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의 상흔을 기억하라

[393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

2023-07-31     장다나

훌륭한 영화를 만나다

모기영에는 세 명의 프로그래머가 있습니다. 일명 ‘삼프로’라고 부르는데요. 저희 역할은 상영작을 선정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입니다. 평소 삼프로들은 기관의 연구원으로, 타 영화제 전문위원으로, 인기 절정 일타강사(!)로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며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영화를 찾아봅니다. 그러다 상영작으로 적절해 보이는 작품을 만나면 대화창에 정보를 공유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삼프로의 영화적 취향과 관람 포인트는 놀라울 정도로 제각각입니다. 이 말인즉슨, 까다로운 셋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는 영화여야만 비로소 모기영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겠죠. 깊은 토론의 과정을 거쳐 스크린에 올라가는 작품들이 삼프로의 다양한 시선과 서로 다른 애정의 결 위에 놓인 영화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곤고합니다. 영화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각자의 세계 안에서 공감하기 힘든 지점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왜 이 영화를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감정이 상해버리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점점 영화제가 가까워질수록 쉽게 합일되는 영화가 나와주길 기도하며 회의에 참여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런 기억을 더듬어볼 때, 오늘 소개할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피닉스〉는 초광속 프리패스로 선정된 몇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한 방에 타오르듯 결정되었지요. 생각난 김에 뒤적인 그날의 대화창 회의 기록입니다.

최은: 그나저나 피닉스 진짜 엄청나요! 페촐트 영화는 피닉스가 최고봉인 듯.
박일아: 피닉스 정말 좋네요. 극장에서 보면 여운이 엄청날 것 같아요.
장다나: 이 영화 뭐죠? 피닉스 짱!

이후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습니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영화 속으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작품들은 독일 근현대사가 가진 비극을 주요 화두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습니다. 서독에 있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동독에서 탈출하려는 의사 이야기 〈바바라〉, 나치 체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죽은 작가의 이름을 갈취한 독일인 이야기 〈트랜짓〉,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을 신화에 빗대 풀어가는 〈운디네〉에 이르기까지 망각과 기억, 복원 같은 근접 주제들을 엮어내면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책무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피닉스〉 역시 전쟁과 생존자라는 소재를 가감 없이 전면에 배치하고 있어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넬리(니나 호스)는 친구 르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심하게 다쳐 일그러진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말이죠. 그렇습니다. 넬리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입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필드)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폐허가 된 회색 도시, 그날의 참담함을 입은 이곳 어느 술집에서 넬리는 서빙하고 있는 조니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넬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데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조니가 눈앞에 있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넬리는 얼굴을 재건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이전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본인조차 어색하게 느껴지는 낯선 얼굴을 갖게 되었죠. 이런 넬리의 처지를 모르는 조니는 그녀에게 자기 아내 ‘넬리’인 척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전쟁 후 가족이 모두 죽은 넬리 앞으로 거액의 유산이 남겨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남편과 다시는 헤어지기 싫었던 넬리는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하 사진: 〈피닉스〉 스틸컷

잊음을 선택하는 이들, 존재를 증명하는 자

복원 수술 전, 넬리에게 의사는 이것저것 시안을 보여주며 어떤 스타일의 얼굴을 원하냐고 물어봅니다. 이전 얼굴을 그대로 갖고 싶다고 말하는 넬리에게 그는 ‘절대 같아질 수 없고, 어쩌면 전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그럴까요? 넬리가 이전 얼굴을 갖고 싶다는 말은 미용의 관점에서 이전 모습이 더 예뻤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얼굴을 가졌던 시기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것, 즉 끔찍한 만행의 시기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남편이 넬리의 걸음걸이, 필체, 옷맵시까지 문제 삼을 때 이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예전에 사용했던 쇼핑 내역조차 소중히 여겼던 넬리의 태도는 자기 흔적을 찾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날의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녀의 간절함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는 이 모든 미션을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넬리가 넬리를 따라 하는 거니까요.

이쯤 되면, 즉 이렇게나 넬리를 똑같이 재현한다면, 한 번쯤은 아내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해볼 만도 한데 여전히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기억 속 넬리와 똑같이 화장하면 그 화장법이 아니라며 오히려 역정을 냅니다. 그에게 넬리는 이미 수용소에서 사라진 존재임과 동시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이제는 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인 걸까요? 아니면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부재(不在)와 부인(否認)의 시선 속에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넬리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넬리는 조니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요.

내 상흔을 바라보라

조니는 과거 그녀와 함께 지낸 이웃들을 만나기로 하고 넬리에게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연기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넬리를 인정하지 않는 조니와 다시 만난 이웃들과의 대화 속에서 넬리는 어느 순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녀가 겪은 끔찍한 비극에 가담하거나 모르는 척했던 이들에게 아우슈비츠 이전 넬리의 상처 없는 매끈한 얼굴은 오히려 면죄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넬리가 얼굴을 되찾고 싶었던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이죠.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이 끌려가는 모습을 봤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이 화려한 옷을 입어요. 그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당신이 돌아온 게 너무 기뻐서 저렇게 예쁘게 입고 왔구나’라고 말할 거예요.” “화상 입은 모습은 사람들이 피하기만 할 뿐이에요. 그들은 넬리를 원하지, 누추한 생존자를 원하지 않아요.”

결국 넬리는 행복했던 시절 조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를 다시금 친구들 앞에서 부르며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립니다. 끔찍한 상처 입은 몸은 넬리가 아니라고, 혹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또는 눈앞에 서있는 그녀를 또렷이 보면서도 넬리는 없다고 외면하는 일들 앞에서 자기 팔에 새겨진 아우슈비츠 수용자 번호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게나 지우고 싶었던 낙인임에도 이것을 드러내야 그녀가 이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겠죠.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넬리는 뒤늦게 깨달은 조니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뒤로하고, 하얀빛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과거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넬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신 지금 우리 눈앞에 서있는 넬리는 잊지 못할 역사의 비극을 몸에 새긴 채 다시 태어난 불사조 ‘피닉스’입니다. 5백 년마다 한 번 스스로 불을 피워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부활한다는 전설의 존재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비극의 시간을 경험한 이들에게 잊어버리라, 혹은 ‘그런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던 이들은 과연 극한의 고통을 통과한 이들이 상흔을 안고 찾아올 때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고 애써 부정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진 않을까요. 그때는 넬리처럼 꽁꽁 묶어둔 붕대를 풀고 회색빛 잿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상처 가득한 그 얼굴들이 말할 겁니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내가 그곳에서 뭘 봤는지. 또, 뭘 겪었는지.”

장다나
영화칼럼니스트.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프로그래머.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영화가 스스로 부여한 생명력을 믿게 되었다.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서울국제노인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며 세상 온갖 영화를 다 보는 잡식영화인이지만 실상은 만년 고양이 집사. 17년 묵은 냥님을 위한 초강력 마타타비 기증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