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하는 마음, 다행의 마음

[391호 커버스토리]

2023-05-31     박다혜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인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삶이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나자빠져 있는 마음에 몸마저 갇힌 것처럼. 일상을 밀고 나갈 무언가가 있어야겠다고 느꼈을 때 일상의 밀도를 채우기 위해 주워 담은 일 중 하나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기독교학 입문과정’ 수강이었다. 2년 전 작성한 지원동기에 따르면, “일터에서의 어려움으로 낙심되는 마음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아 내 삶의 푯대 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으며 이 상황과 시간을 지나가 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참으로 전형적인, 사는 게 힘들어서 하나님을 붙잡는, 신앙 간증에나 나올 법한 표현이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교회에서 들은 특강, 가까운 목사님의 추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 관심이 가던 곳이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인생이 무탈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익히 알듯, 신학 공부를 한다고 일상이 괜찮아질 리 없었다. 내 삶은 여전하다. 곁을 지켜주는 사람과 도움의 손길, 망각의 힘에 기대, 눈앞에 닥친 과제를 해내며 가끔은 의연히, 대개는 근근이 시간을 해치울 뿐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거쳐 나는 신학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기하고 묘한 나날이었다. 현재 입문과정 마지막 학기를 수강하며 여덟 번째 과목을 공부하고 있다. 이 글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산 지 한참 만에 신학 공부를 처음 접하며 지금까지 느낀 일종의 해방감을 소개하는 글이다.

신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들

고백하자면 생의 길이만큼의 세월 동안 성경을 가까이 두고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이 책이 재밌다거나 여기에 담긴 텍스트를 향유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글이 많으면 교과서마저 좋아했을 정도로 텍스트를 즐기는 사람임에도, 성경은 어디까지나 읽어야 해서 읽는 책이었다.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선택해서 집어 든 다른 책이나 글을 읽으며 느끼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만족감이나 즐거움을 성경에서는 얻을 수가 없었다. 슬프게도 내내 그랬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쩌면 그동안 이 책을 ‘책’으로서 읽어내거나 텍스트로서 대면하며 씨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교회에서 자랐다. 주일학교에서 길러졌고, 철따라 엄마가 냉장고에 붙여놓은 성경 암송 구절을 외웠다. 학창 시절 매일 할 일을 적은 목록(To-do list)의 가장 위에는 항상 성경 읽기나 QT, 혹은 둘 다 적혀있었다. 여름 성경 학교와 수련회는 고3 여름방학 보충 학습을 빠지고서라도 당연히 가는 것이었고,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단의 가르침을 따라 주일은 성경 외에는 공부하지 않는 날로 지켰다. 새해가 되면 교회에서 나눠주는 성경읽기표에 형광펜을 칠해가며 성경 통독을 했고, 방학에는 부모님을 따라 종종 새벽기도나 수요예배, 금요철야에 나갈 정도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무섭게 열심이었다. 그때의 내가 가진 모범생 기질 탓도 있지만, 나름은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기억한다). 스무 살이 되어 삶의 터전을 이동하며 이전처럼 교회에서 사는 듯한 생활은 벗어났지만, 공부하는 시간만큼 아르바이트해야 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캠퍼스 선교단체 활동에 아낌없이 일상을 밀어 넣었다. 여러 버전의 성경을 각 상황에 맞춰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잘 안다고 믿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꾸역꾸역 눈으로 읽어내던 이 책을 머리로 해석하며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니, 내가 가진 상식과 이성을 바탕으로 이미 해석은 시작되었는데 그 시도로 공동체 안에서 고립된다고 느낀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단상에 오른 설교자의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전달되는 설교에 대해 다른 강의에서처럼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불편했다. 해석의 근거는 무엇인지, 다른 해석은 없는지 궁금했다. 해당 본문이나 주제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책이나 문헌을 알고 싶은데, 동일한 설교자의 과거 설교 영상 목록을 선심 쓰듯 알려줘서 당황스러웠다. 어떤 한 사람(물론 주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의 해석일 뿐인데, ‘선포’된 말씀으로서 토론의 여지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 때로는 우스웠다. 설교 들은 후 작성하는 피드백 카드(‘마음카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등 부르는 명칭은 교회마다 다양하다)에는 그날의 성경 본문이나 설교에 대한 질문, 의견 따위를 쓰는 것이 아니고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만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었다. 소규모로 모인 가정교회에서라도 각자의 해석을 놓고 토론하고 싶은데, 한 설교자에 의한 거의 유일한 해석을 그대로 복기한 후 곧바로 삶에 대한 적용으로 넘어가는 게 항상 허전하고 찜찜했다.

더 큰 문제는, 막상 성경을 내가 직접 읽고 해석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평생 성경을 가까이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게 성경은 눈길 한 번에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많은 고전 중에서도 특히 자주 막히고 걸리는 어려운 책이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정도만 짐작할 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긴 세월 교회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음에도 가져보지 못한 탐구 과정을 나 혼자 혹은 교회 밖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기관에서 신학을 전공까지 했을 수많은 이들을 만났음에도 효용 또는 자취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나치게 야박한 평가일까. 하필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의 근본 구조가 법의 해석과 적용인데, 해석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는 교회와 거기에 익숙해진 나의 신앙이 시시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상과 삶을 직면하게 하는 신학

만약 당신이 어떤 계약서의 문구나 법률 규정의 내용을 보여주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변호사에게 묻는다고 생각해보자. 좋은 변호사라면 단답으로 즉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질문자가 궁금해하는 문구를 포함하여 문서 전체를 반드시 확인하려 할 것이고, 최소한 해당 계약의 경위와 배경, 관련된 모든 법령과 해석례, 판례 경향 정도는 검토한 후에야 비로소 답변할 것이다. 법률 규정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답변해도 되는 극소수의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여러 가능한 해석에 두루 바탕하여 답변이 구성될 여지가 크다. 질문받는 즉시 닫힌 형태로 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자가 아니라고 보는 편이 이롭다.

내게 익숙한 사례로 예를 들었을 뿐, 내가 속한 직업 영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계 등 다른 전문 영역은 물론이고, 언어와 관계를 매개로 하는 모든 영역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 관계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일상 대화나 문자메시지도 맥락을 무시하고 일부만 잘라내 문자적으로만 접근하면 오해를 산다. 그런데 왜 우리가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진리의 영역과 진리를 적용하는 삶의 과정에서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고 치밀한 지적 관심을 포기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을 알고 세상에 사랑을 베푸는 그분의 방식을 알기 위한 노력을 왜 무시하게 되었을까.

이런 갈급함 속에서 시작한 공부였기에, 매 수업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실 일터에서 모든 기력을 쓰고 집에서는 주로 누워있는 내가 퇴근 후에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강의는 평일 저녁 7시 15분에 시작했기에, 수업이 있는 날에는 정시 퇴근에 성공하고 저녁 식사를 간단히 때우거나 거르는 것까지 감내해야 참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라인 강의가 병행되면서 현장 강의에 가지 못해도 수업을 듣는 일이 가능했고, 현장 강의를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덕분에 마지막 학기까지 올 수 있었다. 먼저 입문과정을 시작했던 배우자에게, 거의 매 수업이 끝나고 쏟아냈던 말들을 기억한다. 성경을 주제별로 정리한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이 있다고(과목명부터 처음 들었으니 말 다했다). 성경 각 책의 기록 시기와 순서, 저자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고(그럼 본문 해석도 전혀 달라질 수 있는데 왜 교회는 안 가르쳐준 거지?). 우린 어떻게 교회사를 들어본 적이 없는지 너무 안타깝다고(이렇게 재밌는 것을 그동안 몰랐다니!). 이런저런 주제나 성경 본문에 대해 신학적 논쟁이 있다는데 알고 있었냐고(그도 나도 신학적 논쟁의 존재 자체에 대해 처음 들었다). 왜 더 일찍 찾아볼 생각을 못 했는지 후회된다고(어디서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고 신난다고. 알고 보니 성경은 읽어봐야 별것 없는 시시한 책이 아니었고,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읽고 고민하고 탐구하고 논쟁하며 살아냈던 시간의 기록이 이만큼이나 쌓여있었다.

그렇게 내게 성경은 읽음직한 책이 되었다. 성급하게 교훈을 찾아내려 하거나 얕은 이해만으로 삶에 대한 적용을 향해 돌진하지 않고, 일단 읽고 생각하고 씨름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흔히 책을 읽을 때 당연히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함께 읽게 되었다. ‘신앙 서적’이라 불리는 종류의 책들 역시 언제부턴가 종교 버전의 자기계발서와 다를 바 없거나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를 글로 풀어낸 수준이라고 느껴져 거리를 뒀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좁은 책 선정에서 비롯된 판단이었을 뿐, 세상에는 (비록 많이 팔리지 않아도) 진지한 신학적 고민과 연구를 담은 좋은 책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종교적, 주술적 문서를 넘어서자 풍성한 읽을거리가 보였고 각 시대와 공명하는 신학적 성찰의 흔적들을 만났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교회 바깥에서 얻는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의 도움을 받고 세상 학문을 활용할 수 있었던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고할 수 있었다는 한 복음주의자의 분석1)처럼, 나는 세상에서 만난 사람과 책, ‘믿지 않는 이들’로 가득한 크고 작은 공동체, 투쟁하는 이들과 시민사회로부터 배운 연대의 경험, 공부하는 이들이 쌓아 올린 지적 성취 등을 통해 건강한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땅의 삶에 반영되도록 애쓰는 길 위에 서고 싶다고 감히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과 삶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숱하게 들어온 간증 속 이야기와 달리, 고통은 좀처럼 극복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차별과 배제, 폭력과 착취의 현장은 늘어만 가고, 이웃의 짙은 슬픔을 의연히 지고 품기보다 ‘신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느냐’는 부르짖음에 내 마음도 요동친다. 아마도 내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경험하거나 혁명적 성취를 목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신학을 하고 또 계속할 것이다. 허상에 지지 않고, 무기력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이 시대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에 실재하는 나와 이웃의 삶을 직면하며 살아내기 위해. 늦었지만 다행한 신학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한 세상 속에서 한 귀퉁이 작은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해석해내는 삶을 살고 싶다.

■ 주

1)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IVP)


박다혜
타인의 일터를 가까이서 경험하고 이웃의 삶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민주노총(금속노조) 법률원’ 또는 ‘법무법인 여는’으로 불리는 일터에서 노동자의 관점으로 법을 해석하며 소송, 자문, 연구, 교육 등의 노동을 한다. 본지 2023년 2월호에 인터뷰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