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얼굴

[396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3-10-31     이한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러시아정교회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한 여인이 조시마 장로를 찾아와 죄를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병들어 눕자 그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괴롭힘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어떤 일’을 했다. (아마 병든 남편이 죽음에 이르도록 방조했던 것 같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영혼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회개하면서도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그런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그런 큰 죄를 인간은 결코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죄가 가능하겠습니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115쪽)

진실한 회개와 무한한 사랑을 전하는 조시마 장로에게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진실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면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회개가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오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회개로 이끄는지, 여인은 묻지 않는다. 말없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에 밑줄 그으며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지길 기대했다.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 교내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학교 학생이던 딜런과 에릭은 총기를 난사해 친구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고 그들도 자살했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타임〉지는 가해자 2명과 희생자 13명의 사진을 ‘이웃집 괴물’이란 헤드라인과 함께 표지에 실었다. 자살한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17년 뒤 이 사건과 아들을 회고하며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가해자의 어머니는 사건 직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전한다.

마을에 임시 조문소가 세워졌다. 대충 깎은 나무십자가 열다섯 개가 세워졌다. 딜런과 에릭을 포함해 죽은 사람 한 사람당 하나씩이었다. 딜런과 에릭의 십자가는 바로 쪼개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어떤 교회에서 자기네 땅에 기념식수 열다섯 그루를 둥그런 모양으로 심었는데, 이 가운데 두 개가 쓰러지는 것을 경찰도 교회 사람들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딜런과 에릭을 애도하거나 기념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물론 이해했다. 그렇지만 억제되지 않은 분노의 폭발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반비, 155쪽)

총기 살인범 두 사람의 십자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무를 쓰러뜨린 사람들을 나도 이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등하게 애도하고, 범죄와 희생을 같은 자리에서 기념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다. 그런데 열다섯 개의 십자가를 세우고, 열다섯 그루의 나무를 교회에 심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살인자에게도 십자가는 유효하고 교회 안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라면 몇 개의 십자가를 세우고 몇 그루의 나무를 심을 것인가. 희생자들을 온전하게 애도하고 기념하려면 13개의 십자가와 나무가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쓰레기통에 들어간 두 개의 십자가를 어딘가에 세우고, 뽑힌 나무 두 그루를 교회 어느 구석에라도 심고 싶은 마음도 버릴 수 없다.

 

작년 12월, 영화 〈밀양〉(2007)의 각본집이 출간되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15년 만에 나온 각본집에는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풍성한 자료들과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실려있다. 신애가 교도소에서 유괴 살인범 박도섭을 면회하는 장면을 읽다가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만 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이 부분은 삭제되어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려고 찾아온 신애에게 박도섭은 이렇게 말한다.

인제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사형이 돼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장기기증까지 다 해두었심더. 이 죄 많은 인간의 몸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거라 가치 있게 쓰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했심더. (이창동, 《밀양 각본집》, 아를, 136쪽)

〈밀양〉의 관객들은 피해자 앞에서 용서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태연하게 말하던 박도섭을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은 박도섭을 예로 들며, 믿기만 하면 용서를 제공하는 기독교의 값싼 구원을 비판했다. 이때 문제는 위선적인 회개와 자기중심적인 셀프 용서였고 이 문제의 답은 진실한 사과와 반성이었다. 하지만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따르면, (원작 소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가해자 김도섭도 마찬가지로) 박도섭은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자기 몸이 가치 있게 쓰이길 바라며 장기를 기증했다. 이것이 피해자에게 연락하거나 보상할 수 없는 가해자의 최선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이 박도섭의 이 대사를 최종 편집에서 삭제한 이유는 기독교를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이 대사가 있으면 박도섭의 회개가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 더 분명해지고, 그러면 박도섭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라는 기독교 근본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이 용서하지 않아도 용서하며,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평화를 준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하냐’는 신애의 절규에 공감하면서도, 피해자의 용서가 전제 조건이 되면 아무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난감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노역하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는 독일군 카를을 만난다. 카를은 시몬 비젠탈에게 자신이 무고한 유대인 300명을 학살하는 데 가담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좁은 집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렀고,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그 후 전장에서 큰 부상을 당한 카를은 죽기 전에 용서받으려고 같은 유대 민족에게 죄를 고백했던 것이다. 죽어가며 용서를 구하는 학살자 앞에서 시몬 비젠탈은 그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용서한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동족을 무참히 죽인 나치를 여전히 증오해야 할지, 자신에게 피해자를 대신해 용서할 권리가 있는지 고민한다. 결국 시몬 비젠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방을 나왔고 다음 날 카를은 용서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시몬 비젠탈은 전쟁 후 자신이 침묵했던 용서에 대한 답을 여러 사람에게 구했고 53명의 대답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뜨인돌)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에는 용서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실려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답을 보냈다는 건 용서에 대한 일치된 결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은 시몬 비젠탈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대신 용서해줄 수는 없다.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600만 명이 받은 고통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어떤 한 사람이 대표해서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심지어 하느님조차도 인간이 당신을 향해 지은 죄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 지은 죄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284쪽)

하나님조차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은 죄는 어쩔 수 없다는 저명한 유대 신학자의 말이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용서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성경은 용서의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 서있던 다윗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나타난 때는 우리아를 살해한 뒤였다.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우리아를 속이려 했을 때, 우리아를 죽일 흉계를 꾸밀 때 하나님은 침묵했다. 그때였다면 다윗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며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에게는 범죄를 되돌릴 방법도, 용서해줄 피해자도 없었다. 용서받을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 된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시편 51:4) 고백했다. 다윗이 하나님께만 지은 죄가 있다. 우리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침묵하게 만든 죄다. 하나님은 다윗이 주께 지은 죄를 용서했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아에게 지은 죄를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다윗은 오랜 세월 처절하게 죄의 대가를 치렀고 자기 가문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흉계와 살인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아에게 저질렀던 죄를 떠올렸을 것이다. (스스로 다윗에 빗대 ‘나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 하는 사람들은 우리아와 달리 피해자가 살아있고, 다윗이 용서받은 후에도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것 같다. 어쩌면 가해자가 가장 두려워할 일은 다윗처럼 용서받는 것이다.)

성경은 다윗에게 충성했던 용사들을 기록하는데 이 공신록에 ‘헷 사람 우리아’의 이름이 있다(역대상 11:41). 이 기록은 우리아에 대한 공식적인 명예 회복이면서 다윗을 충성스러운 신하를 살해한 왕으로 역사에 남기는 일이었다. 다윗의 기록은 신약성서로도 이어진다. 우리는 신약성서 첫 장에서 예수님 족보에 기록된 유일한 이방인 남자, 우리아를 만난다.

 

가해자에게는 저마다의 얼굴이 있다. 볼 때마다 표정이 다르고 인상이 변해 어떤 얼굴이 진짜 가해자의 얼굴인지, 어떤 얼굴이 용서에 어울리는 얼굴인지 모르겠다. 가해자의 얼굴에서 염치없는 표정과 무정한 인상을 보고 더 상심하더라도, 가해자의 얼굴에서 다른 피해자 옆에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고 놀라더라도, 가해자의 얼굴을 응시할 때 비로소 용서라는 불가능도 시작될 것이다. 정말 두려운 건 가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얼굴 없는 가해자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는데 가해자는 없고 슬프고 답답한 얼굴, 피해자의 얼굴만 보인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