어 내 선택에 힘을 실어주셨다.
철학과에 들어갈 때도 그게 밥벌이가 된다는 계산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냥 그 공부를 해야 인생의 엉킨 실타래가 풀릴 것 같았다. 스무 살 내 청춘은 무겁고도 잔인했다. 살기 위해 공부했고, 숨을 쉬기 위해 책을 펼쳤다. 그러다 신학을 만났다. 내가 다닌 학교는 전공과 상관없이 신입생이면 누구나 기독교 필수 교양 과목을 들어야 했는데, 그 수업이 장난이 아니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의했다는 죄목으로 해직됐다가 복직한 노교수님의 강의는 매시간 ‘이단’에 가까웠다. 교회에서 늘 듣던 익숙한 언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와 학교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모범생’ 소리를 듣고 자란 나로서는 도저히 소화하기 어려웠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다르다니, 외국어도 아닌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읽으라고 권한 책들은 또 얼마나 ‘빨갱이’스럽던지, 이러다가는 신앙이 아예 없어지겠다 싶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흔들리는 믿음’에 휘청대다가 주일만 되면 아이들 앞에서 ‘확고한 믿음’을 떠벌리기가 못내 부끄러웠다. 이 자기 분열을 극복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붕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교사를 그만두는 건 너무 비겁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그리고 가난하게 하리라
2학년에 올라가면서 신학을 부전공으로 택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진과 쓰나미의 연속이었다. 기존에 알던 것, 참이라고 믿던 것이 부정당하는 경험은 당혹감과 위기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부정 없이는 새로운 앎, 참된 믿음에 가닿을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 과정은 은근히 신나서 중독성마저 있다. 모르면 불안한데, 알면 자유로워지는 이치는 모든 배움의 기본이다.
내친김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시작할 때 낳은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박사 논문을 썼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그것도 애 엄마가 공부, 그것도 신학을 공부한다는 데 호의적이지 않은 눈길이 우세했다. 격려받지 못하는 공부를 계속한다는 게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를 여기저기 맡겨가며, 그럴 형편이 안 되면 등에 업고서라도 학교에 다니는 데 죄책감마저 들었다. 정기적으로 대학교회 청년부를 지도하고, 간헐적으로 번역과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다.
돌아보면 죽을 만큼 힘든 시기였는데, 짚어보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게 아닌가 싶다. 신학이 좋아서, 그 공부를 통해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어서 그냥 매달렸다. 목회자의 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여성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교단 교회의 ‘초(슈퍼/울트라)가부장제’를 뚫어낼 내공이나 자원이 나에게는 없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며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기에는 교회보다 대학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 대학도 초가부장제를 체질화한 남성 신학자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정치판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만 말이다.
그러다 결단의 시기가 왔다. (남성)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여성신학’ ‘생태신학’ 따위를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신학은 상아탑 안에서나 떠드는 거라며 다들 도리질했다. 목회와 신학은 다르다는 말이 슬프고도 절망스러웠다. 교회와 무관한 신학이라면 순수보다는 관념에 가까울 터였다. 그 무렵, 노년기에 들어선 선배 여성 신학자 한 분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때는 여자한테 목사 면허증을 안 준다고 해서 못 받았지. 요즘은 준다는데 왜 안 받아. 면허 없이도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걸릴 때를 대비해서 면허증은 따놔.”
그 말씀이 계시처럼 들렸다. 사사기 9장에 등장하는 ‘맷돌 여인’이 떠올랐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될 욕심에 살육 부대를 이끌고 학살 참극을 벌일 때, 망대 위에서 맷돌 위짝을 던져 아비멜렉을 처단한 무명의 여자 말이다.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여학생들에게 농담 삼아 이 말을 던지곤 했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들어 쓰실지 모르니 맷돌 들 힘 정도는 비축해두어야 한다고. 맷돌도 옆에 있고 타이밍도 좋은데, 힘이 없어서 기회를 놓쳐서야 쓰겠냐고. 그런 심정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개교회 설교 요청이 있을 때면 어디든 달려가는 ‘전국구 목사’로 떠돌다 몇 년 전 시골 작은 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부유하거나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개인적 생활여건’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고 있으나, 그래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줄기차게 받아먹으며 산다. 남성이 다수인 신학 생태계에서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다는 건 그만큼 불안과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지만, 그 한계가 곧 매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힘 있는 다수가 보지 못하는 걸 포착해내는 인식론적 특권이야말로 가난한 소수에게 허락된 은총이다.
평신도여, 신학하라
다시 베버의 글로 돌아가 보자. 《직업으로서의 정치》 독일어 원제는 ‘폴리틱 알스 베루프’(Polik als Beruf)다. 독일어로 직업을 가리키는 ‘베루프’(Beruf)가 소명에서 나온 단어임을 상기하면 의도는 분명하다. 정치를 단순히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지 말라는 거다. 정치에 임하려면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40쪽)
‘정치’의 자리에 어떤 공적 활동을 넣어도 괜찮다. 종교개혁이 세상에 가져다준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는 마음 말이다. 내가 일하는 자리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다. 나는 지금 고장 난 세상을 고치라는 하나님의 징집 명령을 받았다. 굳이 신학교나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내 삶의 자리에서 ‘성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우리 시대의 신학이 신학자나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신학자나 목회자는 신학에 ‘의존해서’ 사는 삶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짙다. 반면에 평신도는 신학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보장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소명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물음 하나와 맞닥뜨리게 된다. 직업으로 연결될 게 아니라면 왜 골치 아프게 신학을 공부하냐는 물음이다. 그냥 신앙생활만 잘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결로 제시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그 ‘잘’이 문제다.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게 ‘잘’하는 건지, 신학을 공부해야 가늠된다. 그것도 오래오래 걸려야 겨우겨우 알게 된다.
나라의 위기가 정치를 정치가에게 일임하고 백성은 나 몰라라 손을 놓는 데서 비롯된다면, 교회의 위기도 똑같다. 평신도들이 신학의 책임을 직업적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위임하고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 만족하는 한, 교회는 암흑기를 바장이지 않겠나. 그러니 평신도가 신학을 한다는 건 공적인 측면에서 보면 교회를 구하는 일이다. 아울러 그 자신으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근대적 주체 선언에 합류하는 혁명 과업이다.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우리는 ‘뼛속 깊이 자본주의’에 물들어있다. 돈의 위력은 새삼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도 자신의 자리와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우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이라는 걸 꿰뚫어 보셨다(마 6:24 참고).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평신도의 신학하기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강력한 운동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무교회주의자들을 떠올려보라. 교단 교회들은 거의 친일 부역의 길에 나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를 지킬 수 없다는 명분이었지만, 속내는 밥그릇 지키기였다. 그런 진흙탕 속에서 무교회 운동이 꽃피었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에 따라 직업 생활을 하되, 그곳이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가 되도록 힘쓰기 위해 매일 성서를 읽고 신학을 공부했다. 일제가 ‘악질’로 분류한 건 그런 이들이었다. 큰 교단 큰 교회는 오히려 우스웠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깨어있는 평신도, 주체화된 ‘삶의 지식인’이 가장 두렵고도 위협적인 존재였다.1)
어린아이들을 보면, 과연 모든 인간은 예술가로 태어나는구나, 저절로 깨닫게 된다. 누가 보든 말든 아무 때나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면서 논다. 움직이는 게 아이들의 본성이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죽는다. 그런 아이들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틀에 가둔다.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듯 기성 체제에 맞는 부속품으로 키워낸다. 예술은 죽고 기술만 남는다. 생존 기술, 경쟁 기술이 뛰어난 일부는 ‘정규직 취업’의 별을 따지만, 나머지는 “정기적이고 확실한 수입”(《직업으로서의 정치》, 140쪽)에 대한 기대를 박탈당한 채 영원한 ‘희망 고문’의 지옥 속으로 유폐된다. 거대한 폭력이다. 폭력이 만성화된 사회에서 우리 삶은 한껏 쪼그라들었다.
‘풍성한 생명’(요 10:10)은 예술의 영역이지만, 기술 만능 시대의 예술은 기껏해야 어린 시절 치기로 여겨질 뿐이다. 더 참담한 건 일부 ‘잘나가는’ 예술가만 예술가로 대접받는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식으로 우리 삶을 제패했다. 그 술수에 말려들지 않을 재간이 별로 없다.
여기서 내 눈길은 신학을 향한다. 구원투수를 기다리듯 간절히 신학을 바라본다. 예술하듯 신학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져야 자본주의의 독주를 막을 수 있다. “음미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삶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이미 철학자라는 선언으로 바꿀 수 있다. 같은 논리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 신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신학자다.
그런데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담보로 한 과학에서조차도 ‘나쁜’ 과학이 있다고 하더라. 홍콩 출신 영국 여성 과학자 매완 호는 복제 양 돌리가 세상에 출현했을 무렵, 정부나 거대 기업과 결탁한 생명공학을 ‘나쁜 과학’이라고 몰아붙였다(매완 호, 《나쁜 과학》). 신학도 그렇지 않을까. ‘학’의 표피를 뒤집어썼다고 해서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현존 질서에서 설 자리가 취약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해 신학에 ‘의존하는’ 행위는 아무리 잘 짜인 논변으로 치장한들 ‘나쁜 신학’이 아닐까. 현존 질서의 안티테제가 아니라면 신학이 존재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신학하는 마음은 우선적으로 “돌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겔 36:26, 새번역)이어야 하리라. 목회자와 평신도가 참되게 만나는 지점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목회자-되기’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신학-하기’를 실존의 소명으로 삼는 목회자와 ‘평신도-되기’에 머물지 않고 ‘신학-하기’에 자기를 투신한 평신도가 함께 손잡고 ‘아름다운 신학’ 위에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그림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감동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영역이다. 참됨과 선함의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자꾸 마음이 돌같이 굳어진다. 바리새파 사람처럼 ‘진지한 꼰대’가 되기 쉽다.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은 추한 것, 못난 것도 환대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세상이 궁금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편을 가르지 않는다. 의견이 달라도 윽박지르지 않는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인정한다. 함께 놀되, 힘없는 친구를 편든다.
신학이란 ‘신나는 학문’이라고 들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하나님이 숨겨둔 신비의 놀이터다. 보물찾기하듯 소풍 놀이를 즐긴다. 신학하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이토록 가볍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는다. 언제든 일어나 다시 발랄하게 논다. “일하는 것, 쉬는 것, 노는 것, 이 세 가지는 영원할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놀이니라.”2)
1) 구미정, 《십자가의 역사학》(한가람), 116-123쪽 참고.
2) 구미정, 《두 글자로 신학하기》(포이에마) 참고.
구미정
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대중과 소통하는 기독교윤리학자. 숭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이은교회에서 목회하며 ‘화성으로 간 책방’을 꾸리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 글자로 신학하기》 《두 글자로 신학하기》 《그림으로 신학하기》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교회 다시 살리기》 《작은 교회가 답이다》 《낯선 덕: 다문화 시대의 윤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