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죽음 이후 신앙을 다시 생각하다 ― 보스턴 칼리지 리처드 카니 교수

[395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2023-09-27     김동규

리처드 카니는 현재 미국 보스턴 칼리지의 찰스 시릭(Charles B. Seelig)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종교철학, 해석학 분야의 대가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방인, 신, 괴물》,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재신론》의 저자로서 친숙한 카니 교수는 재신론(anatheism)이라는 독특한 신-담론 및 신앙론을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재신론이란 신의 죽음 이후 다시 신을 찾는 해석학적 신앙의 내기를 일컫는데, 이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 일정 부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는 4월 6일 부활절 휴가 기간 미국 보스턴에 소재한 카니 교수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보스턴 칼리지에서 공부하는 박효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과 제리 정(Jerri Chung) 님이 통역과 사진 촬영 등을 도와주었다.

인터뷰를 진행 중인 김동규 연구교수(왼쪽부터)와 박효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리처드 카니 교수. (이하 사진: 제리 정 제공)

- 한국에서 《재신론》 출간 이후 많은 독자들이 선생님의 종교적 배경과 신앙 여정을 궁금해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선생님을 조금 이상한 가톨릭 신자로 보기도 했고, 또 어떤 분들은 선생님이 키르케고르 같은 (실존론적) 프로테스탄트에 가깝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톨릭은 아일랜드인 다수가 믿는 주요 종교이고, 아일랜드인 정체성은 가톨릭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죠. 부모님은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이셨어요. 권위주의적이거나 쉽게 판단하거나 위계질서를 강요하거나 하지 않는 분들이셨죠. 저는 부모님과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영성체, 견진성사 등 모든 의례를 함께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일곱 살 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일곱 명의 자녀를 두셨는데, 이른 아침에 저를 깨워 작은 수녀원으로 데려가셨고, 저는 일곱 살부터 열 살 정도까지 그곳에서 식사 접대 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사는 라틴어로 진행됐는데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어떤 마법 같았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언덕을 걸어 올라가 작은 수녀원 예배당에 들러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수녀님들과 같이 촛불을 켜고, 향냄새를 맡으면서 어머니와 함께했던 순간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이렇게 매우 행복한 가톨릭적 양육을 받았지요.

어머니는 자연을 매우 헌신적으로 대하셨습니다. 말을 사랑했는데, 아일랜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자라셨습니다. 말, 강아지, 고양이, 많은 동물과 꽃들이 집 주변에 있었습니다. 부활절이나 5월이면 성모 마리아를 위한 제단이 생겨났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항상 우리를 동반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데려가 음식을 주시곤 했고요. 많은 가난한 가족들을 방문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자랐고, 그것은 사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그리스도교는 규율과 규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죠. 매우 사랑스러운, 일종의 범재신론적인 것이었습니다. 범신론이 아닌 범재신론 말입니다. 제 부모님이 그 말을 사용하지는 않으셨지만, 저는 나중에 그 말을 배웠습니다. 제가 살던 도시에는 그리스도인 형제들(Christian Brothers)이라 불리는 학교가 운영되었는데, 매우 보수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그들 중 몇 분은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학교에는 가혹한 권력과 청교도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권력의 남용이었고, 그런 권력으로 학교는 아이들 교육을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그런 위계적인 권력을 싫어하셨기에 우리를 가톨릭 학교에 보내셨지요. 당시 매우 보수적인 주교들 때문에 교구 성직자들에 의해 운영되지 않는 학교가 아일랜드 지역에 있었는데요. 이 학교들은 베네딕트회, 도미니크회 등의 수도회에서 운영했습니다.

- (선생님이 다니신) 글렌스탈 아비(Glenstal Abbey)를 말씀하시는군요!

맞습니다! 저와 제 형제들은 자연 속 하느님에 대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일만 곳에서 일하시고 놀이하시는 분이시지요. 저는 1-2년간 지역 교구 학교에서 매우 억압적인 가톨릭 교육을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이 구타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공포에 질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학대를 일삼는 가톨릭에서 그리스도교 최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네딕트회에서 운영하는 글렌스탈 아비에 갔을 때는 그 반대였어요. 우리는 수도원과 이 교회에서 매일같이 너무나 아름다운 성사를 실천하고 문학 수업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는 것을 보았고, 또 배웠습니다. 그때 베네딕트회 수도사 앤드루(Andrew) 신부님은 저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처음 가르쳐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수업에서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를 읽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으로 철학을 소개받은 경험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카뮈, 보부아르를 읽고, 또 마르크스, 프로이트, 버트런드 러셀의 신에 반대하는 논증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무신론자들을 배운 이유는 우리가 원초적인 교의적 유신론 전통에서 자랐고, 소박한 첫 번째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앤드루 신부님이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글들을 읽었을 때 당신이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러한 무신론적 주장과 설득에 자신을 노출시키기 위해 초대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적어도 방법론적으로 무신론자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미사에 계속 참석하기로 했을 때도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 때부터 저에게 종교는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생각과 태도의 형성은 제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더블린 대학교(University College Dublin)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이 학교 철학과는 여전히 위계적 성격이 강했지만, 충분히 배울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주로 성직자인 교수님들이 가르치셨는데 두 유형의 철학자들을 모두 가르쳐 주셨지요. 가브리엘 마르셀, 폴 리쾨르, 레비나스 같은 종교적 철학자들에 대해 배웠고, 또한 메를로-퐁티와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비종교적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배웠지요. 매우 해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운 좋게도 캐나다 맥길 대학교에서 찰스 테일러의 지도로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매우 개방적인 탐구를 시행하고, 물음을 던지는 사상가였습니다. 파리에서는 데리다, 리쾨르, 레비나스와 함께, 그들을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지요. 1977년 제가 폴 리쾨르와 함께 박사과정 공부를 하러 파리에 갔을 때도 철학은 대부분 무신론적이었습니다. 구조주의 운동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지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그리고 언제나 ‘나는 무신론자로 통한다’고 했던 데리다가 모두 무신론 철학자지요. 물론 데리다는 특히 후기 저작에서 종교에 대한 열정적 관심을 보여주긴 했지만요. 크리스테바와 〈텔켈〉지 그룹도 있었고, 보부아르도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메를로-퐁티를 공부했고, 무신론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대화한 이들은 무신론자 너머, 무신론 아래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운 좋은 경험이었죠.

- 공부 과정을 모두 마친 후, 1990년대에 들어서 선생님은 주로 상상과 이야기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에 초점을 맞추고 당시 한창이던 포스트모던 논쟁에 참여하시기도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이제 더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 학문 이력 초기(1990년대)에 그 말은 매우 유용한 용어였습니다. 저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물론, 리쾨르나 레비나스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었지요. 데리다는 특히 그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푸토는 미국인으로서 그 말을 좋아했습니다. 리처드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도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주요 인물들, 저도 그들에게서 배웠지만, 이들은 포스트모던 진영에 있지 않았습니다. 리오타르, 데리다, 미셸 푸코,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불렸지만, 그 진영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포스트모던 문화, 작은 이야기의 다원성,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비판 등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두 가지 길로 갈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좋다, 원하는 대로 해석하자는 무차별적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몇몇 생각은 그런 식으로 잘못 해석되었지요.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에 대한 유익한 비판이 될 수 있으며, 근대성 안에 있는 유망한 것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점에서 좋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나쁜 포스트모더니즘을 구분합니다. 다만 이제는 이 말이 그렇게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지요. 분명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중요한 교정책이었습니다. 저는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봅니다. 그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잠재적인 긍정적 비판에 너무 둔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부정적이기만 한 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경우에 알파의 신이나 단일 존재라는 거대 이야기를 제거하는 시도는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정확히 1968년 이후 권력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있었습니다. ‘금지하기를 금지하라’ 같은 것 말이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에는 아니오 하겠지만, 그런 새로운 상상력에 관련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저는 예라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실제로 관심을 둔 부분이었습니다.

- 그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이후 상상과 이야기가 선생님의 철학에 어떻게 핵심으로 자리했고, 선생님의 고유한 철학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요?

이야기는 핵심적입니다. 제가 이해한 것은 역사가 언제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어난 대로의 일로서 역사를 말하며, 또 마치 그것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상상과 이야기에 입각해서 역사를 말하는, 이중적 견지를 가집니다. 다음으로 몇몇 언어에서, 이를테면 프랑스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역사(histoire)는 곧 이야기고, 이야기가 역사입니다. 하나의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죠. 이야기에는 상상력이 개입되고, 저는 이것이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종교적 전통이든, 우리 자신의 민족사든, 우리의 과거든 말입니다. 또 우리는 단지 실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사실들의 학술적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해석과 상상의 요소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또 언제나 상징적 요소가 있습니다. 신화적인 요소도 있지요. 그리고 현실과 과거의 진실에 충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 상상력의 매개적-해석학적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요구하면서 훨씬 더 겸손해지게 됩니다. 단일한 역사는 없습니다.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역사들이 있고, 이때 우리는 약간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아시다시피, 홀로코스트, 아르메니아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 이것들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들, 그중 아주 나쁜 이야기들, 타자를, 유대인, 후투족, 아르메니아인을 악마화하는 프로파간다에 연루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과거를 따라 충격받게 하면서 과거를 구해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이야기가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야기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유일무이한 저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독자이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혹은 저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텍스트를 줍니다. 독자는 여기서 살아있는 말과 만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입니다. 우리의 상징과 신화는 일종의 집단적인 익명의 과정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또 상호 인격적입니다. 어떤 이에게 어떤 것을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발견한 기초적인 이야기의 패러다임입니다. 이것이 기초적인 이유는, 이야기가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에 저항하고 여기서 우리를 구제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적 의미에서 사실에 접근하는 과학 같은 것은 없습니다.

- 선생님은 재신론을 개진하면서 정통주의 관점에서의 신 개념, 소위 전지전능한 신으로서의 모든 것의-신(Omni-God)을 비판합니다. 이 경우 재신론과 정통주의는 양립 가능한 것인지요? 예를 들자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 (재신론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정통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고 지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또한 그는 재신론에서 말하는 약한 신, 타자와의 신적 연대 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통주의 신앙과 재신론의 양립 가능성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 관점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재신론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어떤 것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모든 형태의 정통주의에는 매우 가치 있는 가르침과 의례, 전례의 보고가 있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영적인 자기-계발과 관련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종교를 발명해낼 수 있다고 하는 태도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정통주의가 개방적인 정통주의라고 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주는 여러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의 말대로 교회는 야전병원(field hospital)입니다. 회원증 없는 이들, 세례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클럽이 아니라요. 야전병원은 그리스도가 음식을 주고 그 음식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는 그런 곳이지요. 이런 점에서 열린 정통으로서 정통주의는 곧 재신론입니다. 재신론이 이미 앞서 있었던 것이 다시 일어나고 그것이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반복이기 때문이죠. 재신론은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선택보다 앞서 일어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유신론적 계기를 가질 수 있는 무신론자입니다. 저는 여기서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고, 단지 이를 어떤 운동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불행하게도 그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개방적으로 행동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 현실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에게 해석학적 내기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지만, 저는 가톨릭교회의 방식대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분명 여성에 대한 평등한 규준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여성 성직자 기혼 사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분명 종교 간 대화와 성찬례 공유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은 프란치스코 운동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위는 지금 한 개인이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정한 다른 정통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운동은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요. 어떤 이는 고성소(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후 머무는 임시 거처를 일컫는 가톨릭의 교리적 용어. 크게 조상들의 고성소와 유아들의 고성소로 나뉜다. ― 인터뷰어)가 없다는 말도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하겠지요. 성금요일에 생선을 먹는 일도 문제가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떤 정통주의자들은 그것을 치명적인 죄로 여겼습니다. 아시다시피 어떤 의례에 집착할 때, 그런 정통주의는 나쁜 정통주의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의례와 실천과 전례를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배타주의적인 것이 되고 미신이 될 때, 즉 우리만 진리를 소유하고, 다른 이에게는 없다고 할 때 문제가 됩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괜찮고, 유대교 신자도 괜찮고, 불교도도 괜찮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추가된 공리입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교회의 교리 같은 것 말이지요. 이런 식의 교리들 중 상당수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발명된 것이고, 또한 변형되고, 변혁되기도 했습니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아이들이 고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대기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고성소 개념 같은 것도 그렇게 만들어진 교리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교리들은 아마도 어떤 특정 시점에서 상상적 가치를 가질 수 있지만, 우리는 어린아이에서 영적으로 계몽된 이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물론 은유나 상징, 신화로서 그런 교리에 뭔가 있을 수야 있지만 그런 것이 나에게 구원의 자격을 부여하거나 하는 식으로 사용되는 도그마로 고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것은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성서의 정통주의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나쁜 정통주의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통으로부터 유익함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화를 통해, 이를테면 불교를 통해, 크리슈나나 다른 어떤 종교에서 비롯한 이야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상기할 수 있지요. 저는 크리슈나의 반얀나무(Banyan)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불교 경전을 읽으면서, 저는 불교가 거룩한 것과 모든 중생들, 동물과 식물에 열려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여자를 어떻게 보셨는지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얻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성의 이야기는 경멸당하는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개도 실제로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우리에게 열어둡니다. 모든 중생은 신성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잠재력이 모든 것이 신이라고 보는 범신론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현실화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지만, 그 가능성은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 한국 독자들은 《재신론》을 읽으며 더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방인을 선별 또는 분별할 수 있는가? 선한 이방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이방인이 있습니다. 또한 선한 이가 악하게, 악한 이가 선하게 바뀔 수도 있고요. 이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단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이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물론 이것이 마음과 더불어 정신을 사용하거나 정신을 따라 마음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여권을 보여주고, 의사를 만나 혈액검사를 하고, 기타 정보를 알려주는 방법은 결코 해법이 되지 못합니다. 이야기의 플롯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알려주는 것이 있지만,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별입니다. 마리아를 예로 들어보지요. 마리아가 이방인을 마주했을 때 그녀에게는 기준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지요. 이에 대한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를 보면, 그녀가 책을 읽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정신과 이야기의 해석학적 선별이 있습니다. 그녀가 배운 유대교, 랍비 전통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그림을 보면 백합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감각이지요.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감각. 이 감각은 앞서 말했듯이 이중적입니다. 말에 대한 해석학적 선별이 있고, 또 감각을 통한 분별이 있는 셈이지요. 텍스트와 행위는 모두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결국 사랑으로 선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위험이 동반됩니다. 온갖 종류의 미친 사랑이 있을 수 있지요. 중독된 사람이나 포르노적인 것, 마조히즘과 사디즘도 있겠고요.

산드로 보티첼리의 〈수태고지〉

이런 예도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환대를 위해 문을 열 때 서있는 이가 예수인 경우도 있겠지만 잭 더 리퍼인 경우도 있겠지요? 만약 잭 더 리퍼가 서있고 그가 이미 강간을 일삼고 여성을 학대한 사실이 있다면, 그를 맞이할 경우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물과 안식처와 빵을 찾는 이방인입니다. 그에 대해 내가 모르는 바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식론으로 알 수 있는 바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인지적 내기가 아니라 마음의 내기입니다. 문 앞에 서서 노크하는 남자가 잭 더 리퍼였는데, 당신이 이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면 그 사람이 변모하여 그리스도가 되는 내기를 걸게 됩니다. 문을 두드린 이는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총이나 칼을 들고 있지도 않고, 추위에 떨며 굶주린 채로 있기에 내기를 걸게 됩니다. 분명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엘 주교처럼 할 수도 있습니다. 장 발장처럼 한 사람이 범죄자로 규정되고, 그가 음식과 물만이 아니라 은으로 된 장식도 훔치지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하며 그를 믿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는 분명 유효한 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요. 장 발장이 다시 돌아와 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위험하며 사랑도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 노출이 필요하지요.

우리는 이를 소박하게만 다룰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잭 더 리퍼 같은 이는 너무나도 많고 그리스도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되는 가능성을 살짝이라도 엿보고, 모든 이에게 그런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면, 때때로 여러분은 그런 선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나쁘게 행동한다면, 그를 떠나야겠지요. 그래서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문서화된 것처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무언가에 대한 절대적인 접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어떤 이에 대한 절대적 답을 알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선별의 물음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지만, 이 마음이 소박하거나 속기 쉬운 마음, 독단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열려있고 분별력 있는 마음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데리다는 타자를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고, 리쾨르는 타자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어렵다고 하는 편입니다.

- 우리 시대의 실제적 문제에 관한 질문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 기간 중 고통을 받았고 팬데믹 이후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멸성,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을 돌아보며 겸손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로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일을 해왔지요. 또 기후위기가 있습니다. 팬데믹이건 기후위기건, 우리 신체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린 신체를 포함해, 우리는 신체와 관련한 것들에 겸손해야만 합니다. 순수하게 물질적인 육신의(carnal)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 디지털 세계에 살게 되고, 접촉 가능성을 상실했을 때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팬데믹을 두고 사악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위에서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에이즈도 신이 보냈다고 했지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처벌하기 위해 우리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왔다고도 말하지요.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습니다. 팬데믹을 처벌받아야 할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 신이 보낸 형벌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도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처벌하고 희생시키려고 바이러스를 보내는 그런 신은 없습니다. 팬데믹은 팬데믹입니다. 팬데믹 중에, 팬데믹 이후에 발견한 신은 우리를 팬데믹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신이고, 그 기간 우리와 함께하는 신입니다. 마치 신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구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긴 시간 감사합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한국에 계신 독자분들께서 제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귀 기울여주시고, 여러 반응을 주신 일을 영예롭게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과 한국의 독자들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고 답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큰 감명을 받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학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행 김동규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