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하게 만드는 질문들
[391호 커버스토리]
나는 왜 신학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명쾌한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하나의 이유를 댈 수 없기도 하고 신학을 해서 내가 현실적으로 얻는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별로 가진 것 없는 내가 신학을 한다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와 진로 계획, 불안한 앞날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신학에 매료되었고 신학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이걸 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감에 자주 사로잡히기도 하고, 먹고살 수 있을지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신학이 너무 재밌다고 느낀다. 출근해서 오전 8시부터 정신없이 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해 대충 저녁을 먹고 신학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으면, 피곤할 법도 하지만 새로운 활력이 생겨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신학은 내게 ‘대유잼’이다. 신학이 ‘대유잼’이 된 이유 중 하나를 꼽자면, 나에게 항상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던졌던 질문들을 좇으며 내가 신학을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생겨나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마주했다
“예수 나의 첫사랑 되시네♪” 예수님은 나의 첫사랑이 아닌데 난 어떡하지? 따라 부르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두 첫사랑이 예수님일까? “주는 나의 친구, 주님 날 친구로 부르셨네♬” 친구라면서, 왜 주님이라고 불러야 하지? 친구라면 그냥 ‘예수’라고 부르고 반말로 대화하듯 기도하면 안 되나? 참 이상한 친구 관계네….
흔히 말하는 ‘신앙의 1세대’인 나는 교회의 언어와 문화가 낯설었다. 교회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신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신을 설명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말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경계와 규칙들이 즐비한 곳. 교회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친구나 양육자를 따라 교회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데서 생기는 질문을 나눌 사람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지내던 시간이 외롭고 힘들기만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교회가 좋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좋기만 했던 나는 사람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를 열심히 이해하고 따라가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곳에 신앙의 정답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열심히 신앙생활의 규칙들을 따르려는 나의 노력을 높게 평가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과 낯선 느낌은 교회의 용어로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질문의 답이 되지는 못했다. 내 것이 아닌 말들로 나를 포장할수록 ‘좋은 신앙생활’과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질문들을 고이 접어두기로 결심했다. 믿음이란 내 헛된 생각들을 내려놓고 진리의 말씀에 나를 복종시키는 일이라고 배웠으니까. 그즈음 기도 제목은 늘 ‘내 생각을 버리고 성경에 맞춰 생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질문을 지우고 순종하며 교회의 사람으로 살아가던 내게 문제가 생겼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가족들에게 질병과 가난, 죽음이라는 ‘고난’이 닥쳐온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었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신앙은 대체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난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답이라고 배워왔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고통 앞에 그런 말들은 공허한 구호 같았다. 신앙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며 더 열심히 기도해보기도 했지만, 그저 구호에 그친 답만을 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갈 뿐이었다. 내가 지금껏 배워왔던 신앙의 규칙으로는 내 문제에 대해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 앞에 놓인 이 상황들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맞나요?’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될까요?’ ‘고난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것이 연단의 과정인가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묻고 또 물었지만, 교회에서 가르쳐준 하나님은 내게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내 머리카락 수까지도 헤아리실 만큼 나의 사정을 아시고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이 갑자기 동굴에 들어가 침묵으로 일관하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을 지켜낼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떠났다.
누군가 믿음은 내 의지가 아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교회를 떠나도 위와 같은 질문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침묵의 하나님을 보아하니 신은 허상일 뿐이라고 차갑게 생각하려 했지만 자꾸 내 안에 피어오르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믿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믿음은 정말이지 선물이라고 느꼈다. 거부하고 싶고 짜증 나고 바란 적도 없는 일방적인 선물.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정말 싫었지만, 나는 내 질문에 하나님처럼 회피할 수 없었기에 그에게 묻고 따지기 위해 다시 교회로 향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 생겨나는 작고 큰 질문들, 하찮기도 하고 본질적이기도 한, 재밌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마주했다. 이 질문 꾸러미를 하나씩 풀어보기로 한 것이다.
교회 문화와 잘 조화되지 못하는 내가 가장 어렵게 느낀 것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언어와 교리를 이해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규칙과 분위기를 읽어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모태신앙 바이브’가 없다면 ‘신앙의 1세대’만의 뜨거운 열정과 경험이라도 가지고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데 그런 게 어려웠다. 내가 그런 사람인 걸 어떡하겠는가. 어릴 때부터 잘하던 허무맹랑한 질문이나 계속하는 열정만 부릴 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질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도전적인 것들이었다. 태생적으로 죄인인 나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여버렸다. 부활하고 승천하기까지 과정을 대속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혀 은혜롭지 않았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들을 살해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신이라니, 그것이 사랑이라니. 심지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원죄 때문이라니. 나는 내가 바란 적도 없는데 구제 불능의 죄인이 되었다가 일방적이고 끔찍한 사랑의 수혜자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도대체 왜 사랑이죠, 하나님?’ ‘저와 예수님께 뭐 하는 짓입니까?’ 나는 그런 폭력적인 사랑을 받고 싶지 않았다. 구원의 감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삼위일체론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십자가 사건은 내게 감동도, 은혜도, 그 무엇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다만 이제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무엇이 맞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이 과정에서 붙잡고 싶었던 것은 ‘사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었던 듯하다. 자꾸 사랑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되묻게 되었다.
내가 직접 배우고 싶어졌다
나를 신학교로 향하게 한 질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성애’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런 질문을 갖고 보수적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2013년 미국 퀴어 퍼레이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된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는 당연히 교회 사람들도 성소수자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성소수자들도 나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지 않은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는 피조물인 사람들이 존재 그 자체로 핍박받고 있다는데, 교회가 먼저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주일에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때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들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핍박받고 있다는 것을 단 한마디도 듣지 않았는데 알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동성애 반대 구절’로 알려진 성경 본문을 열심히 찾아 읽어봤지만, 나는 그게 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며 혐오해야 할 근거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입장이 무엇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때부터 내 삶이 되어버린 신앙의 질문에 대해 직접 배우고 알아보고 싶었다.
신학교 입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월호 참사’였다. 우리 사회가 마주하게 된 큰 참사, 수많은 내 또래의 죽음을 일상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었다. 이 참사를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누구라도 그렇듯 나는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은 마침 부활절 즈음이라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던 주간이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나는 원래 절기 행사와 예배를 빠지지 않았었는데, 밤늦게까지 뉴스를 보느라 특새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갑작스러운 죽음이 사회적 참사 때문이라니, 가족들은 대체 어떤 심경이었을까. 온 마음과 신경이 그곳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특새는 내게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저 죽음이 나의 신앙과 무관한 것인가?’ ‘모든 걸 떠나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음을 파고드는 질문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사들의 막말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건 앞에서 응당 세상과 사람들을 위로해야 할 목사들의 막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자꾸 헤집어놨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이 ‘막말’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하는 방법과 시기가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생각의 틀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를 탓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깊은 슬픔 앞에 그런 우습고 같잖은 ‘신의 뜻’ 따위의 결론밖에 내지 못할 정도로 신앙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막말하는 목사들과 내가 본질적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내 언어를 찾아내고 싶었다.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 틀려먹은 생각이 선하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그 생각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아프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그동안 고통의 문제를 그저 ‘연단’ 따위의 개인적 일로 치부하던, 사사로운 신앙에서 기인한 내 생각의 틀을 깨고 신앙에 사회적 시선을 더하는 사건이 되었다. 공적 신앙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결국 그 답을 찾기 위해 신학교 입학을 결정했다.
난 교단에 대한 이해 없이 곧바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가까웠고,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종합대학이라서 열린 시선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곳에 갔다. 입학식에서 ‘개혁주의 보수 신앙’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교단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개혁’ ‘보수’라니 이 무슨 안 어울리는 조합이란 말인가. 학교에서는 이런 구호를 자주 외쳤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혁’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내 20대를 학교에 투신했다. 혹자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냐고,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며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난 재밌었다. 재밌어서 열심히 했었다. ‘개혁’은 무엇일까. 어떤 것으로부터 개혁을 의미하는 것일까. 개혁된 것은 무엇이고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 남은 한 가지 키워드는 ‘행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행함, 그것이 개혁이지 않을까. 매 순간 용기 있게 현실을 마주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 교회의 언어로 말하면 ‘삶이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개혁이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생각해본다. ‘삶의 예배’라는 말도 내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는데, 개혁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조금은 답을 얻었다. 행하려면 선택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의 순간에 신앙이 주는 부름에 정직히 응답하는 일. 나는 그것이 ‘삶의 예배’라 여긴다. 이는 신학적 논리와 연구의 귀결이라기보다는 내 신앙생활과 경험에 따른 답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예수를 진정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사실 교회 다닌다는 말이 조금 웃긴 것 같다. 교회는 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라는 걸 우리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교회’라는 공간을 떠나게 된 계기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었다. ‘기쁨의 예배’라는 표현이 잘못된 건 아니다. 예배는 내게도 기쁨이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사회적 죽음 앞에서, 생명도, 죽음 이후의 평안까지도 흔들고자 하는 불의한 공권력 앞에서 교인들끼리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일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고 그곳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그날 나는 예배 자리에 끝까지 앉아있지 못하고 예배 시간 중에 울며 뛰쳐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 다니는 것 자체에 죄책감이 들었고, 우리가 외면한 죽음과 소외시켜온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는 성육신하셔서 시대의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사셨는데 그의 제자라 말하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 성육신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상성’이 팽배하게 자리 잡은 곳, 그 정상성에 들지 못할 때 경건하지 않다고, 신실하지 않다고 나무라는 곳이 교회였다. 주일성수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과연 이 사회에서 일요일뿐인 주일을 성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회는 왜 그것을 가르쳐왔을까. 교회는 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인데, 다닌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 때문에 나는 교회에 버티고 앉아있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내 일생의 선물인 믿음은 버려지지 않는 것이라,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가진 낡디낡은 텍스트와 관습적으로 따르는 의례와 규칙으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나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또다시 신학에서 찾았다.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해석이 곧 희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또 신학교에 입학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교회를 잘 다니던 신실한 신학생’에서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데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랄까. 나는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못했고,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믿는 걸 어쩌겠는가. 교회도 다니지 않고 기독교계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신학을 전공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신학을 전공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 나는 이제야 진정으로 예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됐다. 누군가에겐 무례하게 들렸을 법한 질문들을 계속하다 보니 하나님 야훼와 그가 보내신 예수가 궁금해졌다. 누군가 알려주는 답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어졌다. 신앙은 이성과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지만, 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적 탐구를 하다 보니 예수를 진정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야 나의 고백을 마음을 다해 드린다. 당신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당신의 삶을 이천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내가 예수 당신을 진정 사랑한다고. 당신이 정말 나의 메시아이며 구원이 된다고 말이다. 어떤 대상을 알아가고 싶어서 계속 질문하고 그 사람을 닮아가고 싶은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 생겨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았을까. 전혀 아니다. 나는 신학의 매력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체 뭐라고 하나님을 다 알 수 있으며, 내가 뭐라고 세상에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오늘을 살아내며 더 나은 희망을 좇을 뿐이다. 그래서 난 계속 질문할 것이고, 계속 사랑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신학을 하는 이유이다.
김자은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를 졸업했고 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시립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