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현장을 심방할 때 생기는 일
[394호 사회선교 더하기]
‘몸의 기억’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기억이라 하면 머리에 남은 어떤 정보만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기억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냄새, 색깔, 촉감, 온도 등 우리의 감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몸의 기억은 일상의 습관과 경험,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 녹아들어 삶에 영향을 미치지요. 슬픔, 행복, 불안 등 감정 역시 몸의 기억에서 시작될 때가 있습니다. 몸의 기억은 상당히 본능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킵니다. 환대의 경험과 친밀한 감정의 온도, 친구들과의 추억, 고향을 향한 그리움 등 긍정적 기억 역시 오래도록 우리 몸과 마음에 남아 비슷한 사건, 사물이나 장소만 보더라도 마음이 금방 설레기도 합니다. 물론 좋았던 기억만 몸에 남는 것은 아닙니다. 감당하기 힘든 기억들 역시 몸에 고스란히 남아 신체적·정신적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지요.
성서에서 언급되는 장소와 사건 역시 성서 속 인물들의 생생한 현장의 발자취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집트 포로 생활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를 헤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던 순간,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먹고 살았던 예수님의 삶의 궤적부터 지중해 전역을 누볐던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까지…. 그야말로 성서는 움직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떠났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구워주신 생선구이 맛은 어땠을까요? 초대교회 상징 중 하나로 물고기를 사용했을 정도이니 그 맛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궁금해집니다. 성서에 기록된 사건과 장소는 자연스럽게 당시 인물들이 느꼈을 냄새와 온도, 맛 등 감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장심방 프로그램이 남기는 기억
‘발바닥으로 읽는 성서’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진행하는 현장심방 프로그램입니다. 말 그대로 성서 읽기를 머리와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현장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습니다. 10년 가까이 계속된 현장심방 프로그램은 특별히 도심 속 따로 떨어진 것 같은 농성 투쟁 현장을 찾아가 노동문제와 사회문제를 겪는 당사자 목소리를 들어보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입니다. 투쟁 당사자 이야기는 방문하는 농성장 특유의 냄새, 그날의 날씨, 그곳에서 대접받는 차나 믹스 커피 맛으로 생생하게 기억되곤 합니다.
현장을 찾기 전까지는 반가움이나 기대보다 긴장과 두려움이 앞섭니다. 좋은 감정보다 불쾌감을 주었던 낯선 공간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회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노동문제를 잘 모르거나, 농성 천막이나 집회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참가자들이 대다수라서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데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불편하지 않을지, 혹여 서로 오해되는 부분은 없을지 여러 번 고민하게 됩니다. 진행 당일에는 속이 쓰려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로 시간을 보냅니다. 참가자들 눈빛 역시 기대 반 낯섦 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농성장을 처음 방문하는 참가자들에게는 현장 이야기를 듣는 마음보다 ‘왜 저렇게까지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판단이 먼저 들기도 합니다. 무섭다고 느끼기도 하지요. 또는 내가 이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찾아가기를 주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소개하고 이야기 나누기 시작하면 쌓여있던 경계심과 선입견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나름대로 위로를 주러 갔다지만 오히려 위로받고 눈물을 흘리고 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참가자를 말없이 안아주시던 투쟁 당사자도 있었습니다.
일정 중 참가자가 집회 현장에서 발언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일정표를 통해 프로그램 기간에 어떤 것들을 하는지 미리 안내해주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럴 때는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려주기 어렵지요. 그래서 오히려 솔직한 마음을 잘 담아 표현해보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비록 농성 현장이 처음이고 노동문제를 잘 모르긴 하지만 나름 기사를 찾아 준비하여 씩씩하게 발언을 이어가는 참가자 모습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 청년의 말이 그곳에 모인 분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지, 어떤 공감을 일으킬까 싶었지만, 막상 발언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귀여운 조카나 자녀를 보듯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발언을 경청합니다. ‘투쟁’ 구호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말에는 결연한 농성장의 긴장을 푸는 함박웃음이 지어집니다. 농성장을 찾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질문이 아닌 온몸의 느낌을 통해 말을 건네는 일에 가깝지요. 글과 말로 만나는 것 이상의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그렇게 온몸을 통해 말해지고 느껴진 것들이야말로, 비록 한두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기억에 오래도록 남겨집니다. 참가자 중에는 현장심방을 마치고도 혼자 병 음료를 사 들고 농성장 천막을 다시 방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한편, 현장심방에 참석했던 누군가가 농성장을 다시 보기 싫은, 아픈 기억으로 남겨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족 중 노동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분이 있거나 직접 노동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경우, 농성 현장 방문을 주저하게 되지요. 하지만 현장에서 당사자 목소리를 통해 주어지는 고통으로의 초대는, 역설적으로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해주는 것처럼, 농성장을 방문하는 이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며, 이전에 겪었던 상처와 어려움을 조금 더 이해하고 수용하게 됩니다. 부정적으로만 채색되었던 노동자의 어려움이 ‘나의 과제’로 다가오는 순간을 옆에서 함께 느끼기도 했습니다.
몸의 기억이 달라지게 한 것들
그렇게 온몸을 통해 기억에 남겨진 현장은 나의 시선을 바꾸어줍니다. 나의 기억은 내가 살아가는 현재를 다시 채색합니다. 성서 본문이 새롭게 보이고, 찬양 가사와 기도문 한 줄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허공에 떠있는 굴뚝을 보며, 고공농성 현장을 떠올리게 되고, 간밤 돌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닥다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농성장이 치워진 빈 곳을 보면서 매일 자유와 해방이라는 약속을 찾아 40년간 광야를 헤매던 이들의 천막을 떠올립니다. 이 밤에도 농성 천막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드리게 되고, 날씨가 궂은 날이면 천막에서 지내야 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두 사람 기억을 모으면 현장심방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함께 모여 나눴던 얘기들, 취침하기 위해 불을 끄고도 한참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쌓여 현장을 다시 방문하는 발걸음이 되기도 하지요.
기독교를 공부하는 신학생, 선교단체를 통해 현장심방을 알게 되어 신청한 기독 청년, 친구가 가자고 해서 어쩌다 같이 오게 된 1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매 기수 현장심방이라는 시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각자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 신앙과 유머로 채워진 기억들은 때로는 현장심방 때마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애정 어린 간식이 되고, 소중한 일에 쓰려고 모은 재정을 투쟁 현장 지원금으로 보내주는 손길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잊지 않으려는 미안한 마음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현장심방 졸업생들은 노동자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노무사로, 현장 활동가로, 기독 운동가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이 기억을 품고 눈빛을 반짝이며 살아갑니다.
2020년에는 현장심방이 진행된 10년을 기억하며 참가자들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 말을 들으며 현장심방을 거쳐간 이들이 각자 삶의 현장에서 당시 가졌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말을 걸고 이름을 묻는 일
그럼에도 농성장은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는 자리입니다. 현수막으로 시선을 가리고 소음으로 불편을 줍니다. 주거지에 가까울수록 이 불편은 더 크게 느껴지지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 시대 거라사 지역에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어 사슬에 매어놓은 한 사람을 실제로 매어놓은 것은 그 지역에 존재하던 차별적 시선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 군대의 지배라는 억압된 현실 속에서는 누군가 아파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외면하고 가두고 소거하는 방식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상황에서는 어떨까요?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고 내 주변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야말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의 ‘광인’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광인’이라 여겨졌던 이는 당시 로마 식민 지배의 모순과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약함의 표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약함의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는 점을 거라사 사람들은 애써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노동 현장을 다니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내가 이렇게 투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였습니다.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이윤이라는 이유로 누구나 예상하지 못한 채 내몰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성장 ‘이름’을 묻고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부터 농성장의 기억은 누군가의 기억이 아니라 나의 기억이 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동 현장, 농성 현장에 대한 소식은 알기 어려울 뿐 아니라 쉽게 접근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마음은 있더라도 잘 알지 못해서 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장심방은 교회와 현장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야곱의 꿈에서 나오는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바쁘게 오가듯이 현장심방 실무자들은 방학 때마다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할 준비를 합니다.
이 글이 나올 때면 현장심방 27기 11명의 수료생이 2박 3일간 일정을 마쳤을 즈음이겠네요.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현장에 말을 걸고 이름을 묻는 일을 통해 어떤 기억들이 남겨졌을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자칫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화가 아니라 불을 주고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이미와 아직, 하늘의 평화와 땅의 고통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합니다. 그리고 만들어가야 할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곳이 바로 현장심방입니다.
송기훈
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선교부에서 2016년부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