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의 정원
[394호 정원의 길, 교회의 길]
나는 뉴욕 주립대 지역 캠퍼스에서 식물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의 식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영어로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에 많이 긴장했었다. 첫 학기 나무 수업에서 150여 종의 나무 학명을 외우고 실물 앞에서 식별하는 시험까지 마치고 나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학생들도 본토 식물을 잘 알지 못했고, 라틴어로 학명을 외우는 데는 나와 같은 출발선에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자연과 생태에 대한 막연한 관심과 동경의 선을 넘어서 개별 식물들 이름과 계통, 고유한 성질을 알아가는 동안 어떤 목마름이 해갈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듬해 나는 전공필수도 아닌, ‘슈퍼 나무 수업’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굉장히 도전적인 과목을 수강했다. 거기서는 정원수로 계량된 세부 품종들을 포함해 350여 종의 나무를 배웠다. 두 수업 이후 교정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나무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물푸레나무들이 특별했는데 주차장에서 강의동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었다. 매일 드나들 때마다 그들은 나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넉넉한 품도 좋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잎의 색깔은 세월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듯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도전적인 이민 생활과 영어 수업에 적지 않게 경직되었던 마음에 큰 위로였다. 어렸을 적 시골 할머니 댁에 드나들 때마다 나를 반겨주던 느티나무에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네 발을 담그라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그런 곳에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 하다가, 혹시 중요한 정보를 놓칠까 싶어 어색함을 무릅쓰고 참석했다. 학과별로 모인 자리에서 학장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며 환영사를 열었다. 대학 생활을 알차게 보내는 비법이 담긴, 두 단어로 된 마법의 언어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런저런 대답들이 나왔고, 학장은 그중 한 학생의 말을 받아서 빙고를 외쳤다. “Get involved.” 영어를 주로 문법책으로 배웠던 내 머릿속에는 ‘범죄에 연루(連累)되다’와 같은 예문이 먼저 떠올랐다. 학장은, 내가 듣기에는 조금 뻔한 사례들로 그 말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돌아보면 중년의 학부 생활이 그토록 행복했던 것은 내 의식 속에서 그 조언이 작동했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바퀴 띠동갑, 그러니까 나보다 스물네 살 어렸던 동기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양 실험에 몰두하거나, 기말 과제 마감을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거나, 코로나로 인해 단 한 번 기회가 주어졌던 전국 대학생 조경 대회에 출전하거나, 정원의 세계에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던 현장 답사에 나섰던 시간들은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상황과의 촘촘한 연결선들이었다. 땅과 친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편도 70킬로미터 등굣길의 절반 이상은 뉴욕주 행정수도 알바니와 뉴욕 서부의 중심도시 빙엄턴을 연결하는 88번 고속도로였다. 이곳에 이런 대로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그러나 그 길은 계절마다, 날씨마다,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2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왕복하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지역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들국화, 서양미역취, 연필향나무, 미국붉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자작나무 등 도로 주변의 식물들은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의 군락은 사람이 디자인한 것보다 더 조화롭고 황홀한 풍경을 연출했다. 이 고속도로와 거의 나란히 달리는 7번 도로 주변에는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목초지 한쪽에 우뚝 서있는 사일로, 점점이 흩어진 농가들, 오래된 상점들, 그리고 지나가는 차량들에 시비를 거는 오리들도 정겨웠다.
마음이 급한 등굣길은 88번 고속도로를, 집으로 돌아올 때는 7번 도로를 타고 다녔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이곳의 식생과 환경에 정을 붙였고, 이렇게 형성된 지역과의 연대감은 공부하는 동안은 물론 졸업 후 진로를 탐색하고 정원사로 일을 해나가는 지금까지 든든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길 위에서 깊어진 사유를 통해 내 인생의 큰 주제인 교회관이 단단하게 채워졌고, 성경 속 여러 메시지를 그저 관념이 아니라 실재로서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창조 기사 속 상징들, 구약성경에 반복되는 땅 이야기, 심판의 결과로 땅이 황폐해지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현실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Get involved’. 오리엔테이션 당시에는, 한국 사회에서 모든 긍정적인 의미를 블랙홀처럼 쓸어 담아 탄생한 단어인 ‘열심히’ 속에 함유되었을 법한 개념 중 하나인 ‘적극적인 참여’ 정도로 이해했을 뿐이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사람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나아가 자기 자신과 절대자를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왔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가 직면한 명령은 일차적으로는 신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곳에서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의미이지만, 결국 히브리 민족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에 발을 담그라는 부르심이었다. 모세와 말씀과 상황이 비로소 연결되었고,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출발했다. 학장이 던진 그 키워드가 내게 던진 의미는 내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그 땅에 발을 담그라는 말이다.
땅의 저주
우리는 언제부터 땅과의 연결을 상실했을까. 땅과의 악연은 아담과 하와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저주가 한층 진화되어서 지금은 땅과 사람 사이에 돈이 매개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땅 한 평, 방 한 칸을 위해 ‘갑절의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박인석 교수는 아파트 자체가 아니라 외부와 단절된 ‘단지 문화’의 폐해를 지적한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는 마치 카스트제도처럼 계층화된 사회의 단면이다. 사회병리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이다. 사람들이 선택한 주거 문화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아파트 단지들이 사람들을 갈라놓는 동안, 거미줄처럼 깔린 도로망은 동물들 서식처를 갈라놓았다. 숲이나 들판이 도로에 의해 두 동강이 나면, 야생동물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은 두 지역이 절반씩 나눠 갖지 못한다. 대개는 급격하게 0으로 수렴한다. 야생동물들은 정해진 지역에 서식처를 갖고 있어도, 번식이나 먹이 활동 등 생존과 직결되는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정해진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마련이다. 도로는 사람에겐 길이지만 동물들에게는 장벽이다. 문명이 처한 가장 큰 딜레마이다. 해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동물이 찻길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동물들이 다 사라져서 로드킬 하나 없이 말끔한 도로가 있다면 그것 역시 섬뜩한 일이다. 수도권의 많은 녹지가 그렇다. 촘촘한 도로들 때문에 조각난 녹지들은 색깔만 초록이지 생물다양성 면에서는 사막에 가깝다. 그나마 남아있는 녹지는 골프장이 차지했다. 수도권 지역을 위성사진으로 보면 두 눈만 달린 유령들 형상이 허다하다. 골프장들이다. 코로나를 지나며 많은 골프장이 문을 닫았다지만, 중장비에 다져지고 농약으로 흥건해진 터가 복원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골프라는 운동 자체에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향유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이 문화가 조금 사악하다는 생각도 든다.
분리와 단절은 확실히 치명적인 저주다. 성경의 세계관에 의하면 죄의 본질은 창조주와의 분리이다. 그런데 이 죄의 대가로 내려진 심판도 땅과의 단절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나야 했다. 살인자 가인은 유리방황해야 하는 처지가 가혹하다고 하소연하면서 결국 벽을 쌓아 스스로를 격리했다. 우리의 주거와 교통 문화 자체를 부정할 수 없지만, 계층화의 상징이 된 아파트 문화와 생태 감수성이 결여된 도로 체계는 참으로 파괴적이고, 나아가 사탄적이다. 대부분이 도시인인 우리 세대가 짊어지고 있는 땅의 저주는 태초의 인류가 느꼈던 것만큼이나 가혹하다.
땅의 회복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을 치른 날 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면 흉년이 들고 병이 창궐한 그 땅을 고치겠다고 하셨다(역대하 7:14). 히브리어 ‘라파’, 즉 고친다는 말에 포함된 여러 의미 중에는 상처를 봉합해서 낫게 한다는 뜻이 있다. 원래 붙어있던 것이 떨어졌다면 다시 붙이는 일이 치유다.
조각난 대지를 다시 붙이는 생태 통로라는 것이 있다. 동물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 위아래로 설치한 다리나 터널을 의미한다. 원래 서식지 규모에 비하면 실오라기처럼 보잘것없는 모양새다. 그래도 어떤 곳은 하루에도 야생동물 수십 마리가 통행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산양, 담비, 삵 등 천연기념물이나 멸종위기종이 관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개발로 사라졌거나 도로에 의해 잘려나간 서식지 규모에 비하면 충분하다 할 수는 없지만, 단절된 두 생태계를 연결하는 수단으로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생태 통로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생태 축과 생태 네트워크가 있다. 각각의 의미나 구현 방법은 크게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분절된 생태계를 연결해서 자연성을 회복하고 생물다양성을 높이는 동시에 사람들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있다.
생태 복원 방법론에 네트워크 개념이 사용된 점이 흥미롭다. 이론적으로 네트워크는 점(node)와 선(link)으로 구성된다. 이 개념은 조각난 지역 생태계를 봉합할 수 있는 여러 대안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사실 손상되지 않은 생태계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가 대단히 정교한 네트워크이다. 어렸을 적 우리는 생태계 구성원들의 관계를 주로 먹고 먹히는 것으로 배워서 그 관계에 내재된 상호 의존성은 깊이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죄의 결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진 파국은 생태계 구성원 간 관계의 손상을 불러왔다. 이 글에서 사례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태교란종 또는 침입종이라고 부르는 외래종의 영향이나, 인간의 개발로 인해 생태적 교란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모두 관계의 손상으로 설명 가능하다. 정원 일을 하는 동안, 창세기에서 죄의 본질을 관계의 손상으로 기술한 내용을 나는 보편적 진리로 경험한다.
연결과 연대
우리나라는 정원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명맥이 끊어졌던 정원 문화가 새롭게 태동하고 있다. 문화를 오랜 세월 체득한 생활양식으로 알았는데, 아파트 중심 주거 문화라든가, 교통 통신 발달로 여가 패턴이 급속하게 바뀌는 모습을 보면 정부 정책이나 기술혁신 등에 의해 어떤 영역의 문화는 매우 짧은 시간에 형성되기도 하는 것 같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정원 문화의 방향이 결정될지도 모르겠다. 해외 동향에 밝은 정원가들이 앞다퉈 유럽의 정원 스타일을 소개하고 있고, 대형 종묘상에서는 유행하는 식물들을 발 빠르게 수입하고 있다. 몇 세기 전 유럽에서 그랬듯 정원이 소유와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될지, 고급 아파트처럼 계층화의 상징이 될지, 정원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할지 모르는 일이다.
죄의 속성이 분리와 단절이라는 원리를 생각한다면, 정원의 가치와 역할은 그 방향을 반대로 이끌어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너무 일찍 손대는 바람에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인류의 가드닝 활동을 엿볼 기회를 잃고 말았지만, 필시 창조주가 조성한 완벽한 정원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성령의 핵심 사역이 그러하듯, 그들은 만물이 하나 되게 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손상되지 않은, 고도의 종 다양성을 보이는 생태계에서 하나 됨(Oneness)의 원리를 깨우친다고 하는데, 이러한 담론은 애석하게도 힌두교나 신비주의 또는 여타 범신론 진영에서 활발하다. 기독교가 이런 개념을 다루는 언어에 미숙하다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목사님들이 들으면 화를 내실 수도 있겠지만 정원사는 성직(聖職)이다. 정원사의 역할은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피조 세계의 삶을 윤택하게 돕는 것이다. 식물의 언어, 생태의 언어로 복음적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다. 정원 문화가 사람들을 편 가르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고상한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주의 정원이 그 철학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나는 정원의 회심이라 부른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지만 한국 땅의 식생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우리나라 정원 동향도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 정원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사실은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분들이 쓴 책을 읽으며 정원가의 꿈을 키우고, 그분들 작품을 공부하면서 좋은 정원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7-8년이 흐른 뒤 나는 정원사가 되어 그분들과 다시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 모임은 자연주의 정원가들의 모임이었다. 우리는 1년 가까이 매주 온라인으로 자연주의 정원과 숲 정원, 식물 생태에 관한 것들을 탐구하면서 정원이 속한 땅이 원래 품었던 식생들을 더듬어가는 훈련을 하고 있다. 생태 축을 연결하여 단절된 생태계를 물리적으로 복원하는 것만큼, 사람들과의 연결은 필수적이다. 정원들의 연결은 정원사들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조그만 베란다 정원을 가꾸는 홈 가드너이든, 직업적인 정원 디자이너이든, 정원사들은 그 연대를 이루는 하나의 점들이다. 관계들이 촘촘한 그물이 되면, 어쩌면 우리는 서식지를 잃어버린 이 땅의 주인들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지키는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라는 네트워크
복원할 것이 또 하나 있다. 교회라는 네트워크이다. 에베소서 2장과 4장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연결’이라는 단어를, 사도 바울은 교회의 본질을 간파하는 강력한 언어로 사용했다(엡 2:21-22, 4:16). 어떤 교회들은 태초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해 돈과 땅을 탐하고 사람들을 가르며 이 연결을 해체한다. 하지만 어떤 교회들은 막힌 담을 허물고 손상된 관계를 복원해서, 어쩌면 가장 신적인 속성 중 하나인 충만한 다양성 속의 온전한 하나 됨을 추구한다.
나는 한 해를 뉴욕 바이블 콘퍼런스(New York Bible Conference, NYBC)에서 시작한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교회에서 처음 이 행사에 대해 들었을 때는, 교회 밖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영어로 진행될 거라 착각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2018년 처음 참석한 후로 지금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여기고 있다. NYBC는 뉴욕주 북부 한인교회들의 연합 집회로 2박 3일간 성경공부 5개 세션과 예배, 기도회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뉴욕주 북부에 흩어진 여러 도시에서 해마다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참 교회를 경험했고, 그 시간을 콘퍼런스가 아닌 ‘교회들의 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갈등과 분열에 관한 소식이 차고 넘치던 시절에, 교단도 다른 다섯 교회가 연합하여 이런 콘퍼런스를 16년째 이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거니와, 실제 현장에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신기했다. 명절에 가족 모이듯 1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였지만, 그사이 훌쩍 자란 아이들을 대견해하며, ‘형제님과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라는 인사로 서로를 맞이하는 관계였다. 교회들의 연대가 만든 이 교회는, 이곳에 참석하는 수많은 성도에게 한 해를 살아낼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기에 충분했다.
피조 세계의 화해를 생각한다. 자연과의 연결을 생각한다. 연결은 화해의 열매다. 자연은 종종 우리에게 재해라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조 세계를 경작하라는 원초적 사명이 철저하게 외면된 상황에서, 새 하늘 새 땅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자초한 자연재해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농사나 정원을 향한 관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대지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땅과 화해하자. 화해(reconciliation)는 부채를 청산하는 것이다. 이는 나의 첫 직장이었던 다국적 회사의 재무팀에서 쓰던 용어다. 매월 결산 때마다 세계 각국에 산재된 지사들 간에 주고받아야 할 채권 채무의 잔액을 맞추는 작업을 그렇게 불렀다. 땅에 대해 우리가 안고 있는 부채를 해결하려면 할 일이 많다. 땅은 회심한 정원사들을 부르고 있다.
이성희
미국 뉴욕식물원의 3년 차 가드너이다. 식물원 내 수목원 및 부지관리를 담당하는 정원운영센터(Horticultural Operations Center)를 거쳐 지금은 식물 번식과 보존을 담당하는 놀런 그린하우스(Nolen Greenhouses)에서 근무 중이다. 북미 자생식물을 소재로 한 자연주의 정원디자인을 추구하며, 뉴욕주 북부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정원 식물을 발굴 중이다. 뉴욕의 주도인 올바니(Albany) 소재 올바니한인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