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전염되는 동네책방

[392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이자벨 코이젯트의 〈북샵〉

2023-06-30     최은
이하 사진: 〈북샵〉 스틸컷

용기를 지지하는 용기

바닷가 작은 마을에 사는 플로렌스 그린(에밀리 모티머)은 16년 전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간직한 채 책을 읽고 책에서 얻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며 산책하는 것이 플로렌스에게는 가장 즐거운 일이었는데요. 여느 때처럼 바닷가에 앉아 사색하던 플로렌스는 문득 이곳에 책방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는 은둔 신사 에드먼드 브런디쉬(빌 나이)밖에 없는 어촌이었는데 말이지요.

어부 레이븐(마이클 피츠제럴드)은 플로렌스에게 용감하다고 했어요. 먹고살기 바빠 책 따위 관심 없다면서도 레이븐은 해양소년단 꼬마들과 총명한 소녀 크리스틴(아너 니프시)을 플로렌스에게 소개해줍니다. 책방 도우미로 고용된 크리스틴은 자기는 책을 안 읽는다고 미리 선을 그었죠. 플로렌스의 책방 사업은 무엇보다 마을의 권력자 가맛 장군 부부의 심기를 건드렸어요. 가맛 부인 바이올렛(패트리샤 클락슨)이 서점 자리에 문화센터를 열고 싶어 했거든요. 바이올렛은 플로렌스를 파티에 초대해서 회유하고 마을 사람들과 플로렌스 주변 인물들을 매수해서 책방 개업을 막으려 합니다.

이런 중 ‘올드하우스 북샵’ 첫 고객이 되어준 사람은 놀랍게도 브런디쉬였어요. “부인은 엄청난 용기를 가지셨네요. 그래서 돕고 싶어요”라고 브런디쉬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용기란, 인간에게서 그나마 가장 존경할 만한 점이며 인간이 신, 동물들과 공유하는 미덕이었어요. 브런디쉬는 플로렌스 덕분에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별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사실 브런디쉬는 44년쯤 전에 이혼했고요. 가맛 장군과 함께 참전했던 군인 출신입니다. 가맛 부부 같은 이들 때문에 사람들을 혐오하게 되면서, 은둔 생활을 해왔죠. 따라서 플로렌스의 용기를 지지하고 돕는 것은 브런디쉬 자신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 싸울 용기였어요.

영화 〈북샵〉은 요컨대 전쟁 때문에 혹은 탐욕스러운 타인들 때문에 행복했던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자기 몫의 행복을 지켜내기 위해 마침내 움직이고 저항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플로렌스의 용기는 브런디쉬에게 전염되었고, 둘은 곧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었어요. 하지만 이 둘이 연대하고 뭉쳐서 가맛 부부로 대표되는 구조적인 악에 ‘합법적으로’ 승리하는 통쾌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저는 참 좋았어요. 선함이 늘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책에 쓰인 선인들의 지혜가 늘 합당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영화가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음 세대의 유산이 된 용기, 그리고 ‘살아남은’ 두 권의 책

하지만 그뿐이 아닙니다. 로맨스 서사로서는 당황스럽게도 브런디쉬와 플로렌스의 관계가 다급하게 종결되고 그들의 용기가 좌절되는가 싶지만, 자녀가 없는 플로렌스의 용기와 책에 대한 열정을 크리스틴이 물려받습니다. 플로렌스는 책을 싫어한다는 크리스틴에게 이것만은 꼭 읽어보라며 리처드 휴스(1900-1976)의 《자메이카의 열풍》(1929)을 권했고요. 크리스틴은 플로렌스에게 중국 칠기 쟁반을 유산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하죠. 크리스틴은 후에 자신이 쟁반과 함께 물려받은 것이 플로렌스의 용기였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이로 자라게 될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 레이븐의 배에 오른 플로렌스 시야에 멀리 화염과 크리스틴, 그리고 그 아이가 불 속에서 꺼내와 품에 안고 있던 《자메이카의 열풍》이 들어왔을 때, 플로렌스는 그것을 예감했겠지요.

〈북샵〉은 1978년 피넬로피 피츠제럴드가 펴낸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책방이 소재인 만큼 여러 책이 언급되는데 제가 가장 눈여겨본 작품은 두 권의 책, 《화씨 451》과 《자메이카의 열풍》입니다. 플로렌스는 크리스틴에게 “착한 해적과 못된 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자메이카의 열풍》을 소개했어요. 1929년 출간된 이 책에서 리처드 휴스는 아이들의 순수와 동심이라는 환상을 무참하게 깨뜨립니다.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가 해적선에 나포되면서 배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해적들과 함께 항해하면서 겪는 이야기인데요. 여기서 주인공인 에밀리와 아이들은 때 묻지 않아서 오히려 동물에 가까운 본능으로 놀라운 적응력과 사악함을 보여줍니다. 무리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진 형제와 떠나온 부모까지도 재빨리 잊고 권력자에게 애착을 보이며, 아이들은 어느덧 문자 그대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인간이 되어있었죠.

영화 〈북샵〉에서 유명한 BBC 진행자 마일로 노스(제임스 랜스)는 가맛 편에 서서 플로렌스와의 우정을 배신하고, 가맛 부인은 의원인 조카를 움직여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작은 책방을 빼앗으려 합니다.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플로렌스에게서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틴은 플로렌스에게 “당신은 너무 착해요”라고 말했어요. 그다지 착하고 싶지 않았던 어린 크리스틴은 마치 해적선의 아이들처럼, 세간에 충격을 남기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양쪽에 동시에 기름을 붓지만 않으면” 안전하다고 플로렌스가 가르쳐준 바로 그 등유 난로를 사용해서 말이지요.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의 SF 고전 《화씨 451》(1953)은 적당한 책을 권해달라는 브런디쉬의 첫 전갈을 받고 플로렌스가 보낸 책 세 권 중 하나입니다. 화씨 451도(섭씨 233도)는 책이 불탈 때의 온도라고 하죠. 가까운 미래,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각성하게 하는 책이 금지된 시대에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하는 방화수 ‘가이 몬태그’가 ‘클라리세 매클런’이라는 17세 소녀를 만납니다. 책과 사유가 지닌 힘과 세계의 모순을 알고 있는 아이였지요. 결국 몬태그는 태워야 할 책을 한두 권씩 빼돌려 숨기기 시작해요.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크리스틴의 등유 난로처럼, 영화에서 불의 이미지는 꽤 중요한 복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브런디쉬도 책 표지를 찢어 불태우는 모습으로 영화에 처음 등장했어요. 브런디쉬는 책을 좋아했지만 인간은 싫어해서, 작가 얼굴이 표지를 장식하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지요. 제인 오스틴과 찰스 디킨스, 오스카 와일드의 얼굴이 그렇게 불 속에서 일그러져 갑니다. 방화수가 등장하는 브래드버리의 책은 단번에 브런디쉬의 마음을 사로잡고 플로렌스와 브런디쉬를 긴밀하게 이어주었어요. 책 표지를 불태우던 ‘방화수’ 브런디쉬에게 플로렌스는 클라리세와 같은 존재였겠지요. 냉소와 무기력을 딛고 일어서서 세상을 향해 다시 질문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신할 수 있도록 하는 선한 자극 말입니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 잿더미가 아닌 불꽃을 보는 일

영화 〈북샵〉은 제게 용기가 필요할 때 생각나는 영화로 오래 남을 예정입니다. 지난 4년의 모기영 상영작 중 다시 꺼내보고 싶은 작품으로 이 시점에 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5회째를 맞는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2023. 11. 16-19)를 준비하며, 이 일은 마치 모두가 생업으로 바쁜 바닷가 작은 마을에 책방을 여는 일만큼 매번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플로렌스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고 브런디쉬에게 책을 보내며 자문을 구하는 장면에 크게 공감이 됐어요. 이 작은 책방에 어떤 책을 들여놓을까, 이런 책을 여기서 팔아도 될까, 이 책은 과연 ‘좋은’ 책일까 묻고 또 묻는 플로렌스의 마음이 꼭 영화제를 준비하는 저와 모기영의 마음처럼 읽혔거든요. 한편으로는 만약 정말 그렇다면, 플로렌스의 용기에는 전염력이 있었으므로, 도심의 한 극장에서 이 작은 일을 시작한 우리의 용기도 누군가를 오랜 은둔 생활과 고립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오게 하고,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믿게 하고, 불을 피우게 하고, 폭력과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며 싸우게 하고, 원칙과 정도를 지키게 하고, 삶으로 ‘책’을 살아낼 뿐 아니라 생생하게 증언을 남기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이 아니었다. 따뜻한 불이었다 … 불빛이 이렇게도 보일 수 있다니. 태워버리는 기능 외에 이렇게 따뜻함을 주는 기능도 갖고 있다니. 그런 생각은 평생 해 보지 못했다. 냄새조차 다르다. (《화씨 451》, 황금가지, 224쪽)

잔인한 로봇 개의 추적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방화수 몬태그가 숲의 ‘남은 자들’을 만나기 직전 그들이 피운 불빛을 발견했을 때 한 말입니다. 책의 가치를 알고 신념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것을 몬태그는 비로소 알게 되죠. 그들은 금지된 책을 통째로 암기하여, 태워버린 책 대신 그들 자신이 책이 된 사람들이었어요.

“서점에서는 누구도 외롭지 않다”고 플로렌스가 말했다지요.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생각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소멸과 파멸이 아닌 따스한 빛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냄새조차 다른”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면, 환멸 가득한 이 험한 세상도 조금은 살 만해지지 않을까요. 모기영은 그래서 용기가 시작되고 전염되어 마침내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전달되는 작은 공간, 플로렌스의 ‘동네 책방’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최은
영화평론가. 모기영에서 부집행위원장과 수석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다. 나의 쓸모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그래도 세상 어느 구석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자주 줄타기를 한다. 지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 무비 클럽》, 함께 지은 책으로 《퇴근길 인문학 수업 - 멈춤》,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1》, 《영화와 사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