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어워스 신학으로 본 평화

[393호 커버스토리]

2023-07-31     김희준

문경경찰서 경비주임이셨던 나의 조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문경 노루목이라는 곳에서 빨치산과 전투하던 중 전사했다. 빨치산이라고 하나, 대부분 근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단지 정치 이념이 달랐을 뿐이었지만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죽일 이유가 되었다. 부친은 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생모가 새 삶을 택하여 떠나는 바람에 홀로 자라야만 했다. 상처 가득한 인생 가운데 나 또한 그의 자녀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남긴 인간을 향한 증오와 미움의 상처를 겪으며 자라야만 했다.

다른 한편,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세상, 특히 전쟁에 대한 생각에 한계가 있다. 다행인 점은, 하우어워스주의자에게 거대담론이나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계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한계를 안다는 것은 논의를 어디서 출발해야 할지 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그 시작은 다름 아닌 말씀이 육신 되신 그리스도 예수, 평화의 왕이다.

모든 전쟁은 살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평화는 ‘전쟁’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일상 가운데 얼마나 지독하게 뿌리내렸는지, 우리는 “비만과의 전쟁” “물가와의 전쟁” “입시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자발적으로 벌인다. 전쟁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과연 어떤 평화를 알았던가? 먼저 전쟁은 실제로 겪은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막연한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총과 미사일을 쏘아가며 전쟁을 치르지만, 북한을 마주하고 70년을 살다 보니 우리에겐 일상의 일부가 되어 무관심하게 여겨질 뿐이다.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아 올려도,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분단이 지속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요즘 세대 대다수의 생각이지 않을까.

스탠리 하우어워스에게는 모든 전쟁이 살인이다. 어떤 명분이나 이유가 있다고 해도 살인이다. 그는 인간이 벌인 살인의 상처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정치인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나 활동가, 지식인도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해결할 수 있는 듯 말한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탐욕으로 일으킨 살인 행위를 해결하거나 출구를 마련할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우어워스가 지적하는 전쟁과 연관한 도덕 논리는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 관련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하우어워스는 한국 고지전 전투 중 하나인 폭찹힐 전투를 언급한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6·25 전투 중 하나이고, 전쟁 가운데 실존하는 도덕 논리(moral logic)의 모순을 잘 기술하고 있다고 말한다.1)

미군들이 폭찹힐이라고 부른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쟁 막바지 휴전 협상이 오가는 상황에서 진행된 고지전 중 하나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주둔하던 부대를 후방으로 내려보낼 수는 없었다. 언덕에서 물러나는 것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책임자들에게 어느 한쪽이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는 것이 지휘관들이 내린 판단이었다. 이들은 그것이 전쟁을 더 지연시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미군은 전략상 별 의미도 없는 언덕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철수시키지도 못한 채, 다시 고지를 탈환하고자 몰려드는 중국과 북한군에 의해 병사들이 죽음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명분은 다수 병력을 죽음 가운데 두어 고지를 지켰고, 그로써 거기서 죽어간 미군들 명예를 지켰다는 것이다. 과거의 희생을 명예롭게 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해야만 하고, 그럴수록 전쟁이나 전투에서 비롯되는 더 많은 도덕적 문제가 생긴다. 즉, 인간의 폭력으로 발생한 일들을 다룰 때 상황을 낫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나쁘게만 흘러갈 뿐이라는 지적이다.

민주주의가 신성한 정치체제라는 허상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진리는 오직 이미 그 진리 안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예배 안에서 배운다. 반복되는 예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예배가 상징의 예식이 아니라 진정한 실제임을 알게 된다. 특히 예배에서 베풀어지는 말씀과 성례전이 실제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예배하는 예수가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그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질문했을 때, 예수는 침묵했다. 진리에 거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묻는 회의주의적 태도에 대한 답은 어떤 이론이 아닌 본보기가 되는 삶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진리 안에 거했을 뿐 아니라 진리 자체였다. 그렇기에 그 삶이야말로 폭력에 몰두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인 정치적 실제가 된다.

물론 예수가 실제라는 내 말은 다분히 라인홀드 니버의 이상과 실제라는 이분법을 겨냥하고 있다. 예수와 세상은 이상과 실제가 아닌 실제와 비실제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가 참 진리이며 생명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실제라는 점을 잊을 때가 많다. 그사이 한국교회도 미국과 서구 교회가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기독교를 전해준 사람들의 실수 말이다.

교회와 국가의 차이점은 국가가 강압적 특징을 갖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강제로 교회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인이라는 운명에 처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처한 운명에서 떠나라고 부름을 받았다. 초대교회도 제국의 영토 안에 살았지만 자신을 운명적인 로마 제국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이 있음을 증명했다.

한국도 교인과 교회 수가 줄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벗어나 사회로 나가 세상 속에서 문화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환으로 기독교와 민주주의 사이에 어떤 필연적 연결고리를 확정하고, 교회보다 정치 세력으로서 변모하기를 꿈꾸며 더 큰 성장과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듯하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기독교 국가를 꿈꾸며 자신의 사명을 교회 바깥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서 좋은 민주주의 시민으로 살고 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우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우어워스는 전쟁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투표하는 사람들에게서 복종을 끌어내려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2)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을 하나님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민주주의가 신성한 정치체제라는 허상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이며, 민주주의는 단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제도 중 하나일 뿐인데도 말이다.

몇몇 기독교 학자나 목회자는 교회가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언어란 폭력의 언어다. 오늘날 세상은 어떤 것도 폭력적 언어에 포함되지 않고는 얘기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문화를 형성해버렸다. 다른 말로, 타자와의 관계는 거짓의 정치로 가득하고 사용하는 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를 솔직하게 직면할 수 없게 방해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를 자유 시장 경제로 묘사할수록, 우리는 우리를 움켜쥐고 소유하는 권력과 체제의 폭력을 알아채기 힘들어진다.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사회는 세상 법의 틀 안에서,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민주주의라는 종교는 개인의 행복과 성공, 구원을 약속하면서 이기적인 욕망을 달래준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의 종교적 유흥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언어가 폭력의 언어임을 고려할 때 교회 또한 폭력적 언어를 말하도록 이끌려갈 뿐이다.3)

하우어워스가 그렇듯, 나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속 사회로서 더 세속화하기를 바라고, 한국 기독교는 덜 한국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속화된 한국 사회는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뿌리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국가의 전형을 버리고, 종교적 믿음에 달하는 애국심 숭배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환대하는 사회를 말한다. 덜 한국적인 교회는 한국이라는 민족국가를 섬기는 역할을 자처하는 교회와 기독교를 포기하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 통제권은 국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4) 무궁한 나라와 민족의 영광이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영원무궁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뿐이다.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 시대의 사람들

교회와 세상의 차이점은 존재론적 차이가 아닌 주체성의 차이로 봐야 할 것이다. 세상을 잡고 있는 폭력은 죄의 결과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결과다. 교회의 언어는 폭력과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치와 문화의 언어와 다르다. 세상과 문화에 대한 대안적 정체성으로서 의미를 주는 언어들이며, 그것이 우리 삶을 구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국가와 같은 새로운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성경에 쓰인 내용에 동의하고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상태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새로운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넘어 새로운 인간성으로 세워졌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 처지를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인간성에 의해 새롭게 된 사람들’이라는 주장은 굉장히 오만하고 비이성적인 주장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가 우리의 평화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평화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이, 특히 에베소서 2:14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peace)이다” 얘기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대체로 평화를 우리가 애써야 함에도 좀처럼 성취하지 못하는 이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예수는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을 알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시작했으며, 그렇게 새로운 인류 자체가 평화가 되었다. “예수가 평화다”라는 말은, 그가 세운 교회가 다른 방식으로는 알 수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평화를 이 세상에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비폭력적으로 살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비폭력이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기 때문이 아니다. 비폭력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보고 세상이 크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지도 비관적이다. 다만,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인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사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다.5)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원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흩어진 선교적 사람들이 되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이 누구에게 속했는지와 더 이상 세상에서 유리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은 민족 정체성이 우선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모르거나, 여기에 관심 없는 다른 의미의 ‘우리’는 남이든 북이든 자기 안전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하려 하고, 그럴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간다. 전쟁은 그러한 인간성과 현실에 대한 결과이다. 그런 세상 속에선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이 ‘우리’의 폭력에 답하셨다. 아브라함을 그의 나라에서 불렀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자에게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한 나라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됨은 바로 이 일에 참여하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이스라엘, 그리고 적일지 모르는 우리 이웃과 하나 되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에 대한 대안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비폭력적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평화인 그의 신실한 제자로서 다른 방식, 특히 폭력과 살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예수를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평화라는 뜻이다. 대부분 이것을 판타지 소설 정도의 상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심으로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평화이기에 우리가 세상을 위한 평화다. 정전 70년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누렸어야 했을 평화는 정치적·사회적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평화여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화는 이미 왔다. 이러한 고백과 믿음은 절대 개인의 내적 성찰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공동체적이며 정치적인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화해의 실천이어야 한다

평화가 이미 왔다는 선언이 적어도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 전쟁의 상처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는 믿음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전쟁의 폭력이 남긴 상처는 시간에 의해 치유되지 않는다. 구원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탐욕에 경각심을 가지고 그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이웃이 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반드시 화해의 실천이어야 한다. 자신을 옳지 않게 대한 이웃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법적 투쟁으로 먼저 달려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선하게 대해야 하며, 종국에는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다. 평화를 유지하거나 중재하는 일은 단발성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덕목(a virtue)이기 때문이다.6) 이는 기존의 세속 정치에서 자행되는 거짓과 비밀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죄를 경히 여기기보다 죄에 맞서는 위험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러한 직면과 맞섬이 중재자(peacemaker), 즉, 화평케 하는 자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행하던 폭력을 멈추고 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마주하여 드러난 죄가 용서받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쉼의 평화가 아닌 진리의 평화이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 개인 간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부터 죄의 맞섬을 통해 죄가 주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고, 전체 공동체가 그렇게 빚어져가야만 발휘할 수 있는 덕목이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용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 되기 위한 교회의 사명이다. 중재자가 되는 일은 어떤 활동에 있지 않다. 우리의 평화인 예수의 모습만큼, 교회가 되는 것에 있다. 평화의 과정을 이렇게 공동체 내부 개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재를 통한 평화의 유지 및 창조는 덕이 아닌 하나의 정치적 전략 정도로 다루어질 게 뻔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지속적으로 실패만 해왔다. 평화를 포함한 기관의 정치적-사회적 실천은 반드시 개인을 빚어가는 일정한 성향에서 시작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와 진실을 말하며, 죄를 묵과하지 않고 맞서지만, 동시에 한없이 용서한다. 여기서 한없이 용서함은 조건 없이 용서함을 말한다. 교회의 분열은 어쩌면 이러한 용서에 조건과 단서를 붙이면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가? 진실한 평화 중재자가 되기 위한 능력은 우리 삶이 하나님의 제한 없는 용서 때문임을 배우는 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배워야만 하고, 그렇게 전체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야만 한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일은 느리며 까다롭다.

만일 화평케 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으로서 교회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라면, 우리가 세상에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첫째, 우리는 진리보다 힘과 권력 위에 세워지는 세상의 거짓 평화를 맞서고 도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를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종종 거짓 평화가 폭로될 때, 세상은 폭력적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세상 스스로가 예상하는 것보다 덜 진실될 수 없다. 진실을 가릴 수 없다. 우리가 진실되지 못하다면 세상에 제안할 평화 따위는 없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능한 평화를 경멸하지 말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는 본질상 폭력적이지 않으며 우리 기관들도 폭력을 피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평화를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평화의 습관들을 세상이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한 습관들의 부재는 폭력을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덕은 다른 의견들을 해결하는 길고 지루한 습관의 형성 위에 세워진 상상력의 실체다. 세상 속에서 평화를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불편함 때문에, 또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형제의 잘못에 겸손히 맞서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는 일정한 충돌이나 갈등을 삶 속에서 살아내지 못하기에 교회가 그렇게 자주 세상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중재하고 화평케 하는 공동체의 예가 없다면 세상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평화를 지키는 특정한 공동체라는 말이 굳이 제한적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형제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화를 증언할 여러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갖추어야 할 화평케 하는 습관들은 교회 바깥에 있는, 심지어 공동체를 위협하거나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맞설 때도 유효하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화해와 일치의 수단을 찾으라고 요구하는 적들 가운데에도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 있기 때문이다.

평화주의 또는 비폭력주의는 종종 악을 마주할 때 수동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비폭력주의가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비폭력주의자는 불의한 형제의 악에 고통당하기만 함으로써 악을 행하는 형제를 향한 책임을 다하는 데 실패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비폭력주의는 결코 수동적 대응이 아니다. 화해의 제안을 갖고 악인을 맞서 불의에 저항하는 능동적인 길이다. 그러한 화해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 반드시 큰 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악을 맞서야만 하고, 악한 형제가 인정하지 않고는 화해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화평케 하는 자가 정치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반드시 가장 정치적 인간이 되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중재란 서로 다른 의견들의 맞섬과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과 기관의 발달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문제는 타협이 아닌 진실에 대한 믿음의 부재에 있다. 그 결과, 정치에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시의적절한 수긍과 인정이 사라진 채 강압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다른 어떤 기관들보다도 정치적이 됨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중재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영웅적인 소수의 덕목이라 생각한다면 지속 불가능하다. 평화의 중재는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덕목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화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지원과 관심의 다양한 유형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마냥 도움이 올 것만 바라고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중재자, 화평케 하는 자들로 부르신 것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평화의 일부가 되는 것보다 더 기쁘고 흥미진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주

1) Stanley Hauerwas, 《War and the American Difference》(Baker Academic, 2011), 60쪽.
2) Stanley Hauerwas·Robert J. Dean, 《Minding the Web》(Cascade, 2018), 108쪽.
3) Stanley Hauerwas, 《A Better Hope》(Brazos, 2000), 127쪽.
4) 《War and the American Difference》, 10쪽.
5) 《War and the American Difference》, xii.
6) Stanley Hauerwas, 《Christian Existence Today》(Brazos, 1988), 92쪽.


김희준
(재)큐티엠 영문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 꿈의교회에서 영어예배를 담당한다. 지은 책으로는 《스탠리 하우어워스 읽기》(IVP), 《환대》(홍성사)가 있고, 현재 숭실대학교와 남서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여러 기독교 학술지 및 잡지에 기고하며 교회의 언어를 문화의 언어로 교체하려는 현대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에 반동하는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