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고난
[396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 본 설교문은 2023년 3월 10일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금요기도회 설교를 수정 및 보완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1:1-4).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존하고 때로는 종속되는 존재입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살기엔 세상이 너무 차갑고 험하기 때문이죠. 현대사회에 몇 가지 강력한 종속 대상이 있지만 그중 제일은 돈입니다. 세상을 묘사할 수 있는 수많은 개념과 언어가 있음에도 우리는 이 세상을 자본주의사회로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다양한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죠.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라는 말이 돈의 질서에 어긋나는 가치와 담론을 흡수하여 은폐하는 신념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기성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되어도 끊임없이 믿을 만한 다른 것을 찾아왔고, 이제는 돈이 종착점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돈에 대한 경애를 종교적 경외에 빗댄다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재산을 나누는 일은 자본주의 종교에 대한 이단적 행위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상당한 돈과 시간을 교회에 쏟는 모습은 비기독교인이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겠죠. 어쩌면 누군가에겐 오늘 본문에서 두 렙돈을 성전에 내는 여자의 행위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올려다본 이 여자는 종교에 눈이 멀어 생존을 포기한 광신도일까요? 아니면 몇 푼 되지 않는 헌금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과부일까요? 예수님은 이 여자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그리고 무엇이 이 여자를 헌금함 앞까지 이끌었을지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이 여자를 과부로 묘사합니다. 과부라는 호칭은 이 여자의 어려운 처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자는 남자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로 나란히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는 두 대상이 비슷한 수준으로 자립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과부는 자식이 없으면 남편의 형제를 통해 다시 대를 이으면서 목숨을 연장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집안의 가장을 잃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의식은 고대인들에게도 있었지만, 이러한 여성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는 못했죠.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는 과부가 없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핀 많은 해석자도 이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에 치우쳐, 한 사람으로서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여자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십니다. 이들을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며 도우려 하기 이전에,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손 내밀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동행하셨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삶은 은폐된 종교였던 남성 중심적 사회에 경종을 울립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깨뜨리며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분이었습니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의 의미
이제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부자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데,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아주 적은 돈을 헌금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신 예수님은 이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짧은 이야기는 어쩌면 지금까지 많은 성도의 지갑을 열었을 설교 본문입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 여자에 대한 말로 2·3·4절에 가난하다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 헬라어로는 모두 다른 단어입니다. 그만큼 본문은 이 여자가 재정적인 측면과 아울러 관계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빈곤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과부가 넣은 헌금이 가장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예수님의 말이 과부가 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여자에 대한 칭찬이 아닌 한탄으로 해석하죠. 예수님이 바로 앞 구절에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로 묘사하면서(20:47) 비판적인 말씀을 하기도 했고요. 이러한 해석도 나름대로 근거와 의미가 있지만, 여자의 행동이 단순히 부자와 권력자를 고발하기 위한 소재로 제한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저는 이 본문을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쥐어짜서 헌금하는 비극적인 내용이 아니라, 남편을 잃었음에도 해방된 자신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이 여자가 남편이 있었을 때 얼마나 잘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전보다 훨씬 가난한 처지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과부가 되기 전에는 남편 허락 없이 자신의 의지로 돈을 소비할 자유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생활비를 털어서 헌금하려고 했다면, 남편에게 저지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가진 돈에 비해 허영심과 소비욕이 많고,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여겨졌겠죠. 하지만 남편 사후에 그녀가 택한 것은 자신의 생활비를 자신이 정말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곳에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헌금은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이룬 선택이고, 이를 통해 자신은 받기만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냈죠.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을 부자들의 헌금보다 높이 평가하시며 여자의 삶을 긍정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행동을 미련하다고 보겠지만, 예수님은 부자들 사이에 껴서 두 렙돈을 떨어뜨리는 용기를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남편 없는 여자의 불쌍한 면모가 아니라, 혼자 힘으로 일어선 한 사람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사람과 교회를 살리는 것
예수님은 언제나 세상을 바라볼 때 남들과 다르거나 정반대인 시각을 드러냅니다. 여자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많은 돈을 넣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세상의 줄 세우기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는 돈의 적고 많음으로 행위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여자의 헌금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넣은 돈을 본래 선물을 의미하는 단어인 ‘도론’(δῶρον)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여자가 넣은 돈은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βίος)로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각각 헌금과 생활비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선물은 수여자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며, 수여자를 제외한 잉여 재산이나 소유가 있어야 성립됩니다. 하지만 생명은 존재와 분리될 수 없고, 다른 곳에 함부로 넘겨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 차이는 예수님이 두 헌금을 양적이 아닌 질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돈이라는 일률적인 잣대가 마비시킨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그가 주창한 이상향적 이론에 그치지 않고, 생명을 던진1) 사건을 통해 증명됩니다. 생명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기독교의 진리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돈이 아니라 한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과부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한 여자를 응원하십니다. 한 존재를 어떤 종교나 대상에 종속시키지 않고 한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신자의 믿음을 갉아먹고 누군가 이득을 취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진짜 교회는 사람을 살립니다. 종속된 존재를 해방된 존재로 바꾸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이 멸시하는 가난과 고난마저도 받아들입니다. 돈과 능력으로 서로 비교하면서 타인을 판단하는 길을 거부하고 가난과 고난을 재해석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가난이라는 현실이 어떤 것보다 큰 고난이라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가난은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것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나눌 긍휼이 없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내면에 진정한 겸손과 섬김의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 또한 가난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전에 우리가 겪는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세상이 규정하는 가난이 아니라, 경제적 가난이 모든 고난의 전부라고 믿는 세상의 잘못된 인식입니다. 가난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부 또한 날이 이르면 다 무너질 것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21:6). 앞으로 교회는 더욱 극심한 경제적 문제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회 또한 나아질 수 있는 지표보다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만이 가득합니다. 약한 사람부터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과 교회를 살리는 것은 돈이 아니라 생명의 나눔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로 살아가는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누가복음 21:1-4에서 헌금을 ‘낸다’는 표현의 헬라어 원문인 ‘발로’(βάλλω)에는 ‘던지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최찬욱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청소년마당 전도사.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