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본디 즐겁고 평안한 것

[394호 내 인생의 한구절]

2023-08-31     김서은

인간은 다른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예술가들은 다들 병들었거나, 자살했거나, 방탕하거나, 폭력적이었다. 애정은 결핍을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는데, 나는 조금 극단적인 것에 끌리곤 했다. 이런 면은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서도 드러났다. 단점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이끌렸고, 내가 받을 수 있는 게 없을수록 잘해주고 싶었다. 내면이 망가진 상대를 돕기 위해 달려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누구도 내 뜻에 맞게 변화되거나 생각만큼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자 억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몰려왔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으니 그 자체로 만족하면 될 텐데 왜 대가를 바랐던 사람처럼 아쉬워했을까?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데 열심이었던 것은, 사실 내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였나?

어렸을 때 가족 중 누군가 아프면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 찾아오는 무력하고 쓸쓸한 기분이 싫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밝고 귀엽게 행동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힘들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았으니까.

아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목회자로서 사람과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내려놓는 분이었지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짊어지기엔 연약해 보여서 마음이 쓰였고, 오히려 내가 아빠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때는 부모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삶의 보람이었다. 부모님이 행복하고 편안하면 나도 덩달아 좋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뿌듯하기도 했다.

또 다른 아버지인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게 하나님은 늘 애틋한 뒷모습이었다. 세상을 창조한 그분이 때로 무기력하게 한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울고 있다고 느꼈다. 깨어진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면서, 좀 도와달라고 하는 모습처럼 다가왔다.

이후에도 내게 사랑이란 늘 힘겨운 뒷모습이었다. 가정환경과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굳어진 것일까? 이렇다 할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시간은 나를 시험하고 사랑은 나를 비웃을 뿐. 인생은 내게 어떤 답도 주지 않은 채 수많은 질문만 남기며 흘러갔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은 슬픔이 되었고, 슬픔은 때로 고통이 되었다. 고통이 미움이 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대답이 주어지길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로만 충만해질 수 있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이 말했듯,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존재로서 자기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사는 이유를 몰라 허무하고 권태로웠던 실존적 공허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고 삶을 통해 책임져야 한다. 내가 오랜 시간 부르던 처절한 목소리 그대로 이번엔 삶이 내게 물었다. 난 내 입으로 대답해야 했다. 그때 하나님이 내게 주셨던 말씀이 고린도후서 12:9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개역한글).

마음 한편에 비어있던 공간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로만 충만해질 수 있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이 내 허무함과 쓸쓸함을 소명과 희망으로 바꾸어주셨기 때문이다. 뒤돌아선 것처럼 보였던 등은 알고 보니 지친 내게 업히라고 내준 것이었고, 어딘가로 떠나가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던 뒷모습은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와서 쉴 수 있도록 언제나 내 곁에 계셨던 그분의 은혜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 아니라 본디 즐겁고 평안한 것이었다.

이전의 나는 옳은 일을 행한다는 만족감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도우려 했고, 마른걸레 쥐어짜듯 나 자신을 학대했다. 그건 나의 의를 관철하려는 고집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나를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크고 놀라운 사랑이 내 안에 넘쳐나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충만하고 기쁜 일이었다. 이걸 알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고독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소명을 깨닫게 하는 통로였다. 하나님은 공감과 연대를 통해 서로를 돌보는 일이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는 힘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 안에서 비애는 기쁨으로, 좌절은 소망으로, 약함은 강함으로 거듭났다. 남의 아픔에 덩달아 괴로워하며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하던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람을 살리면서 나를 살리는 새 삶을 주셨다.

계절이 돌아오면 또다시 꽃은 핀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일본어와 함께였는데, 고등학교와 대학을 일본어 전공으로 졸업하면서 일본 문학은 어느새 내 마음속 고향이 되어갔다. 일본 문학에는 길어봐야 두 주 남짓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을 보며 감탄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를 관통하는 정서는 ‘무상함’이다.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으로 짧게 피었다가 춤추듯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덧없는 우리네 인생과 닮았고 그런 점이 벚꽃을 아름답게 만든다. 꽃이 지는 것에 좌절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고 쓸쓸하게 그 정취를 즐긴다.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꽃은 피기 때문이다.

많은 일본인에게는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 고리로 이어져있다는 가치관이 있다. 사후 세계를 우리 삶과 무관한 생뚱맞은 장소가 아닌 바다 건너 저 멀리 어디쯤이라고 생각한다. 저승을 사람이 살지 않는 땅속으로 생각하던 한국인들의 전통적 사고와 사뭇 다르다. 자연 속에서는 때가 되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잎이 무성해지고 그 잎들은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는 죽음이라는 결말이 있고, 죽은 것들은 거름이 되어 새 생명을 꽃피운다. 그 과정들은 아주 자연스럽다. 시간은 돌고 돌며, 삶과 죽음도 이어져있다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생사관이다.

모든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때로는 평생 낫지 않길 바라던 아픔도 언젠가 잊힌다. 생명이 모두 죽어있는 듯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말이다. 설령 그 봄이 지나가고 또다시 겨울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 앞에는 두 번째 봄이 있다. 실존적 불안과 공허가 삶을 장악하고 있을 때도 세상에는 분명히 희망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나의 희망과 소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공감과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돌봄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고 싶다. 공부하고 일하고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난 진로를 바꿔 간호대학에 왔다.

오랜 시간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말만큼 공허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말로 하는 약속만큼 깨지기 쉬운 게 있을까. 언어란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변주되는 흐름에 불과하다. 편을 가르고,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남을 해치는 과정에서 폭력이 재생산된다. 결국 욕망의 찌꺼기들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간다.

내가 불합리한 구조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화려한 말솜씨로 그럴싸하게 변명해보려 해도 나 자신을 설득할 수도,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도 없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남과 나를 해친다는 것에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의 아픔을 내 눈으로 보고 내 몸과 마음으로 섬기고 돌보고 싶었다. 아파하는 이웃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배우고자 이곳에 왔다.

약하기만 한 내 힘이 아닌, 약한 나를 통해 온전함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길 매 순간 기도한다. 지금 죽을 것만 같은 절망, 심연과도 같은 피해의식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첫 번째 소망이 헛되이 날아갔어도 두 번째 희망을 믿어봅시다. 혹여 지금 겨울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건 죽어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소망을 애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잠시 묵념합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생명을 기대합시다. 마치 봄이 오듯 말입니다.

김서은
중앙대학교를 일본어문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현재는 충남대학교 간호대학을 다니고 있다. 글 속에서 사람을 보다가 사람 속에서 글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