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신학과 신-시학을 통해 신을 사유하기 ― 시라큐스 대학교 존 카푸토 명예교수

[396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2023-10-31     김동규

1940년생인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미국 빌라노바 대학교 철학과 토마스 왓슨(Thomas J. Watson) 석좌교수로, 또 시라큐스 대학교 철학과 데이비드 쿡(David R. Cook) 석좌교수로 일했으며, 현재는 이 두 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은퇴한 상태다.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저술 작업과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으며,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분야에서 여러 명저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그의 철학을 각인시켜준 작품은 《The Weakness of God: A Theology of the Event》(신의 약함: 사건의 신학), 《In Search of Radical Theology》(급진신학을 찾아서) 등인데, 아쉽게도 이 책들은 우리말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HOW TO READ 키르케고르》, 《포스트모던 해석학》 등이 번역되었고, 종교에 대한 그의 참신한 생각은 역시 한참 전에 번역된 《종교에 대하여》에서 미미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 인터뷰에서는 그가 비교적 최근에 많이 다루는 급진신학이 자주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길 바란다. 초자연적인 것을 기반 삼아 전개되는 강한 신학에 대항하여 신학의 뿌리를 뒤흔들며 남겨지는 것은 문학적-시학적 신앙과 신학이라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인터뷰는 4월 19일 미국에서 비대면으로 이뤄졌다. 나는 보스턴에서, 카푸토 교수는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강대 철학연구소 강지하 연구원이 통역과 보충 질문 등 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카푸토 교수와의 인터뷰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사진: 필자 제공) 

- 선생님의 책은 한국어로도 여러 권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하지만, 정작 선생님의 신앙 형성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40년 태어난 저는 매우 가톨릭적인 세계에서 자랐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세계였지요. 비오 12세와 라틴 미사의 세계였고, 모든 것은 라틴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가톨릭 학교에서 수녀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후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드 라 살르 형제회(De La Salle Brothers)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보통 그리스도교 형제회(Christian Brothers)라고도 하는데, 아일랜드에 같은 이름의 기관이 있지만 둘은 다른 단체입니다. 저는 그곳 형제들에게 큰 영감을 받아 그들이 세운 수도회에 입회했고, 4년간 라 살르 형제회에서 지내게 됩니다. 저는 바오로 수사로 불렸지요. 그곳에서 철학을 처음 접했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종교와 영문학을 가르칠 예정이었죠. 그런데 어느 시점에 저는 제 장상들(superiors)에게 공부 과정에서 철학의 길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싶어서요. 그분들은 그게 좋겠다고 했지만, 순명 서약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그분들에게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분들이 제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서약입니다.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지요. 그래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수도회 수사님들과는 여러 해 동안 연락하며 지냈습니다.

저는 수도회를 떠나 대학원에 진학했고,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저 자신을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철학자로 여겼지요. 그런데 철학계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도 종교적 물음과 신학적 물음이 제게 남겨져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펴낸 두 권의 책은 여전히 아주 분명하게 정통 가톨릭 신앙을 견지하고 있을 때 쓴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하이데거 사상의 신비적 요소를 다루었는데, 하이데거와 제게 새겨진 것을 다뤘지요. 이후 저는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에 푹 빠져있었기에, 그에 관한 책을 마친 다음에는 가톨릭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행해갔죠. 《급진적 해석학》부터 제 개인의 목소리를 찾은 것 같아요. 그때부터 종교적 물음이 배경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종교적 물음은 있었죠. 하지만 그 책 마지막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것이 전면과 중심에 있지는 않게 되었죠. 저는 해석학, 현상학, 해체론에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제게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제가 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데리다는 《할례고백》(Circonfession)을 조프리 베닝턴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 책은 제게 정말 크게 와닿았어요. 데리다를 일종의 상대주의자나 관념론자라고 보는 관점에 반대했기 때문에요. 저는 키르케고르를 데리다의 작업과 비교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미학적, 윤리적, 그리고 최상의 종교적 단계에 대해 말했지요. 데리다는 보편으로부터의 예외, 보편적인 것보다 낮은 차원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키르케고르와 비교하면, 이는 종교적인 방식의 보편적인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 해당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제시한 주장이죠. 그가 출간한 《할례고백》은 심원할 정도로 유대교적이고, 예언적이며, 메시아적입니다. 제 주장을 펼치는 데 필요한 모든 무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특징도 있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다른 모든 것은 제게 도약대였습니다. 제가 《자크 데리다의 기도와 눈물》이라는 책을 썼을 때 데리다의 저작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게 해줬죠. 자신이 정확히 무신론자로 통한다고 한 그를 통해 저는 다시 종교로 돌아왔습니다. 데리다는 당연히 무신론자로 통합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게 해주었지요. 저는 가톨릭과 현상학을 거쳐, 그 확장과 해체론을 거쳐 종교로 돌아왔습니다. 완전하게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매우 다른 방식으로 종교로 돌아왔죠. 저는 이것을 신앙고백적 신학이라기보다는 급진신학(radical theology)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가톨릭이라는 출발점은 매우 중요했고, 필수 불가결했으며,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철학은 제게 단지 직업이기만 한 게 아니었고 소명이었죠. 오늘날 저는 하이데거가 일종의 반복(Wiederholung)이라고 부른 것, 시작의 반복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가톨릭적 시발점은 매우 중요해요.

- 급진신학을 언급하셨는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급진적(radical)이란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 자체가 본래 뿌리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특정 맥락에서는 ‘극단적인’ 같은 의미도 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급진신학은 정통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한편으로 극단적이죠. 또한 고전적 의미에서의 토대나 기초가 아니라 신학의 우연성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노출시킨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입니다. 이는 신학을 뿌리로 죽 내려가서 보면, 그것이 뿌리째 뽑힌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뜻이죠. 뿌리째 뽑힌다는 말은 파괴되거나 해를 입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학이 역사적이고 유한한 인간의 구성물로, 우연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고 불리는 것의 뿌리에 놓인 어떤 신비가 있습니다. 매혹적이고 압도적인 신비죠. 그래서 저는 종교를 신비에 접근하는 특별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신학은 종교에 관한 기술적 언어입니다. 다만 그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신비이고,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 방법이죠. 저는 종교와 신학이 자신을 신비롭게 하고, 자신을 일종의 마법으로 바꾸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뿌리 뽑고자 하는 그 뿌리를 보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초자연적 힘의 이념이 있습니다. 외부 세계의 힘 또는 초자연적 힘은 세계 안에 개입되고,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힘을 스스로 특수한 사람들에게 열어 밝혀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을 무언가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신비화입니다. 또 초자연적 힘의 이념은 종교를 최악의 과잉에 이르게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신을 소유하거나 신의 편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신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건 자신을 계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세계와의 만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급진신학이라는 말을 기꺼이 사용하는 이유지요.

- 이러한 급진신학에서 선생님 사유의 또 다른 축인 신-시학은 어떻게 전개되나요?

급진신학이 곧 신-시학(Theo-Poetics)입니다. (그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18세기와 19세기,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신약성서를 보면서 그것이 모두 미신이라고 했습니다. 이면에 일종의 조작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이것이 이 논쟁에서 볼 수 있는 전부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물 위를 걷지 않았다고 말하지요. 그는 물과 같은 차원에서 바위 위를 걷고 있었다는 거죠. 멀리서 예수가 실은 바위 위를 걷고 있을 때,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초자연적인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아니요. 예수는 신이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고, 공중을 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예수님에 대한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접했고, 아시다시피, 그중 어떤 아이들은 그 마법 같은 힘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헤겔은 계몽주의자들이 말한 대로, 그가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당한 좋은 사람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소크라테스가 있었던 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요. ‘예수에 대해 중요한 것은 그가 신이라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이 초자연적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헤겔이 의도한 바는 그것이 표상(Vorstellung), 상상의 표징(imaginative figure)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표상 안에서 신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직관을 가진다는 말이지요. 헤겔에게 신은 세계에 있었던 초월적인 외계 존재가 아닙니다. 폴 틸리히 같은 이에게도 이런 신학이 작동합니다. 신은 초월적 외계인이 아닙니다. 틸리히에게 신의 존재는 세계의 근거죠.

그런 맥락에서 신약성서 속 예수 이야기는 예수의 표징에 대한 것으로, 시학, 철학적-시학, 신화적 신-시학의 표징이며, 이것은 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아이콘입니다. 상징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것은 또한 창작자의 작품입니다. 신약성서는 기억을 가진 인간 존재자의 창조적 상상의 산물이지요. 이들은 결코 예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요.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죽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그 이야기를 그리스어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한 예수에 대한 특정한 기억과 약속에 대한 상상적 표현을 부여한 것이지요. 한편으로 초자연적인 것의 탈자연화(desupernaturalization)가 있지요. 우리는 헛소리(mumbo jumbo)에 해당하는 초자연적인 질서를 견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합리화, 즉 그저 설명해 내려고만 하는 계몽주의로부터 보호해내야 합니다. 이는 데리다가 유령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령의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데요.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햄릿〉 공연을 본다고 가정해보지요. 아버지의 유령이 햄릿에게 나타날 때 관객들이 이런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나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유령에 대한 불신을 유보하고 이야기로 들어가야 해요.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기로,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고, 신학의 규준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상징, 표상, 아이콘에 관해서입니다. 이렇게 종교와 신학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 북미 복음주의와 20세기 초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영향이겠지만, 한국의 주류 그리스도교에서는 문자주의나 신학에 대한 보수적인 접근 방식이 주를 이룹니다. 지금은 상황이 더 악화되어 설교자들은 예수를 그저 슈퍼맨처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의 사건을 탈초자연화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를 벗어나고자 급진신학을 소개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고 할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도 꽤나 종교적인 분이셨는데,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셨어요. 한번은 어머니에게 묵주기도는 기본적으로 중세 시대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마리아에 대한 의탁과 기도를 나타낸다고 말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죠. 성모 마리아가 직접 묵주를 고안해내서 이를 성 베드로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묵주를 고안하셨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그 시초가 중세 수도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죠.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말을 어머니께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본인 스스로 좋은 삶을 사셨고, 믿는 바를 잘 해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해오신 일을 방해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교육받지 못하고, 아주 단순한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삶을 참된 사랑과 자비로 번역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면서 기본적으로 그런 삶을 잘 살도록 지켜보고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라고 해도 기꺼이 그 사람을 돌보고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경건한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분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많은 사람이 종교는 진리와 관련된 물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진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이 진리를 알 수 있는지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진리가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문제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진리와 기도의 관계는 무엇인지요?

종교의 진리는 표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때 진리는 (실제로 비가 오고) 오늘 비가 온다고 할 때처럼, 나의 진술이 문제의 사실에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참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붕에 물이 샌다고 말한다면, 그 참된 진술은 물이 새는 지붕에 일치하겠지요. 종교는 참에 대한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참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표상적 진리입니다. 종교의 진리는 삶의 형식으로의 진리이죠. 종교적 진리는 그것이 삶의 형식으로 활력이 있고, 그러한 형식으로 조직되는 한에서 진리이며, 삶의 형식의 구성 요소입니다. 종교적 인간의 삶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내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소망, 우리 팀이 게임에서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아닙니다. 이때 기도는 성찰하는 기도이며, 신비에의 개방성, 관조적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계에, 사태의 신비에, 서로에 대해 노출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런 기도가 삶의 일부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무언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의 삶은 또 다른 종류의 진리입니다.

- 한국 독자들은 대체로 선생님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로 간주하며 선생님 작품을 읽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선생님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이를테면 후기-세속주의(post-secularism)나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포스트휴머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체하고 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포스트휴머니즘 맥락에서 종교는 어디로 이행하는 것일까요?

최근 출간한 두 권의 책에서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가장 최근 것은 《신의 유령들》인데, 인공지능의 유령, 전자 세계의 유령 등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챗봇과 실제 대화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유령과 영의 지배를 받는, 이러한 포스트휴먼 형상들이 출몰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신-시학에서 이야기하는 상상의 형상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생시킨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로 그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했고, 이제 그것은 도서관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죠. 이제부터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이를 《신의 유령들》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출간된 《십자가와 코스모스》가 있습니다. 마지막 장 즈음에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한 연구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여든두 살이 아니라 스물두 살이었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을 더 깊이 연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인간이라고 불리는 것을 다루지요. 우리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전망합니다. 이 팽창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학 이론입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고, 빛도 운동도 없겠지요. 그래서 세계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휴먼으로, 또 비인간으로 전개되면서 변덕스러워질 것입니다. 인간도, 지성도, 삶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 신학과 철학의 과제가 포스트휴먼의 도전에 맞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 가능한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의식에 무엇을 업로드할 수 있다면, 아담의 후손이 아닌 존재가 나올 것이고, 어쩌면 예수를 통한 구원도 필요 없어질 것입니다. 원죄가 우리 신체를 통해 전승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포스트휴머니즘의 존재는 더는 전통적 의미의 신체적 존재가 아닙니다. 왜 호모 데우스란 말이 있을까요? 더는 (전통적 의미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들에게 예수는 완전히 쓸모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요? 종교와 신학은 남아있을까요? 저는 신-시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신학은 언제나 시학으로 있을 것입니다. 산문이 있는 한 시학도 있을 것이며, 시학은 산문의 한계로 제약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의 지점, 우리가 그 수준까지 도달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생태학적 재앙으로 우리 스스로 파멸하거나 멸종될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우주 자체의 신비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다면, 종교적인 것은 우주 자체의 신비 형태, 스피노자가 말한 신, 즉 자연의 신비 형태를 취할 것입니다. 저는 우주 자체가 신비가 될 것이고, 이런 일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팬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의 임재를 다르게 경험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예배에 접근하고 임재를 경험합니다. 일부 탈신화화를 겪기도 하고요. 수많은 대형 집회나 교회 예배가 작은 그룹의 모임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여러 작은 교회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하죠. 실제로 만나서 하는 예배나 모임이 없는 경우도 있고, 좋은 점도 있습니다. 이는 설교자나 사제가 마법 같은 일을 일으킨다는 착각을 깨트리지요. 제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전혀 나쁜 게 아닙니다. 한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으며, 하느님이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과 많은 종교인이 있습니다. 또 미국에는 총기 사용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신을 총과 연관 짓기도 하지요. 제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들은 어린양의 보혈이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고요. 팬데믹 상황에 계속 교회에 가고자 하고, 감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는 규칙을 절대시하며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이 일어났고, 사태가 생각보다 더 커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과학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있었고요. 종교와 과학은 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양자는 서로를 지원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시적이고 종교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고, 종교인들은 과학에 대해 알아가거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진보하는데,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 세계가 점점 더 분열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종교인들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좁은 서클에 갇혀있습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간주하여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상황을 더 가속화했고 예전보다 열 배는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종교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가치보다 더 문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신비와 경외감, 상호 존중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문학과 시와 같은 방식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종교가 시행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 말씀하신 대로, 종교가 자기-파괴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를 견지하는 이들에게 해주실 어떤 격려나 권면의 말이 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관용에 대한 영감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족 이미지를 활용하는 편인데요.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좋은 가정에 태어난 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죠.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자기 부모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실험적 증거를 모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는 사실적 주장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는 부모를 매우 사랑하고, 그들이 우리의 가족임을 압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 가족, 문화, 그리고 그들만의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또한 보편적이고 공통적이죠. 헤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런 점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신학이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다만 사목적인 문제로서, 저는 사람들이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유비를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와이로 여행을 가서 오래된 하와이 마을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안내해주신 분이 그곳 마을의 특성에 관한 설명을 아주 잘했습니다. 용암 바위가 있었는데, 하와이 자체가 산이고 섬인데 용암이 흐르기까지 합니다. 이런 환경이 용암 바위를 신성시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용암 바위에 간구합니다.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면, 자기들을 지켜주었다고 생각하는 용암 바위에 감사를 표하지요. 물론 저는 이 용암 바위가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신성함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용암 바위, 예수, 공 등 많은 신성한 이름이 있지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이름을 가능하게 합니다.”

진행 김동규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