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을, 그 입구라도 찾아낼 때까지

[396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김혜린: 《불의 검》

2023-10-31     박혜은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중에서1)

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A대기업 계열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에서 먹고 놀다가 밤이 되어 씻고 누우니 ‘현타’가 왔다. 일에 치여 바쁘게 살다가 인공적으로나마 조성된 자연을 벗 삼은 깨끗한 리조트에서 쉬는 삶이 행복일까? 보통 ‘이게 행복이라는 것인가’ 되새길 때는 문득 평범한 순간 행복을 느끼며 던지는 아름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레저 생활에 별 감흥이 없고 정상가족 문화에 깊은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는 리조트의 나날들이 지루하고 회의적이었고, 그때 이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런 게 행복인가?

남이 치워주는 일시적 공간에서 남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깨끗하게 정리된 자연을 향유하며 남들 다 누린다고 믿는 평범한(!) 쉼을 누리는 삶. 편안한 레저 시설 안에서 딱히 맛있지는 않지만 차려놓은 것 많은 메뉴의 음식을 골라 먹고 종류별로 구획이 나뉜 숲을 거닐며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워터파크에서 놀며 휴가를 보내는 삶. 바비큐를 해 먹으며 불멍을 하고 때때로 음주 가무를 즐기며…. 하아… 글로만 써도 피로가 몰려오는 나 극내향형, 레저 공포인. 리조트에 와서 행복의 의미를 탐색하는 나. 왜 여기에 있지?

아마도 A대기업 임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 같은 그곳에는 온통 연인과 핵가족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룬 중산층 이상의 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닥스류 브랜드를 차려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까지 한 단위를 이룬 가족이 ‘어머니~’ ‘아버지~’를 연신 부르며 어색한 휴가를 즐기는 풍경. 아파트 브랜드 ‘스위첸’ 광고가 추구하는 가족 문화 ―가족을 이룬다는 건 ‘문명의 충돌’마냥 괴롭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 를 은연중 깔고 있는 리조트에 불청객 같은 느낌으로 끼어 그들을 관찰하며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진공상태로 편안한 생활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이었던가. 연휴를 맞아 야심 차게 쉬고 왔는데 영혼이 한층 더 시들해졌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의 글 중 잊지 못할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요단출판사, 2000년) ‘서문’을 쓰며 언급한 북미 대륙 극서 지방 탐험가 존 뮤이어(John Muir)에 관한 이야기다. 1874년, 유바강 지류 계곡에 자리 잡은 친구의 오두막을 찾았던 뮤이어는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미송나무에 오른다. 험악한 기후를 대비해 지은 안전한 오두막이 주는 안온함 따위는 뮤이어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산마루에 올라, 광풍의 변화무쌍한 소리와 색깔을 이왕이면 더 극적으로 맛보게 해줄 나무를 찾았다. 그는 마침내 찾아낸 거대한 미송나무에 올라갔다. 꼭대기 우듬지까지 올라가서 필사적으로 나무를 붙들어 안은 채 온 몸으로 폭풍을 견뎌냈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위태로운 천공에 올라 칼날 같은 바람에 온 몸을 내맡겼는가? 날씨를,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위대한 날씨를 맛보고자 했다. 신께서 내뿜는 그 원시적 생명력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체험하고자 했다.”(13쪽) 피터슨은 뮤이어가 보여준 모습을 기독교 영성의 표상으로 이해했다. 위대한 날씨 앞으로 나아간 탐험가처럼 창조주와 근본적으로 대면하는 영적인 삶의 표상.

피터슨이 목회자로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일곱 달 동안 도스토옙스키와 지속적으로 교제한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다. “무질서하고 산만하지만 영적인 창조력이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부재와 임재라는 양면에 걸쳐 하나님을 실감하는 유진 피터슨.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열정에 사로잡혀 사는 삶”을 배우고 그 삶을 지켜낼 수 있었다니 정말 따라 하고 싶은 장면이었다.2) 내게도 그런 작품이 하나 있다. 피터슨의 삶에 영감을 주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작품, 존 뮤이어가 맛본 폭풍우 몰아치는 위대한 날씨 같은 작품. 시들시들해진 영혼에 내리는 처방 같은 순정만화, 김혜린의 《불의 검》이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이야기 속으로

아직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 연맹국 체제의 고대이자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 김혜린의 《불의 검》은 1992년 처음 〈댕기〉에 연재되다가 2004년에야 12년 만에 단행본 형식으로 완결된 작품이다. 그렇게 완결되기까지 몇 번을 손에 잡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시대 배경과 남녀 주인공의 어긋나는 만남 같은 속 터지는 전개, 만화치고는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인 글이 많아 깊이 음미하지 못하고 여러 번 집었다 놓기를 반복했던 작품. 완결 후, 마음먹고 한자리에서 작품을 쭉 읽어 내려간 후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2023년 현재까지 내가 가장 많이 펼쳐본 순정만화로 등극한 상태지만.

1992년에 시작된 《불의 검》에는, 이후 수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될 원형 같은 이야기가 곳곳에 배치되어있다. 신분 높은 남자 주인공이 기억을 잃고 평범한 삶에 흘러 들어와 신분 낮은 여자 주인공을 만나 사랑하지만 다시 이전 기억을 되찾아 평범한 시절의 사랑을 잊어버린다. 여자는 전쟁 상대인 카르마키 부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남자와 헤어지는데 하필 카르마키 야장 귀족의 여자가 된다. 그사이 남자가 기억을 되찾은 줄도 모르고 그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여자는 자기 부족인 아무르족으로 돌아간 후에야 남자가 아무르를 대표하는 전사 ‘가라한’인 걸 알게 되고, 그가 자기와 사랑했던 반년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달파한다. 가라한 아사가 감히 자기가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인물임을 알고 그의 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서만 바라보는 여자, 아라. 지금 식으로 12부작 드라마라면 8회 말쯤 서로의 존재를 알고 애틋한 재회를 하는 그런 전개!

원래 야장의 딸이었던 아라는 야장 귀족 수하이바토르 집에서 죽음을 생각할 만큼 괴로운 포로 여성으로 살지만 오직 산마로(기억을 잃은 시절 아사 이름)를 만나기 위한 열망 하나로 카르마키 야장에서 철검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며 삶의 의지를 벼린다. 자신이 만든 철검 하나 지니고 탈출한 아라는 자기 부족 아무르에 철검, 그러니까 불의 검을 가져다주는 인물이 된다.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하는 여성이지만 자기가 가라한의 원래 아내이며 기억을 잃고 거의 죽을 뻔한 가라한을 살려낸 사람이란 사실을 숨긴다. 가라한의 앞길을 위해 한없이 자기를 숨기고 낮추는 아라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카르마키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서 더욱 아사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렇게 《불의 검》에는 한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 가라한 아사와 야장녀 아라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무르족과 카르마키족의 고대 전쟁 서사,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들의 캐릭터 향연, 권력과 안정을 탐하다 망해버린 부족의 다음 세대가 새롭게 부족을 재건하는 분투 여정, 고대 부족 세계의 치열한 정치 다툼으로 들여다보는 권력의 본질, 전쟁 속에서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명력, 서로를 돌보는 임시 공동체에서 피어나는 우애 등 폭풍우 치는 광야의 밤처럼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빼곡하다.

그런데… 아라와 아사가 서로를 다시 알아보고 나누는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와 흥미로운 전쟁 서사와 치열한 정치 싸움보다 더 놀라운 역동이 이 작품 안에 흐르고 있었으니, 다시 읽을 때마다 내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이야기는 바로 여성들의 연대 서사였다.

여성들의 연대 서사

작품 속 여성들의 연대는 여러 모양으로 얽혀있는데 아무르족 신녀 소서노를 중심에 두고 연대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다. 여야장 아라가 여자 주인공이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여성’ 이야기는 아무래도 소서노에게 무게중심이 있는 듯하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두 번째 아내에게서 이름을 가져온 소서노를 작가는 나라의 무당이자 고대 시대 여성 지식인, 정치가라고 말했다.3) 이렇게 대단한 소서노지만 실은 그는 나라와 신궁을 잃은 신녀이자 끝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가장 인간적인 고뇌를 보이는 구도자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가라한 아사를 사랑하지만 부족의 땅을 되찾아야 할 사명을 지닌 신녀로 키워진 소서노는 그 마음을 오롯이 품은 채 마리한(왕) 천궁과 가라한 아사와 함께 부족을 일으켜 세우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한다. 자기 삶을 염결히 지켜 백성을 돌보고 마리한의 정치적 조언자나 가라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면서. 때로 아사를 향한 마음에 괴로워하지만 또 다른 가여운 여인이자 아사의 단 하나의 사랑인 아라를 축복하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이 거친 세상에서 한갓 이름 없는 들풀로 살다 서럽게 스러지는지…! 조금 외롭다 해서 유난한 불행은 아닌 것이야. 삶에 대한 이 진지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나는 그의 거짓 없는 호의 앞에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거야….
― 《불의 검 2》(신장판), 200쪽(소서노의 혼잣말).

신녀로서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진지한 자부심은 소서노를 지탱하는 힘이다. 무엇보다 사람으로서 그리고 신녀로서 해야 할 가장 앞선 일이 “흐느낌들에 힘써 귀 기울이는 것…. 손목이 아프도록 손 내미는 것…”이라고 믿으며. 자기만 바라보는 마리한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 마리한의 원비이자 사촌 동생 비파녀를 큰 품으로 품고 그의 딸 소희 태마노 공주를 키우고 이국에서 온 차비 여희까지 돌본다. 그렇게 임시궁은 소서노를 중심으로 여인들이 위로를 주고받고 서로를 키워내는 장이 된다.

아라가 아사를 향해 보인 인내와 사랑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아라의 강인함을 제대로 알아본 이도 소서노다. 그 흔한 배제와 질투도 없이 아라를 지지하면서 아사를 사랑하는 자기 마음의 고통은 홀로 있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정련한다. 사람의 길을 궁구하고 사랑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소서노는 홀로 하늘 앞에 선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소서노 내면의 갈등을 꿰뚫어 보는 이는 영적 세계에서 만나 논쟁하고 싸우는 카르마키 신녀 카라다. “잘난 척해보았자 결국 아무르의 마녀야. 너 또한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더냐?”

권력을 잡는 일이라면 자기 여동생을 성적·정치적 수단으로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카르마키 대왕 온구트를 위시한 남성 권력을 증오하며 새 세계를 열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 카라. 그 또한 정직한 전사 가라한의 품을 갈망하며 자기 수하로 삼고자 공격하지만 아사를 지켜내는 건 소서노였다. 그 소서노를 조롱하며 던지는 말이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에 소서노의 대답은 언제 읽어도 전율이 인다. “내 답을 듣고 싶다면, 말해주마. 내가 그를 몹시도 사랑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로 인한 번뇌보다도 무겁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다!” 종국에는 “좁은 핏줄의 울타리를 넘어 참으로 사람의 길을―그 입구라도 찾아낼 때까지” 걸어가겠다는 비전을 품은 소서노다운 고결한 대답이다. 애달픈 사랑을 하며 인내로 자기를 희생하는 아라도 귀하지만, ‘사랑하는 이’로서 ‘사람의 길’을 궁구하는 소서노를 이 작품의 중심 여성으로 세우고 싶은 장면이다.

카라와 소서노가 친구가 되는 세상

카르마키에서 스스로를 ‘여신’이라 부르는 카라와 아무르의 신녀 소서노가 탈혼계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는 장면은 이상하게 아름답다. 여기서 소서노는 여성 연대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혀내니까.

소서노: 어찌해서 우리는 이리 싸워야만 할까.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볼 여유조차 없이…. 네 마음을 안다. 하지만, 만약 따뜻한 가슴이 없는 야망이란 네가 증오하는 폭압들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지금 네 모습이 날 슬프게 한다. / 카라: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이래서 계집은 안 된다니까. / 소서노: 아니야…. 그래서 되는 거다. 어쩌면 좀 더 잘할 수도 있었겠지. 좀 더 현명해질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삶에 연습이란 없고, 꿈에 실험이란 없다. 때론… 악몽일지라도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도 있는 것이다. / 카라: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은 세상이 계속된다는 거겠지…. 나는 다시, 또… 다시… 태어날 테다. / 소서노: 그때엔 내가… 네 벗이 되어주마. / 카라: 너 같은 친구는 사양이다. 착한… 여자 따윈 필요 없어…. / 소서노: 하하. / 카라: 흥… 의외로 아주 최악의 기분은 아닌데… 조금… 피곤하군…. / 소서노: 가느냐?
― 《불의 검 9》(신장판), 152쪽, 《불의 검 12》(신장판), 91-93쪽.

소서노가 죽어가는 카라에게 다음 세상에서 벗이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왜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날까. 소서노의 가장 깊은 외로움과 고통을 알아본 이가 카라였듯, 카라가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 여성이 권력을 잡는 나라를 세우려고 꾼 꿈을 진지하게 여겨준 이도 어쩌면 소서노 하나였을지도.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운동선수가 승부의 세계를 떠나 운동경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모습을 본 듯 황홀한 장면이다. 카라와 소서노가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나 서로의 생각을 나눠볼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는 어쩌면 탁월하고 멋진 두 명의 여성 지식인 혹은 정치인을 만나볼지도.

미송나무, 아니 오동나무를 찾아

“혜은이는 구도자니까.” 이런 영화 대사 같은 말을 밥 먹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준 선배 언니가 있었다. 엄마는 내게 왜 그렇게 세상을 피곤하게 사냐며 시시때때로 걱정하고,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질문이 많아서 인생 피곤하겠다며 거리를 두기도 하며, 최근엔 “너 T야?”를 일상적으로 듣는 그런 사람이지만, 언제고 선배 언니가 해준 저 말을 난 오랫동안 품고 있다. 세계를 미스터리 가득한 곳으로 바라보고 숙제해내듯 전전긍긍 살아가며 그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무언가를 갈망하며 매일 하나님을 구하는 건 그 구도자의 마음에서 연유한다는 걸 그때 이후로 제대로 알았다.

《불의 검》에는 수많은 명대사와 명장면이 있지만 구도자인 내 마음에 깊이 새겨 가장 목마를 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카라와 치열하게 영의 싸움을 한 후 모든 것이 탈진된 소서노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울면서 깨어나 보게 된 미래에 대해 시 같은 말을 내뱉던 그 장면.

“인간, 차츰, 하늘을 잊어가리라…”

하늘을 잊어가는 세계에서, 하늘을 대면하며 이웃을 함께 마주했던 고대 세계 구도자 소서노를 생각하는 가을이다.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하며 사람의 길을 그 입구라도 찾고자 했던 소서노의 친구가 되기 위해 난 어느 미송나무에 올라야 할까. 아, 여긴 한국이니 오동나무를 찾아봐야겠다.

■ 주

1)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27쪽.
2) 유진 피터슨,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합니다’, 필립 얀시 엮음, 《영감을 선물한 스승들》(두란노, 2005), 46-63쪽.
3) 1993년판 《불의 검 3》, 작가의 말. kimhyerin.com/works/sword_people2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