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적이고 난잡한 친밀성의 세계
[394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박희정: 《호텔 아프리카》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해서’ 취약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고, 유대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고 실천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오월의봄), 7쪽.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관계 구도는? 아마 주인공 남주와 서브 남주 사이에 둘의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이 포진한 삼각관계일 거다. 지난 작품 《별빛속에》에서 보았듯 흔한 구도. 오늘 이 작품에도 드레드 헤어를 한 흑인 남자와 구불구불한 금발의 백인 남자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한 명 나온다. 기존에 흔히 보던 순정만화 여주인공 비주얼이 아닌 점이 좀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나온다. 쇼트커트 스타일에 민소매 크롭트톱을 입고 첫 장면부터 욕을 날리며 찡그린 표정으로 등장하는 백인 여자 주인공이. 셋은 함께 ‘영화 만들기’라는 꿈을 꾸며 의기투합한 20대 중반의 (실은 비정규직 청년들인) 엘비스, 에드, 쥴라이다.
1990년대 초중반 즈음 뉴욕에 사는 이 세 명은 같은 대학에서 우연히 만나 졸업 후까지 관계를 이어가는 끈끈한 사이다. 이들 세 명의 이야기에 엘비스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교차하는데, 유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바로 이 작품 제목이기도 한 ‘호텔 아프리카’. 미혼모로 흑백 혼혈 엘비스를 낳고 1970년대 유타주에서 ‘호텔 아프리카’를 운영한 어머니 아델과 외할머니 마지, 호텔에 장기간 투숙했던 인디언 청년 지요, 호텔을 드나들던 마을 손님들과 투숙객에 관한 이야기를 엘비스가 회상하는 형식의 옴니버스 만화 《호텔 아프리카》는 여러 면에서 파격이었다.
일단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소위 ‘정상성’에서 비켜서있다. 고아였고 흑인이었던 밤무대 가수 트란, 트란이 감전사로 죽고 나서 미혼모가 된 아델, 흑백 혼혈 유복자 엘비스, 인디언 지요, 아시아계 이민자 노마, 사막을 떠도는 집시, 지요의 어머니 양부인이 속한 히피 그룹이 그들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 주요 등장인물 정체가 대부분 퀴어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관계 구도는? 2020년대도 아니고 1990년대 중반에 만화가 박희정은 대중이 상상할 수 있는 남녀 로맨스 구도를 세련된 방식으로 전복했다. 그리하여 이 관계에서 마지막에 실연당한 이는 여자 주인공 쥴라이가 된다. 그렇다고 엘비스와 에드가 잘(?)된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한국 순정만화 작가사전》(파사주, 2018)에서는 이 작품을 그린 박희정을 “한국 만화 최초로 흑인/퀴어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로 명명했다. 《호텔 아프리카》는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무엇보다 흑인, 미혼모, 게이, 집시 등 전대미문의 마이너 캐릭터들로 이룬 성공이라 더욱 값졌다”는 게 저자 조영주의 평가다.1)
자연스레 체득한 소수자 감수성
《호텔 아프리카》의 폭발적 인기를 견인한 중고등학생 당사자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였을까? 훗날 조영주가 평가한 것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흑인, 미혼모, 게이, 집시가 “전대미문의 마이너 캐릭터들”인 줄도 모르고 당시 10대였던 난 그저 작품에 빠져들었다. 박희정 만화 특유의 쿨내 진동하면서도 알고 보면 속 깊은 캐릭터들에 빠져들었고, 소장 가치 뿜뿜한 감각적 그림체에 홀린 듯 반해버렸다. 마이너 캐릭터들이라지만 순정만화 잡지에 섬세한 그림체로 등장해 한껏 인간적인 자태를 보여주는 그들에게서 어떤 이질감도 느낄 수 없었다.
대중문화 서사에서 주인공 주변 인물로도 나올 것 같지 않은 이들을 세련된 감성으로 바깥 세계에 출현시킨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문학 소년 엘비스가 고교 시절 남자 문학 선생님인 노먼에게 매혹되는 장면에서는 설렜고, 에드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처음 깨닫게 해준 이안을 잊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같이 아련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을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인 건 아니다. 노먼이 퀴어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적 자리에서 공격받는 장면에서는 부당함을 느꼈고 내가 저런 상황에 함께였다면 난 어느 입장에 서서 노먼을 위해 무슨 대답을 할까 생각했다.
《호텔 아프리카》에는 퀴어뿐 아니라 사회 주변부 인물의 에피소드가 점점이 수놓아져있다. ‘호텔 아프리카’를 스쳐 지나간 10대 커플의 서투른 사랑과 그들이 20년 후 이룬 결실, 자살 여행자였던 10대 소녀들이 찾은 삶의 의미, 1970년대 히피 무리가 보여준 자유로운 공기,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이 맺는 새로운 가족 관계, 길거리에서 만나 가족이 된 흑인 여성과 시각장애 소년의 애틋한 연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지만 평생 자기에게 편지를 보냈던 시각장애 연인의 편지를 받으러 온 노부인 이야기까지.
이토록 다채로운 관계의 스펙트럼을 《호텔 아프리카》에서 자연스럽게 만났고, 남들과 조금 ‘다른’ 이들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내 이웃이라는 인식을 10대 때부터 갖게 된 것 같다. 《호텔 아프리카》가 그려내는 지극히 정치적인 가족 혹은 연인, 때로 친구 관계가 머리보다 가슴에 먼저 들어온 거다. 아직 자기 세계가 고착되지 않은 청소년이 예술을 흡수하며 누리는 특권이었던 걸까. 이 만화 덕에 혈연을 넘어 가족으로 함께하는 이들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주변부 삶이 더 이상 내 안에서는 주변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 자신이 누군가와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도 같다.
그 감수성 덕에 가까운 관계의 누군가가 성 소수자라고 커밍아웃해도 그를 낭만화하거나 혐오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지극한 현실이자 분명한 인격적 실체였다. 자기만의 인격을 지닌 한 명의 친구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기독교 신앙과 성 정체성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실천적 문제만이 우리 앞에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퀴어한 삶이 누군가 특별한 타자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나 자신이 태생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소수자가 되어 ‘이상한’(queer) 삶을 사는 일이 낯설지 않으니까. 지금도 비혼 여성으로서 이성애 규범 가족 모델을 따르지 않고 사는 일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으니까. 10대 때 만난 퀴어 서사가 내 안에서 일군 일들이다.
내가 퀴어다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김순남이 쓴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읽다 보니 《호텔 아프리카》에 감응한 그때의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정치·사회적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이상적인 가족 형태와 이상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의 경계는 결혼 여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장애, 국적, 경제적 상황, 나이 등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서 공고해지고, 따라서 어떤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사람이 ‘이상적인 시민’인가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중심 시민 모델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등 ‘이상적이지 않은 시민’들은 곧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이들로도 간주되며, 이들은 말 그대로 ‘뒤처진 존재’이자 보이지 않게 가려져야 하는 존재들로, 즉 중요하지 않은 시민으로 여겨진다.
― 같은 책, 9쪽.
현시점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40대 비혼 여성인 나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이자 뒤처진 존재, 중요하지 않은 시민이다. 그러고 보면 철저하게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중심 모델로 체계화된 제도권 교회 안에서도 난 지워진 존재다. 어느 부서에도 속하지 못하니까! 5월의 여러 기념일과 기념 주일 어디에서도 기념받지 못하는 존재, 설교 시간에 사랑과 믿음의 세계를 부부 관계 혹은 자녀 양육의 세계로 비유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함을 느끼는 그런 존재. 이렇게 ‘이상적이지 않은 교인’이 어디 비혼 여성인 나뿐일까. 이제는 내가 《호텔 아프리카》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사람이 되어있다. 이것 참, 영광인걸.
사회와 교회에서 동일하게 가려진 존재여서인지 김순남이 ‘퀴어가족정치’ 논의를 꺼냈을 때 내 눈은 반짝였다.
필자가 주장하는 퀴어가족정치는 삶의 차이를 발굴하고 차이를 확장하며, ‘가족은 무엇이다’라고 단일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다양한 관계성 그 자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퀴어가족정치의 핵심은 새로운 가족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망을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며, 퀴어한 삶과 관계성이 세대를 이어 전수되고 이어질 수 있도록 시민 간의 다양한 유대를 정치화하는 것이다.
― 같은 책, 123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삶의 차이를 발굴하고 차이를 확장하며 가족을 단일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다양한 관계성을 의제로 만들어간다고? 이거 이미 《호텔 아프리카》에서 본 건데! 퀴어가족정치의 핵심이 “새로운 관계망을 상상할 수 있는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미 20여 년 전 우리에게 도착한 《호텔 아프리카》만큼 아름다운 예시가 또 없다. 10대 시절, 이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관계성’을 보여주며 내 안에 소수자 감수성을 태동시킨 《호텔 아프리카》가 여기 있다. 이 작품이 1990년대를 넘어 2020년대에도, 아니 2020년대에 더 어울린다는 건 그때보다 지금, 새롭게 출현한 다양한 관계의 결속들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겠다. 한편 가시화한 만큼 새로운 관계의 결속에 편견과 혐오도 커졌으니, 다른 의미에서 이 만화는 오늘 다시 읽혀야 할 순정만화의 고전 되시겠다.
김순남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시작하며 “누구나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고, 유대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고 실천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만, 이 책은 혈연을 넘어 서로 돌보고 의지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의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다양한 유대를 정치화하는 일에 기꺼이 관심을 두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 이 책 옆에 《호텔 아프리카》를 둔다면 새로운 관계망을 상상하는 일이 한결 수월하리라. 나 또한 그 상상을 정치화하는 일에 동참하며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퀴어적 존재로서 이상하고도 낯설게 살아남고 싶다.
빛나는 우연적 관계와 무지갯빛 삶의 아름다움
어린 엘비스가 ‘호텔 아프리카’에 잠깐 머물다 가는 이들과 우연히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슬픔을 배우고 사랑의 옆모습을 만나고 성장의 열기를 느끼고 죽음의 의미를 알아나가는 장면을 다시 읽으며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이 생각나기도 했다. 작년에 읽은 《철학책 독서 모임》(민음사, 2022)에서 흥미롭게 접했던 ‘관광객의 철학’은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21세기적 방식으로 ‘관광’을 사유한다. 여기서 ‘관광’이란 “누군가를 친구인지 적인지 결정짓기 전에 관광하는 마음으로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들어가서 그 모순되고 다층적인 현실을 몸소 체감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2) 우연을 몰아내는 검색 알고리즘과 강한 유대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의 인터넷 세계에서 친구냐 적이냐를 실시간으로 나누는 지금 같은 때, 관광객의 자세로 “우연의 가능성”에 들어가 새로운 연대를 만들라는 이 철학이 어찌나 가슴에 와닿던지. 어린 엘비스가 ‘호텔 아프리카’에 방문한 누군가를 친구인지 적인지 결정짓지 않고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 들어가 함께 그 삶을 체감하는 장면들이 바로 빛나는 우연적 관계의 시작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1970년대 ‘호텔 아프리카’에서 아델과 엘비스가 손님들과 우연히 만나 일시적 관계를 맺고 헤어지고 또 일시적 관계를 맺으며 무지갯빛으로 삶을 채워가듯, 1990년대의 엘비스와 에드와 쥴라이 역시 마지막엔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의 관계 또한 20대의 어느 한 시절 우연히 만나 몇 년 동안 정서적으로 연대하며 취약함을 나누던 일시적 관계의 하나였던 셈이다. 삶의 어느 시점이 되자 각자의 선택을 따라 다른 연대를 이루며 떠나가는 그들 모습은 우리가 삶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다.
엘비스에게 일시적이고 우연한 관계는 선물 같은 경험이었다. 엘비스가 유년의 만남들을 아름다운 연대로 회상했으므로. 그러니 엘비스가 에드와 쥴라이와 함께 보낸 20대의 그 일시적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셋의 관계는 또 다른 빛깔의 ‘호텔 아프리카’이자 선물이 될 것이다. 언젠가 ‘호텔 아프리카’에서 다시 만날 것만 같은 여운으로 작품은 끝이 나는데, 20대 중반에 헤어진 그들이 50대쯤 다시 만나 지속적이며 대안적인 가족 연대를 중년 버전으로 다시 만들어나가도 좋겠다.
하루를 머물러도 관계의 전환이 일어나기도 하고 지요처럼 장기간 투숙하며 지속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며 사람들이 마구 섞이고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 상호 의존의 실천이 일어나는 난잡한 친밀성3)의 공간, 우연한 마주침으로 혈연을 넘어 가족을 형성하는 일이 일어나는 공간, 예기치 못한 만남이 일어나 삶의 의미를 주고받는 공간, 누구나 오고 가는 길목의 공간, 호텔 아프리카. ‘교회’가 우리 시대의 난잡한 친밀성의 공간으로서 ‘호텔 아프리카’가 되는 걸 바라는 건 무리일까. 그래, 무리인 것 같다.
1) 조영주, 《한국 순정만화 작가사전》(파사주), 101쪽.
2) 박동수, 《철학책 독서 모임》(민음사), 66쪽.
3)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오월의봄, 2022)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