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바디 프로필, 굿즈의 종교성
[393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디지털 기술 발달과 3년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분명 현대인의 종교성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신교의 경우, ‘일요일 아침 오전 11시에 모여 드리는 공예배’의 시공간적 정의가 느슨해졌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그것이 가진 상징적 중요성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천 년 이상 역사 속에서 ‘지켜진’ 종교적 의례가 10여 년 세월 동안 발전한 기술, 그리고 단 3년 동안 비대면 사회가 지속된 일로 변화를 맞았다는 사실은 새 시대의 도래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설득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근거가 되었다. 일부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디지털 시대’ ‘가상현실의 시대’ ‘AI의 시대’ 등 모든 게 전자 기호화되는 시대가 임박했다고 주장하며, 그 시대의 신앙을 미리부터 준비하려는 착실함을 보인다.
하지만 ‘~의 시대’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확신에는 늘 묘한 꼬임으로 응수하게 된다. 특히 신을 섬기는 종교계에서 인간의 예측에 확신을 더하는 (혹은 표현을 만들고 예측을 추가하는) 그런 표현법이 못내 불편하다. 과연, 우리의 종교성은 디지털화되고 있는가? 아니 디지털화돼가는 시대에 발맞춰 발전하고 있는가? 코로나 시기에 이야기하던 온라인 교회, 메타버스 등은 대부분 버즈워드(buzz word)로 사라져버렸고, 대면 중심 신앙 활동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디지털 시대의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위기 상황을 모면하고자 도입한 디지털 기술을 잠시 사용했을 뿐, 그것이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만들어냈는가? 과연 새로운 신앙에 대한 성찰은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메우고 있어서인지,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는 사회 흐름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진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아날로그. 물건, 유기성 등 공통점을 가진 문화 현상들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살펴볼수록 그것들이 그저 유희를 위한 문화가 아닐뿐더러 일종의 종교성을 투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게 전기신호와 이미지로 바뀔 것만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는) 요즈음, 이러한 문화의 유행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곳은 여전히 우리의 종교성이 머무는 자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중 몇몇을 살펴보려 한다.
갓생(god+生): 일상의 종교성
직장인 A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명상을 하며 몸과 정신을 가다듬는다. 가능하면 남들보다 조금 먼저 집을 나서서 출근 전까지 회사 앞 카페에서 공부한다. 퇴근 후에 자격증 학원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퇴근 후에는 가능한 한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들어온다. 깊은 잠을 자기 위해 전자 기기를 멀리하고, 최대한 잠에 집중한다. 참고로 식사는 규칙적으로 챙겨 먹으며, 샐러드, 견과류, 과일 등은 매일 먹으려 노력 중이다.
아침 건강 프로그램에서 제안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물론 위 내용은 지어낸 이야기다. ‘그럼 그렇지!’ 안도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훨씬 더 다양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생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다. 실천만 할 수 있다면 매우 건강하고 유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상적인 일상, 젊은 사람들은 이를 ‘갓생’이라 부른다.
‘갓생’이라는 표현은 가장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갓’(god)과 삶을 의미하는 한자어 ‘생’(生)의 합성어로, 일정한 삶의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지키는 생산적인 삶을 뜻한다. ‘갓생’은 코로나 시기부터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은 점차 집 안에서 하루를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분량을 정해놓고 책을 읽는다거나, 일정 시간 집 안에서 운동한다거나, 직업 외 분야를 공부한다거나, 짬을 내어 명상한다거나 하는 일종의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하나씩, 둘씩 자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어내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자기 효능감을 맛보게 되었다.
코로나의 맹위가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에도 사람들은 다양한 삶의 목표들을 만들어내며 ‘갓생’ 살기에 동참하고 있다. 운동, 공부, 독서, 무지출까지…. 목표는 다양하지만, 공통 특징이 있다면 바로 규칙적이고 꾸준한 반복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리추얼’로 부르는데, (주로 종교계에서 사용하는) 지속성을 전제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디지털 미디어 발전 이후, 흥미 위주 콘텐츠가 분초 단위로 교체되는 시대가 오면서 인간의 역사에서 리추얼, 즉 특정한 행위의 반복이 갖는 의미는 매우 축소되리라는 예측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디지털 미디어가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난 젊은 사람 중에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디지털 콘텐츠를 즐기는 대신 특정 행위를 반복하며 나름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현상의 원동력일까? 젊은 사람들이 갓생 살기에 참여하는 궁극적 이유는 자기만족의 내면화다. 이전까지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원하는 것을 얻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갖춘 외면적 모습을 통해 자기만족을 누렸다. (‘욜로’ ‘플렉스’ 같은 소비주의를 바탕으로 한 외면화 중심 문화가 대표 사례다.) 하지만, 코로나와 경제 불안 등으로 소비와 소유가 위축되자 이들의 자기만족 요인은 소유에서 성취로 변화하게 되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은 분명 내면의 만족과 연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갓생’ 필수코스라 할 수 있는 ‘미라클 모닝’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와 다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명상, 독서, 요가 등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 특별한 행위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소비나 소유에서 오는 것과는 다른 만족감을 선사한다. 조금 더 자고 싶은 자신을 깨웠다는 성취감, 이전에는 없었던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했다는 성취감, 바쁘다는 핑계로 못 했던 것들을 해냈다는 성취감 등이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들어냈다는 만족감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면적 만족으로서 성취. 그것을 위한 리추얼은 피터 버거의 종교 이해와 연결점이 있다. 버거는 종교를 ‘혼돈 속의 질서’로 정의했다. 이는 그저 교리적 의미의 해석이 아니다. 종교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혼란을 차단하고, 일정한 규칙에서 의미를 찾는 내면적 성찰을 전제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갓생’의 리추얼은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에 근거한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다짐하고, 노력하고, 실천하면서 일종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행위는 경쟁력만을 올리는 자기 계발과 달리 한 인간의 삶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무엇인가를 꾸준히 지속해 반복한다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을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갓생 살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활동이자 동시에 디지털화되지 않은 의례 행위의 종교성을 상기하는 육체적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바디 프로필: 몸의 종교성
더불어 살펴보고 싶은 것은 최근 들어 한국 사회 젊은 세대가 적극적으로 보이는 ‘몸’을 향한 관심이다. 물론 몸에 대한 관심, 그중에서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향한 대중적 관심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던 문화 현상이다. 특히 한 40대 여성이 ‘몸짱’으로 미디어에 소개된 이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근육질 몸매 만들기에 도전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몸짱’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중 일부는 미디어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마치 전 국민의 ‘몸짱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전문 트레이너 수가 많지 않았고, 근력 강화 운동에 대한 이해가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올바른 운동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흔치 않았다. 또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려는 일부 사람들의 과도한 운동이나 잘못된 상식 등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결국 사람들은 서서히 ‘몸짱’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평범한 몸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듯, 평범한 몸들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의 세계적 확산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집 안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전염병 창궐로 건강에 관한 관심이 급격하게 늘어난 상황에, 활동량 감소로 인해 살이 찌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운동, 그것도 집에서 할 수 있는 ‘홈 트레이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이런 표현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었던 기간은 ‘몸 만들기’를 위한 일종의 동기와 그것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했다. 타인과 만나는 시간이 적어진 사람들은 자기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운동 정보, 특히나 영상 자료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니, 누구나 쉽게 집에서 근력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기간 가정용 운동기구 판매량이 20% 이상 올라갔다는 기사만 봐도 ‘홈 트레이닝’이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유행이 만들어졌으니 바로 ‘바프’ 열풍이다. ‘바프’는 ‘바디 프로필’의 약자로 주로 근육질 몸을 만든 후 스튜디오에서 자기 몸을 사진으로 남기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기록뿐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단련된 몸을 자랑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그들에게 사진 조작이나 인공적 시술이 아닌, 순수하게 운동으로 가꾼 몸으로 찍은 ‘바프’를 공개하는 것은 가장 솔직한 자기표현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근육을 키우기 위해 근력을 기르는 것은 그 자체로 건강한 몸을 위해 좋은 행위이니 여러모로 당사자에게 이득이 되는 유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프’의 유행이 지속될수록 역효과나 부작용에 관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극단적 식이 조절로 몸의 호르몬 체계가 망가지거나 우울증 등 정신적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 소식이 전해졌다. 단기간에 근육량을 늘리려고 약물을 사용했다가 도리어 신체적 손상을 입은 일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 선정적인 ‘바프’를 찍어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반인들의 ‘바프’를 동의 없이 사용하여 성적 대상화 및 상품화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바프’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열망 중 하나인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가꾼 몸을 자랑하려는 열망 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어떤 종교적 차원의 관심 때문은 아닐까? 사랑하는 남녀 육체의 아름다움을 추앙하는 성서의 아가서를 보라. 신적 존재나 신앙에 대한 고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이 책은 성서의 한 편으로 존재한다. 성서학자들은 전도서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인간의 지성과 정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전도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가서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 역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은 ‘태어나며 부여받은’ 유일한 내 것을 향한 존중의 표현이요, 그 자체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모든 사람의 관심이 전자 기호와 기기들로 몰릴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여전히 많은 사람의 관심이 육체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디지털 기호와 이미지로 채 매개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무엇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일 수도, 창조적 존재를 향한 경외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땀 흘리고 노력하며 자신을 깎고 만들어가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가장 진솔한 종교적 표현이 될 것이다.
굿즈: 물건에 대한 애착, 집착, 혹은 정성
마지막을 살펴보고 싶은 것은 특정 물건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다. 이는 진귀한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물욕과는 조금 다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계적 경제 악화와 한국 사회의 취업 시장 축소 등으로 이미 상당수 청년은 소유와 축적을 통한 자기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축된 경제 상황은 그들을 소극적 소비, 혹은 무지출의 지경으로 몰고 갔다. 시장에서는 여전히 뉴트로, 프로슈머 등과 같이 젊은 사람들의 소비를 촉진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트렌드가 난무하지만, 그것이 청년들의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상업적 기획에 불과하다는 점은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이미 ‘MZ세대’에 관한 글(2022년 11월·384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시장 상황과는 별개로 젊은 사람들이 지속해 소비하는 상품이 있으니, 바로 ‘굿즈’(goods)이다. ‘굿즈’란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 파생된 상품으로, 1세대 아이돌 가수들이 활동하던 1990년대 말부터 한국 대중문화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는 ‘굿즈’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슷한 의미의 표현을 찾자면, 기념품이나 소품, 혹은 캐릭터 상품 등을 들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팬덤을 상징하는 색깔의 풍선이나 우비 등을 구입하는 데서 출발한 가요계 굿즈 문화는 아이돌 가수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2010년 이후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초기의 굿즈들과 달리, 팬덤을 이용한 소비를 부추기는 상품 종류는 매우 다양해졌다. 젊은 사람들의 팬심은 포토 카드, 스티커 등과 같은 수집용 굿즈부터 머그잔, 후드티 등의 생활용 굿즈까지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이 들어간 상품들을 소유하는 것은 그들의 팬덤을 드러내는 일종의 정체성 표현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문화 업계에 속한 다양한 이익집단들은 굿즈의 상품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특정 인물뿐 아니라 브랜드, 문화 콘텐츠, 심지어 역사적 사건이나 종교 등을 활용한 굿즈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비연예인 팬덤 굿즈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시즌 한정 굿즈로 매해 여름과 겨울 일정 수량의 커피 상품을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증정하는 생활용품이다. 사람들은 스타벅스 로고가 박힌 가방이나 텀블러, 다이어리 등을 ‘받기’ 위해 증정품 가격보다 더 비싼 값의 커피를 ‘사야’ 했다. 소비경제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불합리한 거래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스타벅스 굿즈를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든 그 불합리성이야말로 굿즈 문화의 본질을 보여준다.
굿즈는 효용가치를 보고 구매하는 상품이 아니다. 김나민의 연구 〈연예인 굿즈는 소유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가?〉에 따르면, 굿즈는 실용적 가치가 아닌 쾌락적 가치를 가진 상품이다. 쾌락적 가치를 가진 상품은 실용적 상품에 비해 소비자에게 훨씬 더 큰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더불어 쾌락적 가치를 가진 상품이 제공하는 행복감은 소비자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인간이 소유하는 물건은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어떠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가, 혹은 구매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주변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물품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정체성은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궁극적으로 소유자의 행복감을 증진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굿즈를 구매한 사람은 굿즈에 프린팅된 연예인 이미지를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이 굿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특정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일종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주변 사람 사이에서 ‘그 연예인의 팬’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은 소비자에게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경험일 뿐 아니라, 특정 연예인과 조금 더 연결되었다는 행복감의 근거가 된다.
이처럼 굿즈는 쾌락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소비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차츰 범위가 넓어지면서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상품 이상의 가치를 투영하는 매개체로도 자리를 잡고 있다. 구호 기관에 일정 금액을 후원하면 받을 수 있는 팔찌나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사건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색색의 리본 등은 매우 다른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굿즈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굿즈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무엇(물건)이 무엇(메시지)을 매개(상징)하는가’에 쏠리게 되었다. 메시지가 물질성을 가진 매개를 통해 상징화되는 이 과정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디지털 이미지로 무엇이든 구현이 가능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만질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한다는 것, 그 물건에 담긴 의미에 공명한다는 것은 물질성이 인류에게 얼마큼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아무리 디지털 미디어가 발달하고, 전자 기호와 이미지를 통한 소통이 중심이 된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먹고, 자고, 배변하고, 움직이고, 만지고, 느끼는 육체를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육체가 인간의 조건에 필수적인 한 유기성을 가진 물건은 인간 사회의 중요한 매개체로 남아있게 된다. 굿즈 문화의 끊임없는 화제성은 이 부분을 분명히 한다.
더불어 생각해볼 점은 가치와 정체성을 매개하는 물건의 종교적 의미다. 이는 기존의 영과 육, 영성과 물성을 구분해온 종교적 관념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동시에 이를 극복하는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는 종교의 물질적 차원에 대한 연구와도 맥락이 닿아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물질을 관념보다 위에 두는 유물론적 비판이나 종교가 고수해온 관념론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물질계에서 구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종교를 영성과 물성의 통합적 문화 체제로 이해하려는 데 있다. 다만, 기존의 종교 연구에 있어 관념적 접근에 비해 유물론적 이해가 부족했던바, 학자들은 종교가 가진 물성, 물건, 육체, 몸짓과 행동 등을 연구하며, 그것이 종교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굿즈가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즐거움과 행복감,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관계 등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종교가 신도들에게 제공하는 성스러운 물건의 역할과 그에 반응하는 신도들의 신심이 비슷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종교성을 함부로 예측할 수 있을까
기실 국제사회에서 공인하는 고등종교의 대부분은 다양한 예식, 몸, 성물 등을 중요한 종교적 매개체로 삼아왔다. 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의 한국 개신교는 유독 물질이 가진 신성을 부정해왔다. 영성과 물성의 구분은 종교와 물건의 대립 구도로 강화되었고, 종교의 대척점에 배치된 물건은 우상이라는 오해와 함께 경계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코로나가 지속되는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했던, 예배당에 모이지 못했던 수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디지털 기기만을 통한 연결에 한계를 느꼈다. 기독교인 개개인의 공간에는 매우 빈약한 수준의 물질적 매개만이 존재했으며, 이는 디지털 영상만으로 신앙생활해야 했던 상황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 속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예배당이라는 것도 물질성을 가진 건축물이며,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물건들,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의 몸, 육성과 몸짓을 포함한 일정한 규칙성을 가진 움직임 등이 모두 한국 개신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영성과 물성의 구분을 강조해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토록 영성과 물성의 경계를 철저히 여기는 이들이 역시나 물성의 범주 안에 들어가야 할 디지털 기기와 이를 통한 소통에는 매우 관대했다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모순적인 현실의 이유는 진지한 성찰의 부재와 임기응변의 태도, 그리고 전문 연구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영성은 무엇일까? 이제는 짚고 넘어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김 집사 제주도 돌하르방 코 만지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생귄의 한마디
민민님, 과연 인간의 본성은 어떤 모양일까요? 끊임없이 균형을 추구하는 저울과 같은 모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문화가 마치 홍수처럼 모든 것을 뒤덮을 것처럼 우리 삶의 방식을 빠르게 바꿔 놓았는데요. 빠르고 편리함에 익숙해져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과거의 느리고 불편한 삶과의 경계를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데 우려와 달리 디지털 기술이 모든 것을 바꾸고 대체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 소개해준 글을 통해 오히려 몸과 물질을 그리워하고 (혹은 새로워하고) 아날로그의 삶을 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일까 싶은 거죠. 우리 안에 발견되는 반작용, 혹은 대항문화적 본성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특히 ‘갓생 살기’와 ‘굿즈’ 문화가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효능감이란 점도 흥미롭습니다. 몸과 물질을 통해 마음을 돌보고, 소비와 자랑을 통해 영혼을 채우려는 모습이 다소(?) 형용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에서도 자아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리워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