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시장에서 네 할 일을 하라’는 고약한(?) 부르심에 응답하기
[391호 다시 만난 세계]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철빈 본지 이사
1. 고민하던 것을 실천하는 사람
인터뷰이는 6년 전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독자 인터뷰를 했던 이철빈 씨다. 당시 그는 군 복무 중 복상을 구독하고 있었고, 재정 사정 때문에 구독을 끊으려다가 편집부로부터 구독권을 선물 받으며 복상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로 몇 년간 본지를 후원하며 후원이사로 지내던 그는 얼마 전 복상의 신임 이사가 되었다.
20대 초반부터 기본소득, 부채탕감 등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졸업논문으로 ‘부동산’을 연구했고, 지금은 공간 공유 플랫폼 ‘스페이스클라우드’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앤스페이스’(NSPACE)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만든 사회주택에서 살고, 공유오피스를 관리하고, 공동체 공간 개발과 플랫폼 업무를 수행하는 등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시도하며 경험을 쌓았다.
꿈꾸던 일들을 해나가던 그는 지난 10월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SNS를 통해 알렸다. 그의 글을 보고서야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빌라왕’ 사건과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전세사기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철빈 씨가 이 소식에 크게 힘들어하고 있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마침 그때 이철빈 씨가 전세사기·깡통전세 희생자 추모제에서 발언한다는 말을 들었다. 4월 18일 추모제 장소를 찾았다. 추모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복상도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제안했다. 회사 생활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활동을 겸하고 있어 바쁜 그의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는 기회라 고마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만남은 전세사기·깡통전세 희생자 추모제 이후 대책위 활동 일정에 따라 동행하면서 이뤄졌다.
- 바쁘실 텐데 인터뷰이로 나서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성공한 덕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웃음) 복상 인터뷰를 두 번씩이나 하네요. 얼마 전에 이사도 되었는데요. 잡지를 애정하며 읽다 보니 이런 고마운 일도 생기네요.
- 독자 인터뷰를 하신 후 6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복상을 보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이 땅에서 삶으로 일구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여러 좋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청춘희년운동본부 활동을 접하면서 ‘희년함께’를 알게 되었고, 2017년 희년함께에서 인턴십 활동을 했죠.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문제들, 그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문제를 다루고 싶다는 목표를 설정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2018년에는 희년함께에서 앤스페이스 정수현 대표님을 인터뷰하는 자리에 동석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표님이 사업을 통해 이루려는 가치와 제 미션이 일치하는 걸 알게 되었죠. 그때 앤스페이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가 졸업논문 주제를 고민할 즈음, 대표님께서 회사의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보겠냐는 제안을 주셨어요. 저는 논문에 대한 전문적인 자문을 얻을 수 있었고, 회사는 사업 확장에 필요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윈-윈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2019년 3월부터 앤스페이스에 합류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2. 부동산 스타트업 직원은 어떻게 피해자가 됐나
-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2021년 9월부터 셰어하우스에서 나오기로 결심했어요. 혼자 공간을 쓰고 싶기도 했고, 결혼을 하기 전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전월세 계약 매물을 알아봤죠. 괜찮은 조건에 올라온 매물을 확인하고, 전세 계약을 준비했습니다. 등기부등본, 건축물대장을 꼼꼼히 살폈고, 공인중개사를 끼고 계약하고, 은행 대출도 잘 살펴보는 등 흔히 알려진 것들은 다 했어요. 경험 많은 지인들에게도 물어보고 계약할 때 서류도 한 번씩 더 확인했어요. 계약할 때는 전세반환보증보험 가입도 요구했고, 대리인은 “당연히 보험 가입해 드리겠다”고도 했죠. 11월에 이사도 하고, 대출도 심사가 되어 정상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전입신고도 마쳤고요.
- 전세사기였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계약할 때는 서류상 아무 문제가 없고 권리관계도 깨끗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세금 체납이 알려진 것만 무려 63억 원 이상 있었어요. 전세보증보험은 가입이 안 되는 상태였고요. 제가 계약할 시점에 이미 집주인이 보증보험 블랙리스트에 올라 가입 제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가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지요. 집주인이 계속 보증보험에 가입해주지 않아서 독촉하다가 등기부등본을 한 번 더 떼보니 2022년 1월 27일부로 세무서 압류가 걸려 있더라고요.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체납이 왜 걸렸냐고 문의했는데, ‘종부세가 너무 많이 나왔는데 납세하겠다’라고만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통화가 연결된 적이 없습니다.
-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머리가 멍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피가 마르고 하늘이 노랗게 된다는 표현이 실제로 어떤 건지 알게 됐죠. 일터에서는 피해 사실을 동료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어요. 일할 때도 정신을 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죠. 까딱 잘못하면 눈물이 터질까 봐, 넋 놓고 일하다가 동료에게 피해를 줄까 봐 조심해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부터는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기 시작했죠. 5월이 되어서는 같은 건물에 사는 피해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며 틈날 때마다 기도했어요.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던 중 시편 27편 ‘너는 주를 신뢰하고 기다려라’는 말씀을 보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기도 하더라고요.
- 시간이 조금 지나 10월 12일경 돌연 집주인이 사망합니다. 그 후로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요?
제가 겪는 전세사기 문제는 여러 사례 중에서도 가장 특수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규모의 사기를 저지른 집주인이 죽었거든요. 김대성 씨로부터 피해를 본 피해자들이 모인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습니다. 엄청난 혼돈과 감정의 소용돌이였어요. 그가 살아있을 때도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집주인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리되었고, 주변인 수사는 계속됐지만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상속권자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집의 소유권자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모든 법적 절차가 중단됩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상속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소송이나 경매 등 실질적인 조치를 할 수 있게 되죠. 상속권자인 4촌 이내 친지들은 아직 전세사기 및 상속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 일이 흐지부지되고 있습니다. 기다려보는 수밖에요. 이미 자산보다 세금, 보조금 등 채무가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친지가 상속을 포기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고 있어요. 가뜩이나 어려운 전세사기 해결 과정이 매우 장기적인 난제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3.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재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표적인 전세사기 사례는 이철빈 씨가 당한 ‘사망한 빌라왕 김대성 사건’과 ‘인천 미추홀구 일대의 조직적인 전세사기사건’이다.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전세사기가 부동산 정책 실패와 정부의 관리감독 실패로 인한 사회적 참사이며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문제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그사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2월 28일 ‘인천 미추홀구 일대의 전세사기사건’ 피해자 한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고 피해자는 보증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상황에서 전세대출마저 연장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뒤 피해자들과 시민들은 추모 행진을 했고, 4월 초 지역별로 활동하던 전세사기 피해자들, 흩어져 활동하던 피해자들이 모여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 그런데도 4월 14일 또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18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주안역 남측 광장에서 이들을 추모하고, 전세사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요구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이철빈 씨는 시위하는 자리에 처음 참여했다고 한다. 2016년 촛불 때도 군 복무 중이라 시위 한번 못 가봤고 이전에도 해볼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추모제에서 마이크를 잡고 세상을 떠난 분들과 그곳에 모인 피해자들을 위해 추도사를 전했다.
- 지금까지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얼마나 되나요?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2,700세대 이상으로 알려져있어요. 제가 피해를 당한 ‘빌라왕’ 김대성 씨 사건은 알려진 것만 1,139채인데 출처가 불분명하고 여러 정황을 봤을 때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수도권에서 가장 큰 조직 사기는 3,400채 정도 된다고 해요. 며칠 전 나온 구리 쪽 전세사기는 940채 정도 나왔다고 합니다. 동탄 쪽에도 250여 세대가 있다고 하고요. 부산 쪽에도 수십 세대가 나왔습니다. 전국적으로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어요. 이렇게 알려진 것만 해도 한 1만 세대 가까이 되지 않을까요.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전세사기 문제를 사람들에게 오픈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그중에서도 가족에게 말하는 게 가장 어려웠죠. 가족에게 말하고 난 후에 많이 들었던 말은 “그것까지 하면 네가 너무 힘들지 않겠냐” “이렇게 피해자 활동을 해야 하는 거냐”였어요. 걱정하는 마음이죠. 이런 활동을 하면서 제 얼굴도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고,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되니까요. 그래도 가족들에게 제가 이런 활동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고, 지금은 걱정하지만 말리지는 않아요.
- 철빈 씨가 피해자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선은 제 상황상 다른 분들보다 이런 활동에 집중할 여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 상황은 그나마 견딜 만하기 때문에 생계가 절박한 다른 분들을 대신해서 더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부동산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편이고, 기여할 수 있는 업무나 활동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죠. 답답한 상황에서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 앞으로 나서는 성미를 못 참은 것도 중요한 이유겠네요.
- 그렇더라도 피해자 대책위 공동위원장까지 맡는 건 쉽지 않은 결정 같아요.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제가 이 사회에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기도 해요. 요새는 에스겔서를 자주 읽거든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늘 사람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변화를 끌어내죠. 에스겔을 보고, 가서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합니다. 결국 에스겔이 대언했을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살해당한 사람들이 회복되고 원래 가야 할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보면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어요. 정말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이 상황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싶죠.
어쩌면 나를 이 상황으로 밀어넣으신 건 하나님이 아닐까요? 어떨 때는 그분이 정말 미워요.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분을 인간의 형상으로 대면할 수 있다면, 멱살을 한번 세게 잡아보고 싶어요. 온갖 말들로 따지고 싶죠. 그다음에는 그분 품에 안겨서 울고 싶어요.
제가 지금 하는 활동들은 제 신앙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력도 생기고, 조금 더 멀리 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 늪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기도하면서 얻은 위로 때문이에요. 살다 보면 아찔했던 순간들이 많잖아요. 물리적으로요. 정말 까딱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저는 운 좋게도 그런 순간들을 지나서 이렇게 살아있죠. 그건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아요. 제가 아직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싶고요. 그중 하나가 이 일일 수도 있죠. 이런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하나님이 계속 제게 물어보시는 것 같아요. 그럼 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제게 맡겨진 일을 하겠습니다’ 다짐하게 됩니다.
4. 힘들어도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전세사기 문제로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자, 4월 27일 정부와 여당(국민의힘)은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을 발표했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해당 집을 우선적으로 사들일 권리인 우선매수권을 주겠다는 내용과 집 살 돈을 오랫동안 낮은 금리로 빌려주고, 집을 가질 때 내는 취득세 등 세금을 깎아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아니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집을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세입자에게는 최대 20년 동안 시세의 절반 정도로 싼값에 집을 빌려준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특별법을 두고 피해자들은 ‘보여주기식 대책’이라고 비판하며 법안 폐기를 요구했다. 특별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정부가 정한 6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이를 ‘피해자 배제법’이라고 비판했다.
5월 3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을 요구하며 행진에 나섰다.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부터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이 사는 동작구 어느 아파트까지 현수막과 마이크를 들고 행진했다. 삼각지역부터 신용산역, 한강대교를 지나 노들역까지 걸어가며 피해자들의 요구와 심정이 무엇인지 외쳤다. 그곳에서 발언까지 한 철빈 씨와 그의 집으로 이동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 여기서 살게 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021년 11월에 입주했으니까요. 이제 1년 반이 지났네요.
-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건가요?
계약 이전에 집에 설정된 대출이 없었고 확정일자를 받고 전입신고를 마쳤기 때문에 임차인 대항력은 모두 갖춘 상황입니다. 2023년 11월까지 계약이 되어있고, 그때까지는 길거리에 나앉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계속 거주할 수 있어요. 다만, 전세대출을 끼고 들어온 집이다 보니 은행에서 집주인의 신용도, 재무 상태를 이유로 대출을 거절하면 문제가 복잡해지죠. 일단 저는 묵시적 갱신으로 대출 연장을 하고 2025년까지 계속 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다른 피해자분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사정은 다 제각각이에요. 저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긴 합니다. 고정금리라서 이자가 조금 낮거든요. 정부 정책금융으로 받은 거라 한 달에 내는 돈이 20만 원대거든요. 여력이 좀 있는 편이죠. 부양하는 가족이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직장도 있으니까, 월 이자 정도라고 생각하고 버티면서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피해자 중에는 변동금리로 대출을 받으신 분들이 꽤 많아요. 그분들은 올해 초 금리가 올랐을 때, 100만 원 넘게 내는 일도 생겼습니다. 보증금 규모가 크고 대출을 많이 받았고, 변동금리라면, 한 달에 130만 원 넘게 내야하는 막막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 대책 마련이 시급한 이유겠네요.
정부가 무책임하다고 느끼는 게 이런 상황들 때문이에요. 이 문제를 개인이 개별적으로 해결하려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죠. 그때까지 한 달에 100만원 넘는 이자를 계속 내야 한다면, 정말 힘든 일이죠. 피해자분들 중에는 집기를 내다 팔고 있다는 분도 있고, 개인회생이나 지원대책 요건을 맞추기 위해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거나 신혼부부인데 이혼을 하는 등 말로 다 못 할 비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생을 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수시로 나오고요. 집주인이나 건축주가 내야 할 관리비를 내지 않아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끊기고 승강기가 멈췄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어요.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떡해야 하냐고 걱정하시는 분도 있었고요. 전세사기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 출산하신 분도 있어서, 피해자들이 모인 채팅방에서 축하를 해드렸어요. 다들 아이가 정말 잘 자랐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속으로는 무척 찡했습니다.
- 얼마 전 일본 NHK에서 취재하고 갔다고 하셨죠?
네. 저도 궁금해서 취재하러 온 분들에게 여쭤봤어요. 이전에도 NHK에서 전세 문제를 다룬 적이 있냐고요. 그런 적이 없다고 했어요. 이 문제가 너무 커지니까 안 다룰 수 없다고 판단했대요. 그런데 난관은 일본인들이 전세 제도 자체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일본에는 전세가 없고, 우리나라와 부동산 시장의 형태가 다른 것 같아요. 일본에는 부동산 시세가 정확하게 나온대요. 우리나라는 정확하게 알 수 없잖아요. 이 얘기를 하니까 한국은 어떤 식으로 시세를 알아보냐고 묻더라고요. 시세라고 하면 보통 공인중개사가 부르는 호가를 얘기해요. 공인중개사들이 말하면 믿을 수밖에 없죠. 제가 NHK취재진 분들에게 한국에는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야 할 게 있다고 했어요. 건설사 및 부동상 사업시 건설사 등에 대한 공급자 금융은 없고, 건축이나 부동산 사업을 할 때 수요자들에게 돈을 미리 받아서 자금을 조달하는 구조가 있는 겁니다. 전세금 받아서 분양받고 갭투기를 하고 아파트 사업을 굴리는 식입니다. 미분양이 되면 건설사들이 망하게 되죠. 이건 굉장히 괴상한 일입니다. 원래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공급자들의 금융이 정비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 같습니다.
- 어떤 피해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기가 이뤄진 매개가 주거 공간이라는 사실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고요. 어디에 투자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집을 계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기라는 점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요.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임대인은 이 집에 와보기는 했을까. 저는 계약할 때 대리인과 계약했어요. 임대인은 3년 동안 1,000채 넘는 매물을 계약했으니까요. 계산하면 하루에 한 건꼴로 계약한 것이거든요. 이 사람은 계약할 때 어디에 어떤 집이 있는지 제대로 알기나 했을까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부와 여당이 내놓은 특별법을 보고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자를 선별해서 최소한의 인원만 제한적인 방식으로 지원하겠다는 건데요. 굉장히 부정적으로 봤고, 기도가 절로 나왔어요. 이건 정말 인간들의 힘으로 해결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정부보다 더 큰 존재가 나서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죠. 하나님이 나서주셔야 한다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수많은 피해자가 있잖아요. 주님, 수많은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님이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5. 피해자가 바라는 대책과 변화
5월 8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제대로 된 특별법 재정을 촉구하는 1만 명 서명운동과 함께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대책위는 “정부와 여당이 피해자들의 요구를 담은 실효성 있는 특별법을 제정하라”며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선구제 후회수’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채권 매입 기관이 먼저 피해자들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사들이고 추후 구상권 행사를 통해 비용을 보전하는 방안이다. 5월 10일, 철빈 씨도 대책위 농성에 동참했다. 그가 난생처음으로 농성을 해보는 날이었다.
-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크게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방 대책도 있어야 하고요. 이미 발생한 피해를 어떻게 구제할 건지 대책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부동산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관리감독 체계도 필요합니다. 예방 대책으로는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저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인에게 세금 체납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알았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나온 전세사기 대책들을 보면 여전히 계약 전에 임대인의 세금 체납 정보를 알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문제죠. 임대인이 매매계약을 해서 임대인이 바뀌는 경우에도 새로운 집주인에게 자본이 있는지, 세금 체납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새로 온 집주인에게 세금 체납이 있고, 전세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다면,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임차인들이 정보를 확인해서 불리한 계약을 당당히 거부하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동산은 관리감독 장치가 없는 편이에요. 주식시장은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금융감독원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죠. 주가조작을 하거나 시세 부풀리기를 하면 금융감독원이 조사를 해요. 사실 우리나라 자산 시장의 70%는 부동산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자산인데도 관리감독하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죠. 통계를 보고 대략적인 전망을 내놓는 부동산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권한이나 역할이 매우 제한적입니다. 부동산이 국민들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한데, 이 시장을 건강하고 공정하게 지켜갈 수 있는,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구가 꼭 필요하죠.
정부와 여당이 내놓는 구제 대책들을 뜯어보면 피해자들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피해자들을 걸러내고 지원하지 않겠다는 정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피해자가 크게 분노하고 있는 거죠. 피해자들이 원하는 대책 중 가장 대표적인 건 공공의 임차보증금채권 매입입니다. 우리가 임대인에게 돈을 빌려준 거였으니까,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권리 채권을 정부가 먼저 매입하는 겁니다. 채권을 할인된 가격에라도 사서 피해자에게 피해 금액의 일부라도 돌려주고 구제해주는 길이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다음에 임대인에게 전세 보증금을 받아내든지, 임대인이 부당하게 획득한 이득에서 이를 받아내든지, 아니면 나중에 경매나 이런 과정을 통해 몇 년을 두고 천천히 회수하면 된다고 제안하는 거죠.
- 이런 피해자들의 요구에 대해 정부는 어떤 반응인가요?
정부와 여당에서는 이런 방식이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면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이에요. 피해자들은 그 말에 굉장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개인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사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구조적인 문제고, 조직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문제를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정부가 피해자들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어요. 문제를 책임지지 않고 선을 긋는 것이 문제죠. 저희는 정부가 세금을 투입해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부담은 우리 사회가 몇 년에 걸쳐서라도 나눠서 부담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장기적으로는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고, 나중에 누군가 문제를 겪더라도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있다는 사회적인 신뢰를 만드는 일인 것 같아요. 그게 우리 사회에 훨씬 더 이로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들 반응은 어떤가요?
사실 국민의 혈세를 개인이 사기당한 일에 왜 투입해야 하냐는 여론이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면, 개인이 투자 목적으로 돈을 넣었다가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었고, 개인이 부주의해서, 덜 알아봐서 사기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임대인이 사기를 쳤고, 국가는 막지 않았고,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금 대책을 제안하고 요구하는데, 정부는 구제하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이죠.
그동안 반복적으로 나왔던 사회적 참사를 향한 공통적인 반응이기도 합니다. 이걸 왜 세금, 혈세로 해결하려고 하냐는 거죠.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 앞에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계속 실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변화의 계기가 세월호 참사가 돼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코로나 때 큰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에 대한 손실보상 문제도 그렇고요. 작년에 이태원 참사도 같은 얘기가 반복되었죠. 사회적 참사는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두고 우리 사회는 아직 새로운 방식의 문제 해결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도 낮은 것 같고요. 새로운 방법을 이행하기 위한 변화에 대한 거부감도 여전히 심한 것 같습니다.
혈세 투입에 대한 이중 잣대 같은 면도 있어요. 사실 국가가 부도난 아파트를 매입하거나 미분양된 아파트를 매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하지 않거든요. IMF 때 부실 금융기관들의 채권을 정부가 인수했던 사례도 있었고요.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공공이 부도 아파트를 매입하는 특별법이 통과되기도 했죠. 사람들이 그런 사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상대적으로 그것보다 규모가 작은 사회적 재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대하는지 모르겠어요. 약자들과 피해자들 목소리에 응답하지 못한다는 것, 우리 사회의 숙제 같습니다.
-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전세사기를 포함한 깡통전세, 역전세 등 보증금 미반환 사태가 많이 발생할 겁니다. 지금 정부가 내놓는 예방책이나 관리감독 정책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통계를 보면, 2021년 말~2022년 초에 전세 가격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계약 만기가 다가오는 2023년 말에서 2024년 초에 전세사기 문제가 가장 극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미 진행 중인 문제도 심각하지만, 앞으로 나올 피해자들 규모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죠.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두 번 다시 전세살이는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치를 떨고 있습니다. 분명한 건 불안정하게 유지되어온 매매, 전세, 월세라는 삼각 구조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전세’라는 미궁에서 모두 안전히 탈출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