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품은 아버지 같은 분, 조요셉 목사님을 기리며
[393호 무브먼트 투게더]
※ 6월 4일 암으로 별세한 故 조요셉 목사는 ‘탈북민 선교 개척자’로, 30년 가까이 북한 선교 및 탈북민 사역에 힘써왔다.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대학원에서 정치교육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에서 활동했으며, 연구부장을 지내던 중 경찰서 소개로 북한이탈주민을 상담하게 되면서 북한 선교를 시작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탈북민 목회를 이어왔다.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 한국예수전도단 북한선교연구원, 온누리교회 탈북민 예배 공동체를 거쳐 2007년 물댄동산교회를 개척했으며 북한 선교 관련 기관들에서 사역했다. 선교통일한국협의회 상임대표였던 고인의 장례는 6월 7일 ‘통일시민장’으로 진행되었다. 향년 69세.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사랑하는 우리들의 아버지 조요셉 목사님을 보내드리며, 목사님과 함께한 지난 12년을 돌아보면서 이 글을 씁니다. 목사님 인생은 사도행전 속 바울의 고백과 같았습니다. 자기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탈북민 선교, 통일, 민족 복음화를 위해 조용히 달려 오셨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저를 포함한 많은 탈북민을 돌보셨습니다. 무엇보다 탈북민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평생을 바쳐 이끌어 주셨지요. 사명을 위해 사셨던 목사님은 중도에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는 불같은 분이셨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고요. 탈북민을 가르치기 전에 그들로부터 먼저 배우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으셨으니, 저희는 남은 열매를 이어받아 고아와 과부 같은 탈북민을 돌보며(야고보서 1:27) 계속해서 통일과 민족 복음화를 위해 믿음의 경주를 달리겠습니다.
탈북민을 품은 아버지 목사님, 먼저 마음을 열고 들으셨던 분
저는 2011년 2월 말 물댄동산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제가 처음 출석한 교회는 고등학교 시절 바다에 놀러 간대서 고모를 따라갔다가 친구들이 재미있어 잠시 다녔던 새평양순복음교회였고요. 그다음 교회는 2010년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다닌 사랑의교회 대학부로, 큰 교회에 다녀보고 싶어 출석했습니다. 신앙이 있을 때도 아니었고, 집도 김포에 있어 멀기도 했어요. 사람들과 친해질 때쯤 GBS 셀이 바뀌어, 신앙에 대한 도전과 감동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싫증을 느껴 교회를 그만 다니려 했습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형에게 물댄동산교회와 조요셉 목사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요. 조 목사님이 정치학에도 관심이 많으시니 훌륭한 멘토가 되어주실 것이고, 교회에서 장학금도 주니까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해보면 좋겠다고 제안받은 것입니다. 목사님과 처음 만난 날, 인자하고 합리적인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러 사회 이슈에 관해 날카롭게 말씀하시기도 했고, 대학 교수 같은 강의 스타일로 설교를 하셨죠. 그때는 설교에 관심이 없어, 앞에 앉아 단잠에 빠졌다가 끝날 때쯤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예배 후 식사하러 가는 일이 제 일상이었습니다.
교회에 온 후로 토요일마다 목사님과 만나 일대일 제자 양육을 받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항상 맛있는 밥을 사주신 일입니다. 북에서 온 저희를 잘 먹여야 한다며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 양육을 통해 목사님 인생에 함께하신 하나님 은혜를 들으며, 저도 이런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지요. 특히 2011년 7월 말 여름 수련회를 기억합니다. 수영장에서 세례식을 할 때 갑자기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제출된 세례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제가 뛰어들어 떼를 쓰다시피 해서 세례를 받게 되었지요.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 목양실 오른쪽에 붙어있던 12년 된 메모를 보았습니다. 제가 세례받은 날을 기록해둔 메모였죠. 솟구치는 마음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원래 정치를 하고 싶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계기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막으셨다고요. 하나님은 탈북민 사역으로 이끄셨죠. 목사님은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부장으로 일하셨던 1990년대에 처음 탈북민을 만났고, 54세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습니다. 그 시절, 교회에는 신기할 정도로 많은 탈북민 청년이 오게 되었다지요. 대다수가 가난한 학생이다 보니, 목사님이 헌금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부족한 것 없이 채워주셔서 모든 게 항상 풍족했지요.
많은 탈북민이 물댄동산교회에 연결되었고, 목사님의 손길을 거쳐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도움만 받고 조용히 연락을 끊는 등, 상처를 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탈북민인 제가 보기에도 속상한 사례가 참 많았으니까요. 그렇게 이 사역을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도 있으셨지만, 그때마다 요한복음 말씀(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눈물로 순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단한 사역의 길을 걸으셨지요.
많은 교회와 사역자는 탈북민을 그저 섬김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쌍해서 도와줘야 하고, 가르쳐줘야만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죠. 저도 가끔 그런 분들과 함께하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저희 이야기를 경청하셨습니다.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사우나도 가면서 허물없이 말 그대로 아빠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가르치기 전에 먼저 저희를 알고자 하는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에 안 나가는 날이면 꼭 연락을 주셨죠. 아프지 않은지, 무슨 일 없는지 메시지와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시곤 했습니다. 가난한 대학생 때 처음으로 용돈이 떨어져 밥을 굶을 뻔한 적도 있었고, 버스 못 타고 걸어서 집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목사님은 용돈을 보내주셨어요. 저를 포함한 많은 탈북 대학생을 품고, 저희가 공부에 지치거나 사회생활에 힘들 때마다 밥 사주시며 힘을 주셨지요. 저희가 취직해 월급을 타서 약소한 용돈을 드렸을 때는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듯 자랑하고 다니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회의 도중에 의자를 걷어차고 나왔을 때, 신앙과 삶이 바닥을 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게 손잡아 이끌어 주셨지요. 가르치는 사람이기 전에 참 부모이셨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간증을 남긴다”
목사님은 25년 공직 생활을 마치신 후, 2014년 목회에 더욱 집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동안 수많은 청년이 와서 수련회를 할 때나 잠깐 은혜를 경험할 뿐 삶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문제에 관해 고민하셨죠. 목사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완전히 주인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실천이 저희 모두의 하루 목표가 되었죠.
목사님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는 말씀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본을 보이셨어요.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암을 마주하더라도 기쁨과 감사로 순종하여 매 순간 불행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음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목사님 모습을 보며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가 조금씩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순종과 헌신을 생각하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신앙으로 자라나 ‘부활의 증인’으로서 ‘순교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끄셨죠.
목사님은 늘 농담처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간증을 남긴다”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우리 교회 특색은 설교를 듣고 말씀에 반응하는 간증문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간증문은 우리 삶을 바꿔나가도록 돕는 큰 매개체였습니다.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설교 제목조차 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간증문을 적으니 말씀도 다시 보게 되고 말씀에 반하는 언행을 하면 찔림이 올 때가 많았죠.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었습니다.
더러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일부 탈북민은 북한의 ‘생활총화’ 같다며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성도 일부는 간증문 요구를 강요와 압박으로 느끼기도 했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공감해주시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옳다고 생각하시는 일이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분이셨죠. 목사님과 부딪칠 때 힘들기도 했고,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이 사랑하시는 방식을 알기에 우리는 계속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 잃은 슬픔이 이런 걸까요. 할 일이 많이 남으셨는데, 저희는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는데, 목사님은 갑작스럽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주 전에도 설교하셨고, 일꾼(셀장) 모임에서 ‘요즘 시편 23장 말씀을 붙잡고 감사와 기쁨으로 버티고 있다’고 웃으며 말씀해 주셨는데 말이에요. 목사님의 소천을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찌할 바 몰랐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에 평강 가운데 목사님을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프신데도 최근까지 교회와 선교 통일 사역으로 바삐 달리셨지요. 잠시라도 쉬시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쉴 시간을 못 드린 것 같아 정말 송구스럽고 죄송하지만, 이제 좋은 곳에서 편히 안식하게 되셨습니다. 저희도 머지않아 달려갈 길을 마치고 목사님을 만나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육신으로는 함께 있지 않겠지만, 먼저 순종하시고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훌륭한 가르침이 저희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있으며 일부는 체화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이 그랬듯,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아와 과부 같은 처지에 놓인 이웃을 절대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7).
저희도 목사님이 걸어가셨던 통일과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길에 예수님과 함께 몸을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소망하셨던 평양 물댄동산교회, 청진 물댄동산교회를 세우는 그날을 위해 쉬지 않을 것입니다.
강성우
북한 청진에서 17년, 남한 서울에서 17년 살며 두 체제를 나란히 경험했다. 추석 됐을 때 아빠 산소에 가서 벌초할 수 있는 것, 작별 인사도 못 나눈 동무들을 다시 만나 미안하다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을 ‘통일’이라 생각한다. 통일 문제를 정치로 풀어가고 싶어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으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로 일했다. 다시 대학 기관 통일연구소에 머물면서 통일의 비전을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 선교, 민족 복음화 등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