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in the Rain

[396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변규리의 〈너에게 가는 길〉

2023-10-31     이동기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을 만나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마음을 공유하며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연애와 결혼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그런 과정이 ‘나’라는 개인을 성장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에선 누구나 똑같은 기회, 동등한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런 공식을 반드시 준수하지는 않습니다. 평등과 불평등, 부(富)와 빈(貧) 등 여러 갈래로 나뉘는 시선의 경계에는 언제나 이에 대한 불만이 표출됩니다.

한때 캐나다 밴쿠버에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께서 퀴어 축제 얘기를 들려주셨는데, 그때 저는 그다지 귀담아듣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퀴어’라는 단어도 생소했고 나와는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엔 일상의 시선에서 비롯된 차이를 돌아보고 해소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부족한 영어 실력의 차이만을 해소하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만 존재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선에서 거리로의 확대

영화 〈너에게 가는 길〉(2021)에는 두 명의 성소수자가 등장합니다. 한결(봉레오)은 출생 시 여자의 성별을 부여받았지만, 남자의 생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정서상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결의 어머니 나비(정은애)는 119구급대원입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왔지만, 정작 자식의 마음은 쉽게 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늦게나마 최선을 다하며 자식의 조력자를 자처합니다. 예준(정예준)은 남자이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예준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관대한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예준의 엄마 비비안(강선화)은 오랫동안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했습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기에 지금의 상황에 더욱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두 주인공은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한결은 부여받은 생물학적 성을 거부하며 가슴 절제 수술을 받았고, 예준은 캐나다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있습니다. 영화는 성 혼란을 드러내며 내면이 흔들리는 고통스러운 모습까지 애써 들추진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그들의 자리, 다시 말해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거둬들이길 원합니다. 다큐멘터리영화에 출연하면서까지 그들이 바라는 건, 바로 ‘시선’의 변화일 것입니다. 예준과 비비안이 캐나다 퀴어 축제를 찾았던 이유 또한 그들이 바라던 그 시선을 찾고 싶어서였습니다. 많은 퀴어가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축제를 찾아 그 느낌을 받고 싶어 하는 이유도, 바로 익숙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점차 그들이 말하는 그 시선을 ‘거리’의 영역으로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그 ‘거리’는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하 사진: 〈너에게 가는 길〉 스틸컷

빗속에서 춤을 즐기는 법

우린 평소 퀴어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단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듯합니다. 이건 일반인, 혹은 ‘정상인’이라 불리는 많은 이들이 마치 자신과는 먼 이야기를 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을 겁니다. 여전히 거리를 두며 그들을 대하는 시선의 변화만을 주장한다면 말입니다. 이쯤에서 영화는 가장 말하고 싶었던 화두를 슬며시 내비칩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모두 솔직한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하게 바라보고 솔직하게 다가가고 솔직하게 말하고 모든 게 솔직해졌을 때, 이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거리감의 실체가 눈앞에 드러났을 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 캐나다 퀴어 축제는 모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솔직한 목소리를 글로 써서 표현하고 손에 내걸어도, 사람들이 멀어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한결의 엄마 나비는 한결의 법적 성별을 정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판사에게 호소하는 글조차도, 눈물로 변한 그 한마디 한마디조차도 한결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그녀가 그동안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이와 함께 처음으로 화면에 눈물을 비춥니다. 그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임과 동시에 “하필이면 내 자식이 왜!”라는 한탄의 마음이기도 할 겁니다. 그 ‘왜’라는 물음표에 한숨과 더불어 눈물이 묻어 나오는 것이겠지요. 한결이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 18장의 서류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먼 가시밭길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이런 주제를 접하면, 아마도 부모와 자식 간의 다툼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알고 보면 그 갈등은 커밍아웃한 시점이 아닌, 그보다 훨씬 오래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식한 그 순간부터 쌓여온 거리일 텐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과연 퀴어의 아픔을 세세하게 조명하기 위해 만들었을까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공감을 얻고자 만들었을까요.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겼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과연 영화는 어떤 목적과 방향을 갖고 이 이야기를 지탱해가는 것일까요.

예준은 성소수자에게 비교적 관대한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음에도, 이방인으로서 그곳에 적응하지 못한 채 한국에 돌아올 의사를 내비칩니다. 수업을 함께 듣는 이들에게조차 단순히 직장 동료와 다름없는 막막함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영화나 미디어로 서구권의 성소수자 평등을 익숙하게 접해왔지만, 자신이 그곳에 가기만 한다고 곧바로 그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님을 뒤늦게 이해한 것입니다. 영국 작가 비비안 그린은 “인생이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도 자신의 긴 여정을 인지하고 조금씩 천천히 그 거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존재와 역할의 해석

영화에 등장하는 두 쌍의 출연자들은 ‘다툼’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로의 목소리가 객관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때때로 더욱 감정적이죠. 한결은 서울가정법원에 성별 전환을 신청했다가 성기 재건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각당하고 맙니다. 이내 한결은 법원의 판단만으로 개인의 삶이 바뀌는 현실을 강하게 개탄하고 나섭니다.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별 정정 신청이 받아들여질 수도 혹은 기각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은, 그에게 자신이 마치 유령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기분을 안겨줍니다. 여기서 ‘유령’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누구나 인지하고 인식하고 있지만, 실체도 형체도 없는 그런 삶. 많은 이가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에 쉽게 그 형체를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모호한 삶. 한결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정의한 것입니다.

한편 인천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 장면에서는 축제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과 축제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대립합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양쪽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은 법을 들이대며 축제를 불법행위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쪽은 법을 들이대며 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쪽은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쪽 또한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건 바로, 성소수자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과 규제, 그 어두운 단면을 마주하고 직시하는 부모의 마음, 가족의 역할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화면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경청하며 그 따가운 눈초리를 거둬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카메라는 때로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현실 또한 조금이나마 정직하게 담아낼 수 있으니까요.

성소수자 모임을 다시 찾았을 때, 한결은 이미 서울가정법원에서 기각당한 성별 전환 신청을 다시 전주지방법원에 넣어 허가를 받아낸 상황입니다. 한결은 모임에서 그간의 소감을 전하며 엄마와의 관계 변화에 대한 얘기를 살며시 꺼냅니다. 지난 1년간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했는데, 성별 전환 후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예준은 애인 성준을 만나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양쪽 부모에게 인사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사실 시작부터 퀴어 당사자가 아닌 부모, 즉 가족의 내면을 끄집어내려 노력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퀴어 당사자들의 곁에서 어떻게 그들의 편이 될 수 있는지, 가까운 이들의 존재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얘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족이란 이름의 의미

앞에서 얘기한 ‘시선’과 ‘거리’는 영화 속에서 이내 ‘이해’와 ‘수용’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외로움’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연결 고리에 ‘가족’이란 단위의 의미를 부가하는 모습입니다. 감독 변규리는 ‘퀴어’라는 대상을 두고, 이를 여러 시선으로 다채롭게 분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건 사회적 ‘시선’의 전환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퀴어’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거리’를 강조하는 것일 수도, 혹은 상황을 마주한 이들의 ‘역할’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제목이 전하는 ‘너에게 가는 길’은 방향이 대상인 ‘퀴어’에게, 다가간다는 ‘행위’를 강조하고, 또 거리를 뜻하는 ‘길’로 확대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을 마주하며 힘겹게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저 그 과정의 아주 작은 단면만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부정하고 싶은 그 현실에, 영화는 마지막까지 제 목소리를 높일 줄 압니다. 그 방향을 찾아 달려가야 하는 건, 과연 누구일까요.

■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는 이번 회로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동기
영화칼럼니스트.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보았고, 누벨바그의 전성기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말한 ‘시네필의 3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한 영화를 몇 번씩 반복해 보기를 즐기고, 그 영화에 관한 생각을 글로 기록하기 좋아한다. 〈씨네플레이〉 〈월간경남〉 등 여러 매체에서 영화 칼럼을 연재하고 대학에서 강연하는 등 영화를 널리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그때 그 영화처럼》, 《다시, 영화를 읽는 시간》, 《오늘도 두 번째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