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합적 다원주의, 평화로 가는 길

[393호 커버스토리]

2023-07-31     강혁민

※ 본지는 6·25 전쟁 정전(7.27.) 70주년을 맞아 분단된 한반도 현실을 돌아보고, 한반도 평화를 넘어 동북아시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어떤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지 논하는 커버스토리를 담아내며, 그중 두 편을 통일/평화 관련 주제로 문서 운동을 해온 잡지 두 곳(평화저널 〈플랜P〉, 〈계간 통일코리아〉)과의 제휴 콘텐츠로 꾸며 보았습니다. 이미 각 매체에 실렸던 글 중 커버스토리 주제에 맞고 잡지의 방향성을 잘 드러내는 콘텐츠를 추천받아, 전문성과 노하우를 갖춘 해당 잡지를 소개하는 글과 함께 게재합니다.

〈플랜P〉는 2020년 9월, 창간호 ‘People, 사람’을 시작으로, 2호 ‘Pause, 멈춤’ 3호 ‘Path, 길’ 4호 ‘POW(Prisoner of War)’ 5호 ‘Post 9.11’ 6호 ‘Press, 언론’ 7호 ‘Public, 공공성’ 8호 ‘Pluralism, 다원주의’ 9호 ‘Place, 장소’ 10호 ‘Poverty, 가난/빈곤’ 11호 ‘Power, 힘’ 그리고 지난 6월에 ‘polarized, 양극화된’이라는 주제로 12호를 발행했습니다.

평화의 시선과 전략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플랜P〉

평화저널 〈플랜P〉는 ‘평화’(peace)를 상징하는 알파벳 ‘P’로 시작되는 시의적 주제어를 중심으로, 1년에 네 번 평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잡지입니다. 〈플랜P〉가 창간된 지도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그동안 이 시대 주요 이슈를 평화의 시선과 전략으로 사유하고, 사회 곳곳에서 평화를 살아내는 이들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담아내려 노력해 왔습니다.

분단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에게 평화는 하나의 염원이자 이상으로서 익숙한 동시에 여전히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흔히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이해되곤 합니다. ‘힘에 의한 평화’, 즉 군사력의 우위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해왔죠. 그러나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가 평화는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인식들이 남북 간 군비경쟁을 가속하고, 한반도를 더욱 큰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스럽습니다.

올해는 정전 70주년 되는 해입니다. 종전(終戰)도 아니고 정전(停戰)이라니 새삼 우리 현실에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전쟁의 영속성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정신과 삶을 좀먹고 왜곡합니다. 이제 한반도가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 더 성숙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레드 콤플렉스’를 벗고 일상에서 무르익은 평화를 향유하며, 경직된 사고의 틀을 깨고 창의적인 발상, 더 나은 방식으로 함께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목과 분열, 대결이 아닌 조화와 연대, 공존의 삶은 평화적 사유와 삶의 양식 안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고 서로를 향해 흘러갈 것입니다.

아래는 〈플랜P〉 제8호(2022년 여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필자 강혁민 박사는 신학과 평화학을 전공한 연구자입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평화가 무엇인지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보편적 가치라 믿는 것들의 숨은 한계를 들추어내어 ‘경합적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사유로 초대합니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마주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 도전하고 경합하면서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는 평화의 공간, 그 안에서 우리는 정형화되지 않은, 도래하는 평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정전 70주년에 다다라 우리가 넘어서야 할 한계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우리 사회 전반에 켜켜이 숨겨진 경직된 본질주의적 사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미래는 새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됩니다. 이 경합의 평화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부터가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멋진 출발이 되리라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글을 추천합니다. ―〈플랜P〉 편집장 김유승

대학 시절 종교다원주의에 깊이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폴 니터의 《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이었는데, 보수적인 신앙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신앙생활을 해 온 나로서는 그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다른 이름이라니. ‘오직’이라는 수식어에 더 편안함을 느꼈던 나로서는 ‘다른’이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당혹스러움도 잠시, 나는 곧 다원주의에 깊이 침잠해갔다. ‘다원주의 나’를 향한 비판적 시선을 감내한 채 아웃사이더를 자청했다. 크게 괘념치 않았다.

내가 종교다원주의에 매력을 느낀 것은 다원성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기보다 기존 종교들의 자아도취적 경전 해석과 획일화된 신앙, 사유의 형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형적인 틀 속에서 사고가 뻗어 나가지 않자 사유의 도피처와 같았던 다원주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이다. 사유의 자유로움은 확실히 나를 더 풍성하게 했다. 다원주의는 본질성과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름’과 ‘차이’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신이라는 근본적 실체를 거부하거나 폐기하지 않으면서 이를 중심으로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의 체험과 고백이 내게는 사유의 인공호흡기 같았다. 그리고 신은 그런 다양함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신에게 이르는 다채로운 길!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평화를 공부하는 동안에도 내 사유의 범위는 여전히 보편과 다원주의의 궤적에서 맴돌고 있었다. 종교다원주의와 내용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동일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경합적 다원주의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평화를 공부하면서 겪었던 고민을 반영하는데, 그것은 평화와 갈등에 대한 도덕적인 관점을 지양하고 보다 정치적인 사유로 초청한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 나의 짧은 여정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나는 오랫동안 평화가 인류의 보편가치이자 인간 사회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덕목이므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 폭력과 증오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분쟁과 갈등은 더디더라도 점진적으로 신뢰를 쌓고 서로 대화한다면 모두가 생각하는 평화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화학은 평화에 이르는 길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을 교육하고 갈등 사회에 평화문화를 정착시킴으로써 다시는 동일한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총체적인 관점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꽤 다원적 사고에 능통하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우격다짐이 평화를 연구하고 갈등을 이해하는 데 썩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화에 대한 나의 인식을 뒤바꾼 것은 함께 평화를 공부하고 있던 동료들과의 논쟁적인 대화에서 시작됐다. 그 당시 내가 연구하고 있던 주제는 ‘화해’였는데, 내가 속한 대학 연구소에서 화해를 직접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 혼자였다. 역사적 화해니 정치적 화해니 하는 문헌들을 차곡차곡 읽어가고 가고 있을 무렵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내게 무언가를 시험하듯 물었다.

“민, 화해가 뭐라고 생각해?”

한 번에 답하기를 주저했다. 화해를 연구하는 전공자로서 멋들어진 답을 선사하고 싶었던 나는 화해란 다각적인 것이며 그 범위에 따라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어투로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는 최종적인 화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화해는 평화로 가는 적극적인 방법으로서 진실과 사과, 용서의 단계를 거치면서 차츰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화해가 가능하다기보다는 화해는 가능해야 하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는 목적론적 대답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친구가 내 말에 공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 친구는 나의 대답에 들어있는 평화와 화해에 대한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해 요목조목 따져 물었다. 요점은 이랬다. 화해와 평화와 같은 가치들이 인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회들에서는 보편적 가치들이 거부되기도 하며, 갈등이 발생한 후에 일어나는 사람들의 관계는 언제나 정치적인 것인데 정치적인 속성으로의 화해가 어떻게 최종적 상태에 이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그가 의미하는 바를 너무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고민에 빠졌던 나는 또 다른 동료와의 대화에서 비슷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그는 며칠 전 내가 놓친 것에 대해 더 거칠게 도전했다. 우리의 대화는 ‘왜 평화는 거부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평화를 거부한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평화는 누구나 원하고 모든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곧바로 평화에 이르는 길은 다양할지라도 평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므로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다. 종교다원주의가 내게 가르쳐준 윤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신에 이르는 길은 다를 수 있어도 신 자체를 폐기하는 순간 오르던 길은 허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화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각 사회마다 평화를 정위하는 방법은 달라도 평화 그 자체가 폐기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평화의 보편성이 그것을 정의하고 방법을 결정하는 어떤 집단이나 세력, 또는 이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꼬집었다. 그들은 내가 다원적 방법을 말하면서도 얼마나 보편적 질서와 방법을 추구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지 곱씹게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매일 연구하는 ‘평화’라는 것이 실은 특정한 관점에서 인식되는 평화이며, 거기에는 본질주의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주의는 언제나 승자의 정의이며, 그러한 관점의 평화는 거부될 수 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어려웠다. 이해하기 어려웠다기보다 좀 심란했다. 나의 기본 가정이 뒤틀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충분한 시간 뒤에 내가 깨달은 바는 다음과 같았다.

평화는 그것이 어떤 적극적 가치를 담지하더라도 결코 보편적이거나 본질적인 가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보편성은 그것을 말하는 화자나 세력의 힘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평화는 생각보다 인간이 공동으로 실현하려는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평화가 순기능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덕성이나 본질성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평화를 쟁투와 경합의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평화는 경합의 시간과 공간에서 더 정의로워진다. 그렇기에 평화는 다원주의를 먹고 자란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평화와 화해는 결코 최종적인 상태에 이를 수 없다. 최종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본질주의의 덫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나의 깨달음에 꽤 흡족해했다.

이것이 내가 평화를 이해하고 있는 경합적 다원주의의 일면이다. 평화는 어쩌면 경합적인 다원성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모두가 알고 누구나 이야기하는 평화. 과연 그 평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평화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경합적 다원주의는 평화를 차이와 불일치로 초대한다. ‘경합’(agonism)이란 본래 고대 그리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사이의 경쟁을 의미하는 문학적인 용어인데, 평화 이론가들은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경합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다. 경합은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상호 간의 불일치와 차이를 설명하는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보편적 양식으로의 평화가 정치적인 경합의 과정 없이 이해되고 보급되는 것을 반평화적이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다원주의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의 특성으로 이해하듯이 경합도 인간 사이에서 늘 발생하는 일상의 형태다. 경합적 다원주의는 일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름과 차이를 ‘마주’하고 그것을 통해 평화적 공존을 위한 실천양식을 어떻게 구성해 가는가에 관심한다. 이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이란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사이의 영속하는 차이와 다름의 연속체라는 것과 평화를 정의하고 그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갈등을 둘러싼 집단들의 경합임을 인식케 한다. 차이에 기반한 다원주의,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불행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얼마나 인간 사회가 다양하고 다채로운 상태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이 제아무리 인류적 가치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간들의 차이는 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보다도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열린 자세를 요청한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평화부재(peacelessness)의 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동형의 문화와 정체성, 기억과 서사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됨, 통합, 통일이라는 본질적 가치들이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요구와 목소리를 오히려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평화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이념, 하나의 정체성과 대척점에 있다. 동일한 울타리 안에 모두를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반평화다. 오히려 평화는 각양각색의 정체성과 의견이 혼합되고 마주하는 경합적 공간에서 더 빛을 발한다. 차이에 기반한 다원주의, 그로부터 발생하는 저항과 민주주의. 평화는 바로 이러한 경합의 과정에서 더 정의로워진다.

강혁민
평화학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 〈플랜P〉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