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원
[396호 정원의 길, 교회의 길]
‘잎눈이 검은 걸 보니 안개나무가 맞구나.’ 코끝이 알싸한 겨울 아침, 뒷마당 나무를 살피다가 잎이 다 떨어진 관목에 눈길이 갔다. 집 근처 수목원에서 해마다 열리는 식물 장터에서 데려온 나무다. 유럽안개나무(Cotinus coggygria)를 개량한 품종으로 몽글몽글 피어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꽃과 짙은 자색의 고혹적인 잎사귀가 매력적인 수종이다. 이 나무를 보니 4년 전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열린 전국 대학생 조경 대회에 참가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나무 이름 알아맞히기’(Woody Plant Material Identification) 종목에 출전했다. 넓은 강당에 꾸려진 대회장에 들어서니 테이블 위에 나뭇가지들이 놓여있었다. 화분에 담긴 서너 종의 관목과 솔잎이 무성한 두어 개를 제외하면 모두 그저 마른 가지들이었다. 참가자들은 나무 50종을 차례로 지나면서 답안지에 학명과 일반 명칭을 적어야 했다. 어떤 나무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마침 전날 학교에 딸린 수목원을 함께 거닐면서 지도교수가 건넨 한마디가 기억났다. ‘안개나무는 잎눈이 까맣다.’ 그렇게 한 점을 벌었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정원은 서서히 갈색으로 변해간다. 화려한 색상과 독특한 질감을 뽐내던 나무들도 그 영화로움을 내려놓을 때다. 나무들에게 이 계절은 벌거벗은 채로 숨만 쉬는, 어쩌면 일시적인 죽음처럼 느껴진다. 잎도 꽃도, 나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다 상실한 채 무명씨처럼 살아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계절은 정원사들이 나무 종류를 알아내는, 즉 동정(同定, identification)을 훈련하는 최적의 시간이다. 꽃과 잎은 수종을 식별하는 중요한 단서지만, 때로는 너무 다양해서 오히려 혼란스럽고,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기간도 짧다. 나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가난한 계절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나무껍질의 무늬, 그 위에 촘촘히 새겨진 피목(皮目)1), 잎이 떨어져 나간 흔적의 모양과 그 속의 관다발 배열, 잎눈의 모양, 그걸 덮은 비늘의 수, 잎눈이 어긋나있는지 마주나있는지, 겨울나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관한 단서들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나무 공부를 시작하면, 나무에 지문(指紋)과도 같은 이 실마리들을 관찰하느라 겨울이 바쁘다. 이뿐 아니라, 나무의 진짜 아름다움은 겨울에 드러난다. 본연의 수형(樹形)은 무성한 잎을 다 떨군 후에야 선명해진다.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무질서한 듯 규칙적인 줄기의 분화, 잔가지들의 미려한 곡선, 확장과 겹침, 하늘과의 경계에 드리워진 실루엣. 수종마다 전체적인 수형과 가지들이 분기하는 모습이 제각각인데, 겨울 숲에 들어선 나무들이 펼치는 직선과 곡선의 향연은 마치 한 편의 교향곡과도 같다.
11월이 되면 정원사들은 월동 준비로 부산하지만 식물들은 의연하게 겨울을 준비해왔다. 뿌리를 비롯한 여러 조직 속에 양분을 비축하고, 때에 맞춰 잎을 떨구면서 불필요한 대사 작용을 멈춘다. 낙엽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들은 잎자루와 가지의 세포벽 사이에 분해 효소를 집중하여 탈리층(脫離層, abscission layer)을 만들고 능동적으로 잎자루를 잘라낸다. 건강한 나무라야 낙엽을 과감하게 털어낸다. 병든 나무, 생리적인 문제가 있는 나무는 낙엽이 잘 지지 않는다. 11월의 식물원은 나무들이 벌이는 탈리의 마법에 빠져드는데, 바로 낙엽과의 전쟁이다.
백 년 수령의 수백 그루 노거수들이 쏟아내는 낙엽의 양은 엄청나다. 서너 명이 송풍기를 등에 메고 잔디밭에 달라붙은 잎들을 떼어내면 뒤쪽에서 이동형 송풍기가 강한 바람으로 낙엽들을 한 방향으로 날려 보낸다. 넓은 잔디밭을 청소할 때는 트랙터에 매달린 초대형 송풍기가 동원되기도 한다. 한쪽으로 날려 보낸 낙엽들을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쌓으면, 흡입기를 장착한 트럭이 지나가며 빨아들인다. 낙엽으로 가득했던 잔디밭은 문자 그대로 초록빛 카펫처럼 말끔해지지만, 내일은 내일의 낙엽이 떨어질 것이다. 두 달 동안 20여 명의 부지관리팀(Arboretum and Ground) 정원사들이 총출동해서 거의 매일 낙엽 제거 작업을 펼친다. 잎들에 가려졌던 하늘이 보이고 가지들의 윤곽이 드러날 즈음 이 전쟁은 마지막 고비를 맞이하는데 바로 미국풍나무(Liquidambar styraciflua) 열매 제거 작업이다. 식물원 도서관 동편 잔디밭은 300년 수령의 거목을 비롯해 다수의 미국풍나무가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치고 서있다. 풍나무 열매는 팥죽 경단 크기에 구형인데, 표면은 가시 같은 돌기가 빽빽하게 덮고 있다. 이 돌기들이 잔디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어서 날려 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열매는 흡입 장치로 빨아들일 수도 없기에 일일이 삽으로 퍼서 작업용 트럭에 싣는다. 이 열매는 쉽게 썩지 않아서 퇴비로 사용하지 못한다. 1월경 풍나무 열매까지 말끔하게 치워지면 낙엽과의 전쟁은 일단락되고, 곧이어 눈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공존의 계절
식물원만큼은 아니어도, 가을 청소(fall clean-up)는 미국 주택에서 치러지는 연례행사 중 하나이다. 집집이 아름드리 참나무류나 메이플(maple)이라 불리는 미국 자생 단풍나무가 마당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 그루만 있어도 낙엽이 엄청나게 쌓인다. 이 시기에 가지치기도 많이 하는데 잘린 가지들은 금세 수북하게 쌓인다. 정원에서 나온 마른 식물들도 한몫한다. 은퇴한 노부부 가정이나 일이 바쁜 사람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로 조경업체를 이용한다.
죽은 식물들과 낙엽을 싹 걷어내고 새 멀칭재를 깔아 말끔하게 단장했다면 겨울맞이가 끝났다는 뜻이다. 일을 마친 집주인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표정은 의기양양해 보인다. 정원은 언제나 비교 대상이고, 사람들은 늘 옆집을 의식한다. 장비를 동원해서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 기준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동안, 사람들은 겨울 정원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그 속에 내재된 생태적인 균형을 날려버리고 만다. 가을에 수확 대신 청소라는 말을 쓰는 것은 미국의 주택 정원이 안고 있는 역설 중 하나다.
그런데 생태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늦가을의 말끔한 정원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낙엽을 그대로 두세요(Leave the leaves).’ 정원에 쌓인 낙엽을 그냥 두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낙엽뿐 아니라 생을 다한 초화류의 잎과 줄기들, 특히 꽃대와 씨앗들을 그대로 두라고 조언한다. 겨우내 배고픈 새들의 먹이로, 곤충들의 동면 은신처로 요긴하기 때문이다. 낙엽들은 겨울철 토양의 수분과 온도를 유지하여 식물의 뿌리가 얼어 죽는 것을 막아줄 뿐 아니라, 곤충과 그 유충들, 지렁이를 비롯해 유기물을 분해하여 토양을 개량하는 각종 절지동물과 미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처가 된다.
생태적 가치 외에도 겨울에 남겨진 식물들의 중요한 역할은 문자 그대로 겨울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주의 정원가들을 중심으로 갈색 미학에 대한 담론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마른 식물체들은 겨울 날씨와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겨울바람이 아직 차갑던 3월의 첫날 나는 인턴 근무를 시작했는데, 거기서 투명하도록 빛이 바랜 떡갈잎수국(Hydrangea quercifolia) 꽃잎이 햇빛을 머금은 모습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겨우내 눈과 바람 속에서 본래의 색을 다 잃어버린 후에 빛으로 새로 태어나는 광경이었다. 뉴욕의 도시 정원 하이라인에는 우리나라 원산의 새풀(Calamagrostis brachytricha)이 주제 식물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리는 이삭들이 허드슨강 뒤로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은 차갑고 메마른 맨해튼 도심 풍경을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놓는다. 추명국 또는 아네모네라 불리는 대상화(Eriocapitella × hybrida)는 꽃자루의 독특한 곡선과 그 끝에 매달린 조그만 구형 씨방들이 어우러져 정교한 금속 공예품 모습으로 겨울을 보낸다. 이 밖에도 냉초, 들국화, 베르가모트, 에린지움, 알리움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그라스 등 가을 청소 때마다 잘려진 정원 식물들이 이제는 겨울 정원의 주역으로서 생태적,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정원 생태계의 한 해 소산물을 말끔하게 제거하는 가을 청소 관행은, 정원이 소유와 과시의 수단이었던 낡은 사상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필요한 것은 수확하고, 생태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는 일이 자연이 가르치는 월동 준비의 원리다. 겨울은 이렇듯 공존의 기술을 발휘하면서 열어가는 계절이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고 조금 어색하게 번역이 된 이 단어는 춥고 배고픈 계절을 견뎌야 하는 생태적 이웃들을 배려하는 정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개념이다.
생명의 계절
봄날의 향연이 계절의 시작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잔치는 대부분 지난해 가을과 겨울부터 준비된다.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우는 크로커스, 수선화, 튤립 등 구근식물들은 5도 이내 저온에 4주 이상 노출된 후에 생장점이 활성화된다. 6월의 주인공 수국의 꽃눈은 겨울 냉기에 노출되어야 이듬해 꽃을 피울 수 있다. 수많은 씨앗들은 혹독한 겨울을 거쳐야 발아 억제 장치가 해제되면서 싹을 틔운다. 겨울은 생명의 순환 주기에서 결코 단절이나 정체가 아니다. 다만 식물 생존의 조건 중 그 계절이 제공하는 것들이 다소 혹독하게 여겨질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 시련 또는 연단의 과정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씨앗들에게 출발신호다.
식물은 겨울을 스스로 정의한다. 생장에 필요한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냉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절묘한 타이밍을 겨울의 시작으로 정한다. 나무들은 점점 짧아지는 낮의 길이를 감지하여 그 시점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내고, 광합성을 비롯한 여러 대사 작용을 멈춘다. 그리고 혹한에 대비할 수 있는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낸다. 나무들이 겨울의 끝을 선언하는 메커니즘도 신비롭다. 잎눈과 꽃눈은 빛 대신 온도를 감지한다. 잎눈과 꽃눈에서는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한 보호 장치가 작동하는데, 일정 기간 냉기를 거쳐야 이 장치가 해제된다. 나무의 눈은 축적되는 온도를 감지하여 언제 눈을 터뜨릴지 결정한다. 이 경우에도 첫서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광합성을 위한 기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시점을 찾아낸다.
온대림을 구성하는 나무들이 겨울을 맞이하고 보내는 이 신비한 과정은 서식지의 기후와 정교하게 조화를 이룬다. 나무들의 겨우살이는 동일한 생태계 속에서 더불어 사는 생물들의 생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수많은 곤충들이 알이나 유충의 형태로 겨울을 나는데, 이들이 부화하거나 깨어나는 시점은 이들이 먹고사는 식물의 잎눈과 꽃눈이 터져서 자라기 시작하는 시기와 완벽하게 동기화된다.
겨울의 생태계가 이렇게 오묘하다. 현미경으로나 관찰이 가능한 미세한 공간 속에서 우주 스케일의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 널찍한 도시 정원에서도, 손바닥만 한 마당 정원에서도 이 신비로운 역동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도시의 과도한 빛과 열에 의한 교란, 특히 겨울의 길이와 기온을 서서히 바꾸는 기후변화가 이 균형을 허물고 있다. 대개 곤충의 부화 시기는 잎눈에 비해 겨울 기온의 변화에 덜 민감하다. 겨울철 기온 상승으로 잎눈이 먼저 터져서 잎이 자라게 되면 새순을 먹고 자라는 유충들은 먹을 것을 잃고 만다.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생태계 혼란으로 확대된다.
나무들이 스스로 겨울을 정의하고 그 계절을 향유하는 독특한 방식들을 갖고 있더라도, 겨울은 가혹한 계절이다. 나무들은 춥고 건조한 대기와 꽁꽁 얼어붙은 토양, 햇빛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 표면의 극심한 온도 차이를 견뎌야 한다. 어린 가지는 얼어 죽기 쉽고,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토양은 금세 갈라져 차가운 공기에 뿌리를 노출한다. 단풍나무의 경우 남쪽을 향한 나무 표면은 강한 태양열에 데워졌다가 얼기를 반복하면서 껍질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피해를 자주 입는다. 당분이 듬뿍 저장된 나무껍질과 새 가지들은 겨울철의 배고픈 짐승들을 피하기 어렵다.
어떤 나무들은 혹독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자구책을 만들었다. 하얀 수피가 아름다운 흰자작나무(Betula papyrifera)는 껍질 표면의 하얀색으로 강렬한 태양광을 반사하여 안쪽의 연한 조직을 보호한다. 침엽수로 가득한 북미 냉대림 속에서 노란색 단풍으로 아름다움을 더하는 북미사시나무(Populus tremuloides)는 옅은 녹회색 수피가 돋보이는데, 나무껍질에 들어있는 엽록소 때문이다. 겨울철 맑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을 활용하여 나무껍질에서 광합성이 일어나고, 이 에너지로 극한의 계절을 살아낸다. 나무껍질 세포들이 동결을 방지하는 방식도 대단히 복잡하다. 멈춘 듯한, 죽은 듯한 겨울나무들이 그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 속사정은 이렇듯 경이에 가깝다.
안식의 계절
7년 전 북위 42도의 뉴욕주 알바니에 정착했을 때, 처음에는 삭막하고 긴 겨울이 부담스러웠다. 한국의 지인들이 물어볼 때마다 개마고원과 위도가 같은 곳이라고 얘기해줬다. 이곳에서의 첫눈은 10월 말에 맞았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썰매를 탈 정도로 많이 쌓였다. 둘째 아이의 축구 경기가 예정되었던 4월의 첫 일요일에도 눈이 왔는데, 경기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늘 조용한 동네에 활기가 도는 때라고는 잔디를 깎고, 눈을 치울 때였다. 나이 드신 한국 분들은 이곳의 겨울이 힘들다고 하셨고, 많은 사람이 은퇴 후에는 남쪽으로, 조지아나 플로리다로 가서 살겠다고 했다. 우울증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이곳의 겨울 풍경에 빠져들었다. 아파트 창밖으로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아침 햇살이 금빛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눈밭에는 어김없이 사슴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이듬해 우리는 집을 장만했는데, 벽난로가 있었다. 겨울마다 땔감을 장만하던 시골 풍경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나무를 사다 쓰다가, 얼마 후 커다란 도끼를 장만했다. 목재로 된 이층집에서 한국 온돌방의 온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난방비는 무척 비쌌다. 추운 날 우리는 장작을 쌓아놓고 벽난로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폭설로 스쿨버스가 다닐 수 없는 날은 새벽에 휴교를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왔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네댓 살 때 시골집에서 아궁이에 구운 감자를 처음 맛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둘째 아이는 여기서도 겨울마다 구운 감자를 주문한다.
아이들은 스케이트와 스키로 긴 겨울을 바쁘게 보냈다. 뉴욕주 정부 청사 단지 중앙에 겨울마다 야외 스케이트장이 열린다. 고풍스러운 주청사 빌딩과 이름 그대로 달걀 모양의 콘퍼런스 센터인 에그(The Egg), 뉴욕 주립 박물관 건물에 둘러싸인 도심 속 야간 스케이트는 운치도 남달랐다. 영하 10도 가까운 날에도 아이들은 볼이 빨개지도록 스케이트를 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낯선 곳에서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춥고 긴 겨울은 어떤 도전일까 긴장도 되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아이들은 남위 8도 열대의 섬에서 1년을 보냈었다. 보르네오섬 모래밭에서 두꺼비집을 만들며 놀던 남매는 여기서 이글루를 만들며 놀았다. 가장 혹독했던 코로나의 겨울에 입시를 준비했던 첫째 아이는 지난 9월 대학 생활 3년 차를 맞이했고, 겨울이면 맨해튼 빌딩 숲에서 스케이트를 즐긴다. 친구 하나 없던 미국 학교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가끔 울먹이기도 했던 둘째 아이는 겨울마다 학교 친구들과 스키를 타러 다닌다. 폭설이 내릴 때마다 앞마당 눈을 치우느라 기진해지고, 차가 눈길에 빠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나무가 많은 이 동네는 폭설로 인한 정전도 잦았고, 인터넷이 끊기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했고, 우리는 가족으로 단단해졌다.
성도의 겨울은 어떻게 정의할까. 체감하는 환경의 가혹함이 어떠하든, 겨울은 자아와 직면하는 시간이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오히려 동정의 실마리들을 가장 다양하게 제시하듯이, 모든 것을 상실했을 때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미국에 와서 보낸 첫 2년은 사계절이 겨울 같았다. 한국에서의 학력과 경력은 아무 쓸모가 없어 보였고, 직업과 수입이 없는 삶 속에서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를 위로한 건 오히려 겨울이었다. 북위 42도의 길고 추운 겨울은 겪어보지 못했던 가혹함이었지만, 그 속에서 적응하며 삶을 세워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삶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지역 대학에 편입해 나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무들의 겨울 생태(winter phenology)는 나무 공부가 아니라 인생 공부가 되었다.
신이 침묵할 때, 마음이 가난할 때, 감정과 사유 속에 고뇌가 가득할 때 우리는 겨울의 빈 들판에 선 자작나무와도 같은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나무는 죽지 않았다. 생명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하고, 정교한 보호 장치들이 돌아간다. 줄기의 수피와 가지의 선들이 드러나고, 잎눈과 엽흔(葉痕)2)과 그 상처 속의 미세한 관다발 조직의 패턴까지 나타난다. 나무의 가장 나무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영혼의 겨울도 그렇다. 광야에 선 실존이 자신에게 그리고 신에게 가장 정직하다. 이때가 존재의 출발점이고, 우리는 여기서 긴 여정을 위한 채비로서 안식을 경험한다.
1) 껍질눈이라고도 부른다. 나무껍질에 점점이 흩어져있거나 가로로 줄지어있는 미세한 구멍이다. 나무의 호흡기관으로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낸다. 피목은 수종마다 독특한 패턴을 보인다.
2) 낙엽이 진 후 가지에 남은 잎자루가 붙어있던 흔적을 말한다. 원형부터 초승달까지, 심지어 원숭이 얼굴 등 수종마다 다양한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나무 종류를 식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성희
미국 뉴욕식물원의 3년 차 가드너이다. 식물원 내 수목원 및 부지관리를 담당하는 정원운영센터(Horticultural Operations Center)를 거쳐 지금은 식물 번식과 보존을 담당하는 놀런 그린하우스(Nolen Greenhouses)에서 근무 중이다. 북미 자생식물을 소재로 한 자연주의 정원디자인을 추구하며, 뉴욕주 북부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정원 식물을 발굴 중이다. 뉴욕의 주도인 올바니(Albany) 소재 올바니한인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