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단체에서 영적 우정에 대해 말하기
[394호 커버스토리]
내가 속한 대학 선교단체에서 15년 만에 전국수련회를 개최했다. 15년 전인 2008년에 나는 대학 4학년이었고, 이번에는 12년 차 간사로 이 수련회에 참석했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사역지를 옮기며 이 일을 계속해온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자주 “캠퍼스 환경이 많이 달라졌죠?”라고 묻는다. 나는 “그럼요”라고 답한다. 캠퍼스 사역은 매년 다르다. 카카오톡 공지에 지나치게 꼼꼼히 대답하는 학생들 때문에 의아해한 적도 있었는데, 불과 1-2년 사이 개인 톡에도 답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져 1학년 친구에게 이 현상에 관한 긴 해설을 듣기도 했다.
수련회 중 캠퍼스 선교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3-4학년 학생들이 주도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학생들이 언급한 대학 사회 특정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개인주의 #경쟁 #무관심 #종교에대한거부감 #능력주의 #공허함…. 그에 따른 캠퍼스 선교 전략은 이렇다. #환대 #공동체 #안전함 #사회에대한기여…. 키워드들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 15년 전 4,500명이 참석했던 전국수련회에 조장으로 참여한 내게 위 질문을 던졌더라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는 학생들의 특징과 문화는 매년 바뀌는데, 학생들이 바라보는 대학 사회 특징과 문제는 똑같은 것이다. 그때도 대학 사회는 능력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에 물든 곳이었다. 공동체로 함께 모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연습하는 길이 유일하고 지속적인 대안이었다.
하지만 오늘 캠퍼스의 개인주의는 조금 더 복잡하다. 홀로 있기를 선택하는 이유와 방식이 훨씬 다양해졌다. 학생들은 단지 경쟁심이나 고스펙 취득을 위해 혼자 있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이 더 안전하고 재밌어서 혼자 있는다. 대학 문화 내 능력주의는 학점에 대한 능력이 아니라 관계성과 자기 어필의 능력을 말하고 그럴 재주가 없는 학생들은 교내에서 점점 고립된다. 이런 친구들도 학교 밖에서는 혼자가 아니다. 당근마켓에는 “오늘 저녁에 학교 운동장에서 러닝 하실 분”이나 “새로 생긴 타코집 같이 가보실 분”을 모집하고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오픈 채팅방에서 야자 타임으로 일상 나누실 분”을 구한다. 익명이 보장되는 오픈 채팅방엔 ‘종교 금지, 광고 금지’라는 규칙하에 50여 명의 학생들이 금방 모인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나름대로 향유하는 일상이 있다. 3-4시간 영상 시청은 기본이고 게임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기 온라인 모임을 한다. 그들은 즐거워 보인다. 교회 밖이 교회 안보다 더 안전하고 더 풍성하다는 걸 이제는 모든 대학생이 확신하는 듯하다.
이런 환경에서 선교단체는 분명 그 간판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 동아리라는 사실 때문에 당하는 억울한 편견과 홀대만 제외한다면, 대학의 이런 현실이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속할 곳과 좋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대세에 마냥 끌려가지 않는 학생들이 반갑다. 마음의 역동에 민감하고 자기 필요를 잘 아는 이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들이 더 많아진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겠다. 그 결핍과 갈망은 무척이나 지당해 보이기에, 학교는 (때로는 교회도) 미워할지언정 학생들은 미워지지 않는다.
관계를 말할지, 관계를 맺을지
학생 선교를 하려면 일단 사람을 모집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큰 난관이다. 그래서 읽게 된 마케팅 도서가 있다. 마크 W. 셰퍼의 《인간적인 브랜드가 살아남는다》(알에이치코리아)이다. 이 도서 부제는 ‘마케팅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이니 어떤 형태로든 브랜드로 살아남기 힘든 현실은 교회와 선교단체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제목이 말하는 인간적 브랜드가 어떤 모양새인지는 몇몇 예시만 봐도 공감할 수 있다.
내 말의 요지는 이렇다. 어떤 로고나 노래 또는 브랜드의 일부를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 이 말이 브랜드 충성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브랜드의 위상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 아무리 광고 노출이 많아도 나를 하얏트에 묵게 만들 수는 없다. 내가 하얏트에 머무르는 이유는 ‘인간 노출’ 때문이다. 내가 뉴브런지웍에 갈 때 하얏트에 머무르는 이유는 라리탄 강가에 세워진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에 정서적 연관성을 느껴서가 아니라 하얏트의 직원인 테리와 정서적으로 통하기 때문이다.1)
신한카드는 고객을 위해, 그러니까 우리의 편리와 행복을 위해 생각만 하던 것을 행동에 옮긴다고 정중하게 어필하고 DB생명은 우리의 꿈을 응원한다고 말해준다. 고급 아파트나 일류 카드회사나 통신사, 보험회사는 물론 다이어트 상품까지도 우리를 이처럼 소중히 여기고 관계적 용어로 다가온다. 그들은 더 이상 제품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마음을 사기 위해 우리와 좋은 관계가 되고자 한다. 굳이 ‘공동체’ ‘관계’라는 단어를 넣지 않아도 수많은 회사가 우리와의 유의미한 연결로 마케팅한다. 시류가 그러할진대 대학생들은 더더욱 ‘멋진 곳’에 대한 관심보다 아주 작은 감사 표현이라도 자신에게 ‘멋지다고 말해주는 곳’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혼자가 낫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직접 멋지다고 표현하는 곳은 도무지 없으니.
교회가 얼마나 대단한지 늘어놓는 자랑이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선교단체가 가진 탁월한 가치와 자료로 대학생들에게 포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는 메시지를 따라 이제는, 정말 한 인격을 그렇게 대하고 섬겨야 하는 도전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기독교가 규모나 프로그램 때문에 스스로 초라하게만 느껴진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여전히 내부에서만 통하는 옛 관점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위와 같은 마케팅의 이른바 근본을 알고 있다. 교회는 그것을 삼위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더없는 최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해낼 수 있다. 한편 우리는 광고의 허구성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에 기반한 인간의 뿌리 깊은 갈망이 자본주의의 강력한 수단이 되는 현상이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곳이야말로 유독 더 ‘당신은 소중해요’라고 어필하는 모양새가 때로 섬뜩하고, 다 알면서도 감동하는 형편인지라 쓸쓸하다.
하지만 교회의 건전한 판단으로 하나님 사역을 해석하는 데 두 가지 착오가 발생한다. ‘당신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우리와 계약하세요’라는 시류를 못마땅하게 여겨 관계적 언어를 빼거나 순서를 바꿔버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화는 관계에 대한 갈증을 자극하면서도 정작 관계는 더 어렵게 만든다. 시장 경제가 점점 세계화할수록 시장이 아닌 모든 사회관계에 대한 공격은 더 매몰차진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적-생태적 그물망을 강화해야 하는 교회의 역할이 그래서 한층 더 중요해진다. 안타깝게도 문화가 교회보다 이것을 더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2)
현재 교회와 문화를 지적하는 저자의 말이 옳다. 관계의 원리를 더 제대로 아는 쪽은 역시나 신학이지만, 관계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는 쪽은 시장이다.
관계를 다루는 교회의 첫 번째 문제는 소중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 갈망을 모른 척하거나 부차적인 일로 여기는 데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시작한 관계만을 맺어가야 한다는 강박을 고수하는 점이다. 모두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 갈망에서 시작하길 거부하고, 언제나 더 고상한 원리가 우리 동기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여정의 하나로 여기는 더 큰 모순에 부딪히고 만다. 1단계(관계의 당위)를 잘 거쳤을 때 다음 단계(관계 자체)가 의무로 전락하거나 필요 없는 것이 되어 처분한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을 1순위로 생각해야만 한다고. 그분과의 관계가 친밀하고 단단해야만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지켜온 사람이다. 하나님 이해가 깊어졌을 때 사랑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자꾸만 실천을 뒤로 미루던 시절이 길었다. 의도를 점검하느라 행동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 특성은 신앙하는 해가 길어질수록 강화되어갔다. 하지만 내가 선교단체 간사라는 복을 누리는 바람에, 시시각각 변하는 사랑스럽고 독특한 친구들과 매년 부딪치는 바람에 나는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는, 많이 생각하거나 많이 느끼지 않고, 일단 행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우정을 말하며 선교하기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존재를 드러낼 때 가장 적절한 유비는 무엇일까? 흔히 결혼 이야기로 성도의 시작을 묘사하지만 나는 우정 관계가 더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우정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질들은 삼위 하나님께 참여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우정은 세 분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그분 자체와 우리에 대한 인격적 묘사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도록 하는 넉넉하고 좋은 문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우정의 가능성은 지적 수준이나 국가, 종교나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평생에 걸쳐 열려있다. 결혼 관계처럼 배타적이지 않고, 정당 지지자 그룹같이 분리나 입장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비즈니스 관계처럼 나 외의 목표에 집중되어 있지도 않다. 우정은 그 자체로 우리가 모두 갈망하기에 적합한 경험이다. 나는 현재 기독 공동체에서 좋은 우정에 대한 가르침이 좋은 연애와 결혼, 혹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강의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우정에 대해 수다를 떨고 우정에 대해 시도하고 공부하며 우정 속에서 즐거움과 좌절을 반복하고 빨려 들어간 그 공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한다.
관계나 공동체라는 말보다 ‘우정’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공동체나 관계에 대한 당위를 말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기독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공동체 안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 모두가 지속적인 우정이라 말할 친구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금 현시대 대학생들에게 사역자가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덕이 바로 우정의 덕이며, 이것을 학생 선교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정은 알고 보면 부담스럽고 어려운 덕목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말한 바 있듯 사랑이나 절제, 관용과 달리 우정의 습관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 몸에 무엇이 익는지 분명하지 않다. 외로움은 현대 질병 중 가장 치명적이고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 우정을 통해 어떠한 그리스도교적 습관을 형성할 수 있을까. 우정의 키워드가 학생들에게 고민스러운 주제임에도 기독 공동체에서 이 덕을 쉽게 지나친 이유가 바로 이런 불분명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 좋은 통찰을 준다. 그는 우정을 정의하며 “덕이거나 덕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좋은 우정을 뒷받침하는 힘이 모든 덕의 시금석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3)
우정에 힘을 실어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달리, 일반적으로 우정은 쓸모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편에서 보면 쓸모나 즐거움이 다하면 우정은 시효를 다하고 만다. 농구 클럽이나 같은 반 또래나 동네 친구처럼 관심사나 장소, 생애 주기가 친구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특정 조건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우정의 특징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대체로 그렇게 우정을 경험한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우정은 부담스럽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향하는 우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정에 대한 일반적 인식, 우정은 쓸모나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생각 너머로 향해야 한다. 관심사와 장소, 생애 주기라는 조건은 모든 만남의 시작이지만, 환경 변화가 관계를 유동적으로 바꿀 때 우리는 진정 덕을 지향해가는 우정으로 지속하고 성숙시킬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지역으로 일터를 정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에게 대학 시절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동기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현대에는 우정이 너무 많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정=공통 관심사 공유’에만 머무를 때 그 관계는 진입은 쉬워도 지속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는 매우 불안정하다. 그 불안정성은 결국 ‘친구가 많은 줄 알았는데 중요할 때는 아무도 없어’라든가 ‘역시 우정보다는 연애지’라든가 ‘직장 동료나 대학 친구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어’라는 마음을 만들어낸다. 우정에 한해서 우리는 반드시 ‘덕과 함께 갈 것’을 가르쳐야 한다. 즉, 친구는 친구를 보며 계속 성숙해가야 한다는 의미다.
우정과 함께 선교하기
우정을 기반으로 하는 선교 현장은 관계가 주는 풍성함 때문에 지치지 않고 강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캠퍼스 간사나 홀로 사역하는 목회자는 상황을 제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서 실수와 자괴에 빠진다. 하지만 우정으로 넓게 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선교는 어쩌면 우리의 성공이나 실패와는 관련이 없다. 친구들의 동역은, 만들어내는 그 공간 자체가 의미가 되고 결코 강박적으로 목표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
우정 안에서의 선교는 선교하시는 하나님께서 참여하도록 부르는 부드럽고 자발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나는 학생 선교에서 리더 그룹 내 우정의 질이 중요하다고 백 번도 넘게 강조하고 싶다.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좋은 도전은 그들에게 사역적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 아니라 우정의 드라이브를 거는 데 있다. 좋은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길, 대화하는 기술을 연습하길, 개방성을 갖고 타인과 나를 동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유연성을 기르길. 그 공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드럽게 놓인다. 물론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그들이 관계에 너무 몰입하다가 목적을 잃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느라 후배들을 돕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을지 말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우정은 고여있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싶어 하는 특징을 가진다. 우정은 조직에 대한 충성이나 성과에 대한 압박이 아닌 자발적 기쁨 때문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아에 몰두한 경쟁적 인간이기를 멈추고 함께 살아있음의 감각을 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선교의 내용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홀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잘 보인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지만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할 것을 안다. 하지만 교회 친구들과 소망이나 계획을 나누는 일을 즐거워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흥겹게 그 계획들을 구체화해서 실행해버린다. 성도 간 신뢰 관계가 돈독할 때 우리들의 제안은 장벽 없이 받아들여지고 행동으로 매끄럽고 유동성 있게 옮겨간다. 교회는 귀촌한 친구의 지역에 방문해 농사일을 도우며 지역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일을 좋게 여기고, 안산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예배드리는 것을 특징으로 여긴다. 이러한 선교를 교회 안에서 주도해 기획하는 주체들은 서로 각별한 우정 관계다. 대체로 이런 아이디어는 수다를 떠는 자리에서 나온다. 우리는 언제라도 서로의 의견에 동의 혹은 우려를 표할 수 있고, 서로를 대신하여 성도들 의견을 물어주거나 설득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
관계가 주는 경험은 그 자체로 선교적이다. 관계 안에서 우리는 뿌리 깊은 존재적 갈망을 인정한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진한 갈망이 얼마나 오랫동안 뒷방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그 갈망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거절, 학창 시절의 압박 등으로 그 갈망이 머무르고 있는 방을 열어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우정은 그러한 우리의 욕망을 일깨운다.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린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스텝을 맞춰보자고 격려한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우정이 선교의 현장일 수 있는 마지막 이유가 있다. 우정은 친구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우정의 선택들이 성령께 인도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친밀한 우정과 헌신, 대체할 수 없는 종류의 순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때 누군가는 그분의 부름과 뜻에 따라 가족과 친구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하시기 위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의 연합을 사용하시며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란스럽고 진지한 대화를, 깊어지고 자라나는 인격의 모양들을 볕이 잘 드는 벽에 걸어두고 오래오래 감상하신다.
[말렐딜4)을 섬기는 대장의 지시에 기꺼이 따르는 제인의 이야기]
사실 그녀는 마음 상태를 분석할 수 없었다.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공포감이 느껴져야겠지만 환희가, 환희가 느껴져야겠지만 공포감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흥분과 순종의 긴장감에 빠졌다. 이 순간에 비하면 인생의 모든 다른 것들은 왜소하고 평범한 듯했다.
대장이 말했다.
“그대는 순종하겠소? 말렐딜에게 순종하겠소?”
제인이 대답했다.
“저는 말렐딜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장님께 순종합니다.”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하오. 이것이 ‘깊은 하늘’의 호의요. 그대가 선의를 가지면 ‘그분’은 항상 그대가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거요. 늘 내게 순종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요. ‘그분’은 대단히 질투가 많으시오. 결국은 ‘그분’ 혼자 그대를 소유하실거요. 하지만 오늘 밤은 이것으로 족하오.”5)
대장과 제인의 우정과 신뢰는 하나님을 향해가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그리신 그림이기도 하다. 우정은 자체로는 부르심의 서곡일 뿐이지만 이 서곡을 즐거이 연주해내면 우리는 본곡의 멜로디를 분명하고 즐겁게 연주할 수 있다. 곧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실 테니 말이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친구이실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따라 강남에도 가고 원주에도 가고 필리핀에도 간다.
1) 《인간적인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73쪽.
2) 레너드 스윗, 《관계의 영성》(IVP), 202쪽.
3)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IVP), 78쪽.
4) ‘말렐딜’은 대장이 섬기는 신으로 루이스의 소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한다. ― 필자 주
5) C. S. 루이스, 《그 가공할 힘》(홍성사), 397쪽.
박순영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 한국기독학생회 IVF 간사가 되어 6년은 서울에서, 4년은 원주에서 캠퍼스 사역 중이다. 학생선교운동 말고도 육아, 문학, 여성주의, 여행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