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무관심을 바란다
[394호 커버스토리]
“이번 달 회비 입금 부탁해.”
“아 미안, 깜빡했어. 바로 보낼게!”
“내년에는 10만 원씩 더 내야 될 것 같은데?”
우리 부부가 나눈 대화다. 매월 25일, 우리는 공동생활비 통장에 각자 80만 원씩 회비를 송금한다. 이렇게 모인 돈은 가스비, 전기세, 수도 요금, TV 인터넷 요금, 대출이자 등 가족의 공동 지출에 쓰인다. 마트나 시장에 가서 장을 볼 때도 사용한다. 온라인도 마찬가지.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 결제 금액도 생활비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늘 빠듯하지만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저축도 한다. 생활비 통장에는 두 자녀 이름으로 가정양육수당도 10만 원씩 들어온다. 가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 아이들도 자기 몫의 회비를 내며 생활하는 셈이다.
결혼 전부터 각자 수입이 있었던 우리 부부는 결혼과 동시에 회비제를 실시했다. 어느덧 결혼 1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평가해보면, 몇 차례 인상이 있었지만 나름 잘 정착된 듯하다. 회계를 맡은 나는 매월 재정 상황을 보고하고, 총무인 아내는 감사를 실시한다. 내년 첫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 부동산 임대차 계약 종료 등 몇 가지 중요한 일과 결정을 앞두고 있어서, 올가을에 다음 연도 예산 편성을 위한 차갑고 무거운 이사회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내년에도 우리 집 가계부 안에 감사가 넘치길 간절히 바란다.
어쩌면 우리 부부의 삶이 차갑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회비 외의 돈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각자 얼마나 저축하고 지출하는지 묻지 않는다. 애당초 서로의 정확한 수입을 모를 정도이니, 냉정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생활이 차갑지만은 않다. 나름 낭만이 있다. 합법적으로 비상금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상품, 특히 새로운 배트맨 레고가 출시되면 아내 허락 없이 구매할 수 있다. 아이들 장난감도 쿨하게 사준다. 외식할 때, ‘오늘은 내가 살게’ 생색을 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어떤 날에는 퇴근길에 느닷없이 아내가 좋아하는 꽃과 스콘을 사서 귀가한다. 우리 부모님처럼,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배우자에게 혼날 걱정이 없기에 용기를 낼 수 있다. 우리 부부 안에는 여전히 따듯한 로맨스가 있다.
이러한 우리 가족 회계 시스템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 결혼을 꿈꾸는 후배 커플에게 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인생의 선배님들께서는 부러워하기보다는 신기해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르구나’라고. 요즘 젊은 부부, MZ세대 부부라는 평가 아래, ‘개인주의 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님들 반응도 궁금해진다.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나는 혼자가 편하다. 정말 그렇다. 심지어 목사인데도 사람을 무서워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스몰 토크로 관계를 시작하기가 늘 어렵다. 교육 부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에는 새 신자가 오면 덜컥 겁부터 났다. 새 신자 전담 교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매주 학교 앞 전도를 하는 열정을 보였던 적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롤플레이는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다. 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도 어렵게 느껴진다. 아내와는 중고등부 전도사-교사의 관계로 처음 만났는데, 2년 만에 사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내는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적인 얘기를 나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졌다. 나는 전화 통화를 어려워하는 콜포비아(Call Phobia)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다. 내게 개인주의는 정말 달콤한 우리 시대의 문화다. 이렇게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은 없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종종 공격을 당한다. 특히 안 좋은 뉴스가 전해질 때, 개인주의가 원흉으로 지목받곤 한다. 얼마 전 학생 인권이 젊은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학생 개개인의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교육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주장도 나왔다. 개인주의가 강해져서 공동체가 위협을 받는 것일까? 무너졌다는 교권도 하나의 힘 아닌가? 단순히 힘과 힘의 대결 구도로 가는 양상이 안타깝다. 특히 개인의 힘, 학생 인권이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같은 싸움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다. 이렇듯 끊임없는 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권력, 힘, 이기주의는 의식하지 않고, 개인주의가 ‘함께’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여긴다. 과연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
개인주의의 안티테제는 집단주의이다. 그러나 두 단어 모두 하나를 강조할 뿐, 개인과 공동체를 각각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모여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 안에는 각 개인이 존재한다.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개인주의가 될 수 있고, 집단주의가 될 수 있다. 무엇이든 한쪽에 치우치면 위험해진다. 극심한 개인주의가 사회문제를 야기하듯, 극단적인 집단주의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개인의 ‘죽음’이 뉴스에 등장하면, 언론은 죽음의 사회적 원인을 밝혀내려 한다. 부모의 무책임, 이웃의 무관심, 끊이지 않는 가난의 고리, 법과 제도의 한계 등등, 개인의 문제를 너무 쉽게 사회문제로 치환한다. 개인 영역으로 두지 않고 범죄의 사회적 원인을 찾는다.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면 구조적 발전은 없겠지만, 어떤 문제든 오래지 않아 진영을 나눈 힘 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을 보면 아쉬울 때도 있다. 법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결과로 이어지면 참 좋겠지만, 결말이 늘 해피 엔딩인 것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가 등장해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범인은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사이코패스여야 한다. 당연히 가정의 문제도 있어야 한다. 이런 바람을 갖고 범죄자의 가정환경과 학창 시절을 조사한다. 범죄자가 될 만한 징후를 찾아내면 후속 보도가 줄을 잇는데, 여기에는 원래 그럴 만한 사람이었어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특이했어요” “친구가 없었어요” 등등. 원래 그럴 만한 이유를 확인한 후에야 사람들은 안심한다. ‘나나 혹은 평범한 집단의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랬구나’ ‘평범한 시민/국민인 나와 우리 가족, 내 이웃은 그렇지 않겠지’. 이렇듯 ‘우리’ 집단이 범죄자들과 다르다고 느낄 때 안전감을 찾게 된다. 우리 일상을 흉악 범죄로부터 지키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한마음 한뜻이 된다. 이와 같이 집단의 문제가 더 심각할 때도 있다. 개인도, 집단도 자기 자신을 우선시하며 상대를 알아내고자 한다.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 MBTI)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인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MBTI조차도 사람을 고작 4개의 선호 지표, 16가지 경우의 수로 구분해버리고, 나와 이웃을 쉽게 판단하는 일에 쓰인다.
MBTI가 유행하기 전까지 나는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이유로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편견 속에 살았다. 심지어 고등학생 때까지 A형으로 알고 지내서, 소심한 성격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다 헌혈하기 위해 실시한 혈액형 검사에서 AB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혼란스러웠고, 친구들은 ‘역시’라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렇게 바보가 되기 싫었던 나는 ‘소심한 천재’로 살게 되었다. A형에서 AB형으로 변했으니, A형 피가 강한 AB형이랄까?
혈액형 구분법보다는 과학적인 MBTI의 등장에 퍽 감사를 느낀다. INFJ라는 결과는 내가 소심한 천재라는 사실을 강화해주었다. INFJ 유형은 확고한 성향을 지닌 ‘선의의 옹호자’이자 페르소나를 잘 사용하는 등, 유독 특이한 사람이라는 특징이 있다. 가장 드문 성격 유형이라고 알려진 INFJ를 특별하고 멋진 사람으로 여겨주어 우쭐할 때도 있다. 그러나 “INFJ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는 일이 어느 순간부터 썩 유쾌하진 않다. 16가지 유형 중 하나이기에 특별한 사람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린다.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이 과연 개인주의의 문제일까?
개인주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집단주의만의 문제도 아니다. 도덕적인 개인들이 모여도 비도덕적인 사회가 된다는 라인홀드 니버 주장처럼,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이기에 자기중심적 사고가 개인과 집단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이기적인 마음이 이웃을 사랑할 대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내 경험에 비추어 개인과 집단 모두에 팽배한 이기적인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작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더 나아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조금이라도 벗겨내는 것이 개인주의 안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개인주의가 아닐까? 건강한 개인주의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내가 소중하듯 남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건강한 개인주의자를 표방하며 사는 나는 비슷한 사람들만 모인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며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나는 따듯한 개인들이 모여서 함께 이룰 따듯한 사회를 꿈꾼다. 나만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며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상대를 내 입장에서 쉽게 재단하여 꼬리표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이니까. 이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따듯한 개인주의에서 찾는다. 나는 따듯한 개인주의자가 되고 싶다.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목사님, 요즘 애들이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에요. 그냥 엮이고 싶지 않은 거라고요!”
한 친구가 내게 찾아와 말했다. 왜 젊은 세대는 서로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내가 보통의 세대 구분법상 M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그럴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변호하자면, 단순히 어른들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다. 개인주의를 잘못된 사조가 아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니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초대교회 이야기(행 2:44)만큼 무서운 성경 구절도 없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돕는 손길을 넘어 재산과 소유를 팔았다는 기록은 나에게도 적용이 될까 싶어 두려운 말씀이다(2:45). 필요에 따라 책임지면 되는데, 정말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에 서로가 엮이고 책임져야 하는 곳일까?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청소년들에게 꿈을 물으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아니, 요즘 애들은 무슨 꿈이 이렇게 소박해’ ‘왜 이리 열정이 없는 걸까’ 속상해하다가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 앞에 ‘남에게 피해나 끼치지 않고’가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어진 것일까’ 묻다가도, 더 캐묻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교회는 ‘엮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내버려두면 안 될까? 마음을 같이하는(행 2:46) 다른 좋은 방법은 없을까? 사람들이, 특별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종교로서 기독교를 반기지 않는 것은 교회가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집단을 강조하는 교회 모습이 트렌드에서 뒤처지는 듯 보여서 우려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들이 교회라는 집단이 가진 넉넉지 못한 마음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불편하다. 사람들은 종종 교회를 왜 다녀야 하느냐고 묻는다. 교회가 그저 동호회 같아 보여 던지는 질문 같다. 나아가 ‘네가 좋아서 다니는데 왜 나에게까지 강요하냐’는 말이다. 동호회치고 이렇게 강하게 권하는 곳은 없으니 불편한 것이다. 문화 현상,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도 묻는다. 특히 술 마셔도 되는지 묻는 것은 ‘한국교회가 안 된다는 답을 정해놓았음’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며, 불편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안 되냐는 질문이다. ‘예수는 좋아도 불편한 종교는 싫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내버려두라는 말에는, 냉정한 가르침으로 대응하기보다 따듯한 응원을 보내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어쩔 땐 무관심도 따듯해질 수 있다. 억지로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고, 패배감에 짓눌려있을 필요가 없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둘 필요도 있다. 답은 하나님과 묻는 이에게 있다. 그러니 교회에 왜 다녀야 하는지, 왜 술을 마시면 안 되는지에 대한 답으로 ‘그래, 가끔 빠져도 돼’ ‘뭐, 적당히 마시면 괜찮아’가 아니라, 왜 그동안 그래왔는지 소개하고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할 수는 없을까? 공동체 전통을 존중하면서 개인주의 영성을 찾아가도록 말이다.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면, 조급함 대신 넉넉함으로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예수는 좋아도 종교는 싫다는 이들이 만들어갈 기독교의 모습이 정말 기대된다.
불편함을 넘어 안전한 교회를 꿈꾼다.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이 강해지는 세상에서 교회만큼은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무조건 엮이기 싫은 것은 아니다. 요즘도 안전한 공간에서 필요에 따라 모인다. 동네 기반 어플리케이션 ‘당근마켓’은 중고 물품 거래라는 필요에 맞춰, 낯선 이들 간의 만남을 주선한다. 한 동네에 사는 또래 간 취미 모임의 장도 제공한다. 그런데 교회만큼 오늘날 ‘모든 세대’가 한 장소에 모이는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를 향한 필요는 또래, 집단의 문화를 뛰어넘는다. 그러니 감히 개인주의를 기회로 여겨본다. 교회 안에서도 따듯한 개인주의를 통해 이웃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꿀 수 있다.
‘따듯한 개인주의’는 나랑 무조건 같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건강한 개인주의는 숨 쉬기 힘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집단에 갇혀있는 이들의 외침이 이러한 개인주의를 동력 삼길 응원한다.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고, 내 안에 있는 복음이 ‘진짜’라고 믿기에, 교회가 이 외침을 들어줄 안전한 공간으로 남아주길!
따듯한 무관심이 주는 위로
“마지막 구호는 생략합니다!”
학창 시절 참 듣기 싫었던 말이다. 체육 시간에 PT체조를 할 때, 마지막 구호는 생략해야 했다. 마지막에 반복구호를 외치면, 처음부터 다시 실시한다. 마지막 구호를 외친 자는 구성원들에게 원망을 받는다. 가슴 졸이며 누군가 마지막 구호를 외치지는 않을지, 그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지는 않을지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마지막 구호 생략’이 긴장을 놓지 않도록 돕는 일이었을까?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을까? 군대에 가보니 그냥 사람을 괴롭히려고 만든 규칙이라 느꼈다. 악당을 만들어 공동체를 세우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악당 만들기도 쉽고 악당이 공동체를 망치기도 참 쉬운 일임을 느끼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서로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악당이 많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세상이 악당 같아졌기 때문인 것도 같다. 누군가 마지막 구호를 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세상에서, 모두 함께 구호를 외치는 일을 아예 멈춰버렸다.
그래도 나는 악당보다 영웅을 기다린다. 악인 10명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 더 쉬워 보여도, 의인 10명이면 소돔과 고모라를 구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믿는다. 너무 낭만적인가? 이상적인 공동체의 철학이 아닌, 현실적인 개인의 삶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럴 땐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시대정신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을 안 쓰는 아내의 따듯한 무관심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구선우
교회와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다양한 청소년과 대학생을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배트맨 크리스천》이 있고, 연세대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현대사회와 문화 속 신의 흔적을 찾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슈퍼히어로를 꿈꾸지만, 현실은 슈퍼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