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그리는 시간에 초대합니다”

[392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 2023 성서한국 대회 주강사 3인 배덕만·전성민·정희원

2023-06-30     송지훈
ⓒ복음과상황 정민호

이번 성서한국 대회에는 3명의 주강사님이 계십니다. 첫째 날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이신 배덕만 교수님, 둘째 날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이신 전성민 교수님, 셋째 날은 죠이선교회 부대표이신 정희원 간사님께서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대회를 기획할 때부터 들었던 고민이 있었는데요. 바로 세 번의 전체 집회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길 바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데요. 이번 성서한국 대회 주강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걱정은 완전히 버릴 수 있었습니다. 각자 명확한 메시지를 품으시면서도 대회 참가자들에 대한 같은 마음으로 조화를 이루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 대회를 더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6월 13일 화요일 ‘준비된 영상팀, 스탠바이’ 스튜디오에서 진행했습니다. (본 인터뷰는 유튜브 채널 ‘오늘의 신학공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4년 만에 열리는 성서한국 대회인데요. 주강사 요청받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어떤 마음으로 수락해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배덕만(이하 덕만): ‘왜 또 나를?’ 하긴 했어요. 성서한국 대회를 처음 만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고, 이미 주강사로도 한 번 섬겼기 때문에 이번에는 거절하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또 전화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직은 제가 필요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 결국 이렇게 또 코가 뀄습니다.

전성민(이하 성민): 저는 올해 1년 동안 한국에 연구년으로 나와 있거든요. 연구년으로 지내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밀렸던 글 쓰고 읽고 싶었던 책들 읽는 것이었고요. 동시에 혹시 집회나 설교, 강의로 연락해주시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했습니다.

정희원(이하 희원): 저는 배덕만 교수님과 정반대였어요. 처음으로 이런 전화를 받았는데요. 전화 받자마자 ‘왜 저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혹시 저 말고 다른 후보님이 계세요?”라고 여쭤보니까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없는데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 뭐지? 성서한국의 주제나 모토가 모험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에게 모험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도 믿음으로 응답하는 게 옳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성서한국 대회는 7월 27일(목)부터 29일(토)까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내일을 그리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이번 성서한국 대회의 주제는 ‘내일을 그리는 시간’입니다. 3일간의 전체 집회가 진행되고 각자 하루씩 메시지를 전해주실 텐데요. 이 대회의 전체 집회가 첫째 날부터 둘째 날을 거쳐 셋째 날까지 ‘어제-오늘-미래’순으로 일종의 서사가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는데요. ‘어제-오늘-미래’의 서사에 ‘교회-세상-삶’이라는 주제를 대입하였습니다. 인터뷰도 ‘교회, 세상, 삶’이라는 키워드를 품고 진행했습니다.

#1. 어제 - 교회

-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한국교회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소극적인 자세로 사회적인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고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 시기도 거치면서 예배에 대한 논쟁도 많았습니다. 이 기간 가장 실감하셨던 문제는 어떤 것이었나요?

덕만: 팬데믹이 터지고 가장 큰 타격은 일단 학교와 교회가 닫힌 것이었죠. 교회에 성도들이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유지하고 청중 없이 카메라만 보고 설교를 2년 가까이 해야 했던 일 자체가 매우 낯설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희원: 저도 비슷한데요. 저희는 학생단체니까 캠퍼스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는 게 생명인데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재학생들도 모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저 같은 간사들은 학교 입장에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학교를 출입할 때 굉장히 삼엄하게 단속당해서 더 어려웠습니다. 평소에는 강의실이나 인근 교회를 빌려서 모임을 하곤 했는데, 팬데믹 때는 그런 공간 대여가 다 막혀서 모임을 여는 게 정말 어려웠죠. 그런데 젊은 간사들이 또 빠르게 적응하더라고요. 두 명씩만 모여라, 세 명씩만 모여라 이런 식으로 규제가 세부적으로 계속 바뀌었잖아요. 그에 맞춰서 학생들 집 앞에 찾아가 카페에서 만나기도 했고요. 온라인(줌)에서 어떻게 게임을 하면서 친해질 수 있나 이런 거 연구하면서 잘 버텼던 것 같아요.

성민: 저는 일단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가 해외에 있으니까 학교로 학생분들이 오시는 게 중요한 일인데 해외 이동이 힘들어지다 보니 우리 학교로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이 굉장히 줄었어요. 대면 수업을 못 하는 부분들도 당연히 어려웠고요. 신앙, 정서적으로 괴로웠던 일들은 그 기간에 한국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너무 잘 드러난 것 같아서요. 한국교회의 민낯을 보는 게 좀 괴로웠던 시간이었어요. 사회의 필요와 이웃을 섬기는 데 민감하게 반응한 교회들도 있었지만 일부 교회는 교회 바깥에 있는 분들이 보기에 너무 이기적인 모습이어서 갑갑하고 속상했습니다.

- 팬데믹이 끝난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고민하고 씨름했던 문제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결을 위한 별다른 노력 없이 그냥 엔데믹과 함께 쓸려간 느낌이랄까요? 엔데믹으로 이번 여름에 집회, 수련회, 행사들이 개신교에 일어나고 있는데요. 이 시점에 오히려 우리의 반성과 성찰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세 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덕만: 전성민 교수님께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사회적 거리두기의 규칙에 반해서 예배를 강행하다가 집단감염의 원천이 되어버렸던 일부 교회들도 있어서 많은 지탄을 받았었죠. 그런데 사실은 대다수 교회는 적극적으로 정부 지침에 따랐거든요. 적지 않은 교회들이 코로나 때 상당히 현명하고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를 야기했던 교회들은 아마도 똑같은 상황이 다시 와도, 또 똑같이 고집을 피울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공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선한 사마리아인들처럼 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교회가 자기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다 보니까 어려운 이웃들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거든요. 우리 문제에 급급해서 이런 기회를 놓친 것은 앞으로도 깊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민: 최근에 이런 표현을 들었습니다. 혼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만이 함께 모여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함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만이 혼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요. 하나님과의 참 만남과 경험에 대한 본질을 성찰할 기회였는데 이것을 저희가 그냥 묻어버린 것 같아요. 또 하나는 팬데믹 기간에 신앙생활이 굉장히 민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래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강대상에 설교자나 사회자가 혼자 서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앞쪽만 쳐다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줌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줌에서는 모두가 N분의 1만큼의 화면만 차지하는 거예요. 교회가 한 사람만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나머지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분량만큼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였던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요즘 성도들이 대면 예배로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대한 걱정들이 많잖아요. 한편으로는 팬데믹을 통해 본질적인 고민이 늘고 다른 예배에 온라인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자기 신앙의 경험이 더 넓고 깊어진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지점이 있긴 한데요. 이분들을 통해 단순히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직 혹은 틀로서의 교회가 담아내지 못하는 더 깊고 넓은 신앙들이 한국교회의 실제 모습이기도 하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희원: 코로나 기간에 저희끼리 제일 많이 했던 이야기가 코로나는 언젠간 끝날 텐데, 끝난다면 리턴(return)하면 안 되고 리셋(reset)되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다짐을 했지만 정작 코로나가 끝나게 되니까 빠른 속도로 리턴하는 느낌이 들어요. 코로나19도 결국 환경과 생태 문제라는 것, 이제 우리가 알게 되었잖아요. 마스크를 매일 쓰면서 나오는 의료용 폐기물, 일회용 쓰레기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는 사실을 더 실감하게 되었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데 정작 우리가 모일 수 있게 되니까 그런 고민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아요.

배덕만 교수. ⓒ복음과상황 정민호

- 마지막 질문은 해당 주제를 가지고 메시지를 해주실 강사님께 단독으로 드리겠습니다. 배덕만 교수님께 질문드리자면요.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도 어딘가에는 꼭 믿음의 사람과 교회,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항상 이어져 왔습니다. 오늘과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대회 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세요?

덕만: 교회사를 공부하면 계속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사를 통해 본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은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었어요. 이런 팬데믹 정도가 아니라 6·25 전쟁이 터져서 사람들이 다 교회를 떠나고 집을 떠나야 할 때도 있었고, 일본 천황 앞에 다 절해야 했던 시절도 겪었죠. 십자군에 동원돼서 끌려가거나, 로마제국에 의해서 조직적인 박해를 받거나 하는 일들이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사실은 교회사 안에서 적지 않았어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한 번도 팔자 좋게 예수를 믿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실 한국 개신교는 해방 이후에 가장 평온한 전쟁 없는 시기, 그러니까 가장 평온했던 시기를 60년 정도 지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이념의 갈등이나 정부의 탄압,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 천재지변으로 인해 교회 전체의 어떤 존재론적인 위기가 생긴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초대교회 테르툴리아누스의 이야기처럼 교회는 순교자들 피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었던 시대에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초대교회 정신을 어떻게든 그 시대에 유지하려 했던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분들을 통해 신앙의 순도가 다음 세대로 계속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대회 때 그런 경우들을 좀 살펴보고 그런 고난의 시절을 견뎌냈던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와 교회의 바통을 이어갔는지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답도 어떤 예외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신앙의 본류에 서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나님 나라의 물줄기에 내가 올라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2. 오늘 - 세상

- 복음주의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세계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도 그랬지만 사실 ‘복음주의’라는 단어도 갈수록 더 규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의미도 못지않게 더 규정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같은 단어를 말하는데 개념과 맥락이 전혀 다르게 사용되는 느낌이 드는 거죠. 예전에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생각과 지금 드는 생각에 차이가 날 것 같은데요. 세 분께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시나요?

희원: 예전에 세계관은 일종의 안경 같은 거라고 많이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 자체가 세상을 어떤 틀로 선명하고 명쾌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요즘 이강일 소장님께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에 대해 배우면서 여러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사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도 나온 지 벌써 30년 정도 됐기 때문에 좀 식상할 수는 있으나 이제야 그 영향권 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VUCA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V는 변동성(volatility), U는 불확실성(uncertainty), C는 복잡성(complexity), A는 모호함(ambiguity). 이렇게 표현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이런 세상에 필요한 세계관 혹은, 저는 태도라고도 여기는데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뭘까 할 때, 좀 헐렁함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틈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서요. 여백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잘 주목되는 그런 세상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그 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덕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나 복음주의 운동이 깊이 연관이 있는데요. 서구에서 세계관 개념이 신칼빈주의의 영향 속에서 출발할 때 사회적, 국가적 세팅이 일종의 크리스텐덤 체제에서 여전히 유지되는, 다시 말하면 기독교 전통이 사회 보편적 정서로 남아있던 때의 이야기예요.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와 국가 안에서 어떻게 책임적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거든요. 이게 우리나라에도 소개되고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볼 때는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한국 사회가 이미 준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승만 정권 이후 교회와 국가가 유착된 상태로 왔고, 사회적 특혜도 상당히 많이 받았어요. 특히 서울 중심권의 대형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은 한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서로 관계가 굉장히 깊었고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적인 공부나 활동이 가능했다고 보여요. 그런데 저는 21세기, 특히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빠르게 쇠퇴하고 있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이 굉장히 비판적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한국 개신교가 예전에 가졌던 특권 의식을 갖기 어려울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 같아요.

성민: 저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계속 붙잡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표현으로 그 문제의식을 담아내야 하는지 고민이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이 3개 단어의 조합이잖아요. 하나하나가 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단어이기도 하거든요. ‘관’이라는 말부터 생각하면 결국은 이를 통해 내가 어떤 인식을 갖겠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신앙이 지적인 이해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신앙을 지적인 영역에만 제한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세계’라는 말 자체도 마치 세계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 전지적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주는 개념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내가 전체를 통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게다가 거기에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으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권위까지 주장하기 쉽죠. 그랬을 때 기독교 세계관에 아주 곤란한 적용점이 생깁니다. 너무 대결적인 태도로 치닫는 경우가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은 대결이 아닌 대화의 담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대결을 조장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겸손한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세계관 추구가 절실합니다.

전성민 교수. ⓒ복음과상황 정민호

- 전성민 교수님께 질문드립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세계관적 성경읽기》의 마지막 장은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입니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는 세계관에 대한 책을 또 쓸 수 있다면 위 주장에 대해 더 상세히 풀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성서한국 대회야말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성민: 성경에서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일까요? 제가 찾은 본문은 산상수훈 중에서도 팔복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가 가장 크게 다가왔는데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저는 이 세 가지가 나름대로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평화를 만드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평화를 만든다는 표현은 골로새서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나오거든요. 그 단어가 성경에 딱 두 번만 나오는데 그중 한 군데가 팔복입니다. 팔복은 평화와 정의가 함께 언급되는 본문이죠. 평화와 정의는 보편적인 가치인 동시에 어려움과 핍박을 받게 만드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팔복 메시지를 주목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대회 때 함께 풀어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3. 내일 - 삶

- 저는 선교단체 간사와 성서한국 실무자로 약 17년 정도를 살아왔는데요. 예전에는 선명하고 적용과 대안,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활동가/실무자로 살고 있음에도 더 이상 큰 담론이나 추상적인 가치, 명제, 당위가 저를 역동시키진 않는 것 같습니다. 세 분께서는 오늘을 넘어 내일을 꿈꾸게 하는 각자의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희원: 예전에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배울 때 목사님이 ‘현재에 머무르는 연습’을 강조하셨거든요. 애써서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과 생각은 어느 순간에 과거에 가있거나 미래로 날아가 버린다고요. 그런 마음과 생각을 붙잡아서 ‘지금, 여기’를 살라고 가르치셨는데, 그것이 제 동력이 될 거라고 믿어요. 결국 내일은 그런 오늘들이 쌓인 ‘또 다른 오늘’이니까요.

성민: 저는 제가 ENTP인 것이 동력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그냥 뭐라도 하고 사는 것이 제 성격인 것 같거든요. 편한 대답은 이렇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제가 일하는 학교의 모토를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한국 기독교의 미래’.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왜 고민하고 만들고 싶어 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는데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과 그분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 교회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 한국 사회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바꿔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서 오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덕만: 요즘 드디어 제가 신학교 선생에서 목사로 정체성이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갖는데요. 팬데믹이 끝나고 다시 성도들이 교회로 돌아올 때 가장 크게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고 먼 거리를 오시는 일 자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교회를 끌고 왔던 영적 훈련 자체였구나, 교회에 오는 것도 일종의 영적 근육을 유지해주는 훈련이고 수행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다시 이 영적 근력을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아요. 좀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기존에 우리가 해오던 교회의 루틴을 최대한 성실하게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모임을 충실하게 하고, 목사들은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심방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그래서 저도 요즘 이 루틴을 잘 지키려고 매우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민: 운동을 하려면 기초 체력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기초 체력을 키우자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기초 체력만 잘 쌓으면 필요한 기술은 언제라도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이번에 팬데믹 상황이 벌어지면서 기초 체력 이상으로 구체적인 종목에서 발휘해야 하는 특정한 기술들도 필요한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온라인이나 다양한 방식들의 교회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구체적 기술의 연마도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요?

덕만: 그런 부분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교회 중에 어떤 교회는 기존 교인 중 10%만 돌아온 교회도 있다고 하고요. 어떤 교회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몇 퍼센트가 되었든 지금 교회에 등록되어 있지만 현장에 오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분들과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저도 그분들과 함께 가기 위한 방법과 기술을 고민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그분들도 최대한 현장에서 함께하면서 근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성민: 그 지점에서 약간 고민이 되는 게 있는데요. 자칫 대면 예배에 돌아오지 않는 분들이 교만해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식의 프레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유를 잘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초 체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기존에 있는 교회의 틀이 그 고민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팬데믹의 시간을 통해 확인하게 된 거죠. 그래서 기초 체력을 키우는 것의 강조가 어떻게 보면 너무 교회/목회 중심적인 결론은 아닌가 하는 질문도 생깁니다.

덕만: 저는 여기에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기존 교회가 그분들을 돌아올 수 없게끔 만드는 내부 요인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렇다면 교회가 바뀌거나 아니면 이분들이 다른 교회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은 다른 방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은 일종의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피난했다가 돌아왔고,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고요. 전성민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인 것 같아요. 그것이 지금 이번에 이 대회를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저는 교회 바깥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존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다기보다 그분들에 의해서 새로운 기독교 문화와 사역의 장, 혹은 그분들만의 교회 같은 새로운 발생도 일어날 가능성이 꽤 높다고 봐요. 저는 다만 기존 교회의 목회자로서 교회를 떠난 분들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교회로 만들고 성장시키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희원 간사. ⓒ복음과상황 정민호

- 정희원 간사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예전에는 수련회의 마지막 날은 ‘헌신’ ‘결단’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자리에서 어떻게든 한 번은 일어나게 하거나 뭔가를 작정하게 만드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청년들의 일상에 가장 가까운 사역자는 선교단체 간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교단체 간사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있다고 믿는 편인데요. 그래서 정희원 간사님께서 마지막 날 전체 집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실지 더 기대됩니다.

희원: 정말 똥줄 타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저 같은 소위 ‘듣보잡’(저는 이 단어를 좋은 뜻으로 사용합니다)을 섭외하신 성서한국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가 거의 매일 성서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거든요. 이는 비단 성서한국만이 아닙니다. 저를 믿고 자리를 내어주시는 모든 자리마다 같은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은 대중을 만족시키는 설교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 딱 한 사람을 위한 메시지거든요. 그런 한 사람 때문에 저를 부르신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이번에도 그 ‘한 사람’을 위한 메시지를 잘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질문, 이번 성서한국 대회에 대한 기대와 초청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덕만: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성서한국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선물을 드릴 수 있을지, 또 여러분들이 품고 오는 기대와 고민에 어떤 답을 희망차게 드릴 수 있을지가 솔직히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저도 정희원 간사님처럼 똥줄 타게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좋은 말씀을 주시고 지혜롭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같은 고민과 아픔으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 시간을 위해서 같이 부담과 책임을 안고 기도하면서 함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성민: 두 분 말씀을 들으니까 저는 지금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웃음) 그런데 부담을 좀 벗어보자면요. 성서한국 대회는 저희 세 사람의 설교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설령 저희가 설교를 망친다 해도 다른 순서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참여하시는 분들의 존재가 대회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있을 땐 나만 이런가 싶어 고민할 수밖에 없지만, 성서한국 대회에 오시면 여러분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진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얻으실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외로워 마시고 성서한국 대회에 오셔서 많은 동료,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을 만나는 좋은 기회를 꼭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원: 부끄럽고 죄송하게도, 제가 성서한국에 참여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난생처음 성서한국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거든요. 그 가운데 제 마음에 제일 와닿았던 설명이 있었습니다. “성서한국은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결사체 운동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이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이 ‘평범함’이거든요. 그리고 성서한국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함께하시면 좋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는 그런 자리이니 부담 없이 함께하면서 ‘딱 한 걸음만 더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