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의 정원, 나의 성소

[397호 정원의 길, 교회의 길]

2023-11-30     이성희
애디론댁 산봉우리 중 하나인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의 가을 풍경. 뒤로 보이는 호수는 빙하기에 생긴 조지 호수(Lake George)이다. (사진: 정자현 제공)

이제야 산을 오른다. 단풍이 절정일 때는 바쁜 일에 쫓기다가, 끝물 단풍이라도 보겠다며 길을 나섰을 때는 이미 겨울의 문턱이다.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고 바닥에 쌓인 잎은 발목까지 덮는다. 등산 코스는 초반부터 가파른 절벽이다. 직립보행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두 손과 두 발을 다 써서 바윗길을 올라간다. 사람 키 높이인 낮은 절벽에 짧은 나무 사다리가 걸쳐있다. 가뿐하게 올라가 숲길을 걷는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간밤에 얼었던 계곡에는 아직도 얼음이 남아있다. 다시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끝이 하늘과 닿은 듯한 긴 나무 사다리가 걸쳐있다.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위틈으로 길을 더듬어 가서야 겨우 능선에 올라섰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은 남쪽을 향해 볼록하게 원호를 그리며 뻗어있다. 등산로 입구가 있는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다. 북쪽으로는 절벽에 둘러싸인 평평한 고원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커다란 호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날 오른 산은 뉴욕 북동부에 넓게 자리 잡은 애디론댁(Adirondack) 산지에 솟은 100여 개 봉우리 중 하나다. 애디론댁 산지는 약 1만 3천 제곱킬로미터로 뉴욕주의 1/5을 차지하고, 남한 면적의 1/10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약 10억 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반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지형은 그보다 훨씬 최근인 1만 8천 년 전 빙하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빙퇴석 지대도 흔하고, 그때 만들어진 호수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중 공식적인 이름이 붙은 것이 애디론댁 산지에만 200개에 달하고, 그 외 크고 작은 연못과 습지까지 합하면 이 지역 호수는 3천 개가 넘는다. 애디론댁 산지는 대부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있고, 주립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키다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진 웹스터의 소설, 《Daddy-Long-Legs》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주디의 친구 샐리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이 소설이 1912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일찍부터 이 산지 곳곳에 부호들의 별장들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요즘은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큰 부자가 될 필요가 없다. 뉴욕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캠핑장과 산장도 많고, 숙박 플랫폼 서비스에 등록된 민간 주택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 작고 예쁜 고사리는 바위틈이나 나무둥치의 비좁은 틈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 때문인지 영어로는 록 폴리포디(Rock Polypody)라고 불린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그 때문에 이 산지는 8년 차를 맞는 우리 가족의 이민살이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1년에 두어 차례, 많으면 서너 번씩 산에 오르거나, 캠핑을 하거나, 겨울이면 저렴한 스키장을 찾아다녔다. 카약을 싣고 산속에 숨겨진 호수들을 찾아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언어도 문화도 낯설었던 시기에, 특히 코로나 기간 대자연에 파묻혀 시절을 즐기던 경험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이곳 한인교회에서 만난 한 친구는 뉴욕 주정부에서 건축사로 일하는데, 아웃도어 활동의 귀재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과 아빠들을 이끌고 혼자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산행을 주도하기도 했고, 출장 중 우연히 알게 된 캠핑장과 산장을 찜해두었다가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지 않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직무 유기’라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교회 봉사와 훈련에 소극적인 자신의 태도에 대한 변명으로 여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주장이 진실하다고 여겨졌고, 지금은 신봉하게 되었다. 주일예배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산에 오를 때 나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읊조리고 싶어진다.

산을 오를 때마다 펼쳐지는 장엄한 경관도 좋지만,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식물을 관찰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다. 책을 통해서나 정원에서 알게 된 식물들을 본래 서식처에서 마주하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다. 잎눈이나 나무껍질 등으로 단번에 식별할 수 있는 것들은 첫눈에 ‘아, 이게 그거구나’ 하며 감탄 어린 첫 만남을 기념할 수 있지만, 긴가민가하는 것들은 여러 부위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따로 알아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특히 고사리류가 그렇다. 크리스마스 고사리(Polystichum acrostichoides)처럼 특징이 분명한 두어 종을 빼고는 고사리 도감을 참고해가며 잎이나 줄기, 포자낭을 관찰해야 어느 정도 식별이 가능하다.

이날은 유독 미역고사리속의 록 폴리포디(Polypodium virginianum)가 눈에 많이 띄었다. 잎 모양이 크리스마스 고사리와 아주 비슷하고 둘 다 겨울에도 초록이 선명한 상록 고사리이지만, 낙엽 덮인 평지에 주로 분포하는 크리스마스 고사리와 달리, 록 폴리포디는 바위틈에서 주로 자라며 크기가 훨씬 작다. 앙증맞은 고사리가 바위틈에서 새초롬히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은 바위째 떠다 정원에 옮기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 산은 높이로 치자면 1천 미터 정도인 평범한 산이지만, 위도가 북위 43도인 점을 감안하면 냉대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겨울의 문턱에 만나는 상록 고사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능선에서 내려와 숲길을 따라 호수를 찾아 나선다. 숲길은 대부분 물길을 따라 나있다. 계곡을 따라 가늘게 이어진 숲길은 바위와 호박돌이 어지럽게 늘어진 계류와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숲길은 화강암반을 곱게 덮은 이끼밭 사이로 얕은 실개울을 따라가기도 한다. 밑창을 겨우 잠기게 할 만큼 잔잔하게 바위를 적시는 물길을 찰방찰방 걸을 땐 아이들도 어른들도 기분이 좋다. 물은 길을 알고 있다. 물이 흐르는 곳으로 사람도 다니고 짐승들도 그 길을 이용한다. 햇살도 우거진 수풀 사이로 벌어진 물길을 따라 숲 안으로 스며든다. 숲길은, 사람에겐 길이지만 짐승들에게는 장벽이 되어버린 문명 속의 길과는 다르다. 길은 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다. 자연이 허락한 여백을 따라 겸손하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 이전까지는 문명도 생태도 이 길을 통해 풍요롭게 흘러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길에 있어서 너무 폭력적이다. 길을 내면서, 길을 가면서 수많은 생명을 짓밟는다. 산을 깎고 강을 메워서 만든 건 길이 아니라 조급함과 탐욕과 강박의 배수로일지도 모른다. 이 숲에서, 원초적인 길 위에서 다시금 길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끼와 유기물로 덮인 화강암반 위로 흐르는 좁다란 실개울은 그대로 길이 되었다. 사람도 짐승도 이 길을 따라다닌다. 

창조 역사 관람권

숲길 주변은 태곳적 신비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이 길을 걸으며, 2만 년 전 빙하로 덮였던 이곳이 어떻게 지금의 울창한 숲이 되었는지를 상상해본다. 빙하가 쓸고 간 산지에는 매끈한 바위만 남았을 것이다. 어디서부터인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이끼 포자가 바위 표면의 미세한 틈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서서히 바위를 덮은 이끼는 한 해 한 해 더 두터워졌을 것이다. 도톰한 이끼 융단은 수분을 잘 머금어 늘 촉촉했을 것이다. 그 위에 바람을 따라 날아온 수천수만의 고사리 포자가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중 한두 개가 싹이 트고 뿌리를 뻗으면서 바위 위에 활착한 이끼를 더 단단하게 붙잡았을 것이다. 바위 표면은 생을 다한 식물들 잔해가 쌓이면서 유기물층이 두터워지고, 그 위로 새들이 떨어뜨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씨앗이 뿌리내렸을 것이다.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황량했던 바위산이 침엽수로 덮이고 동물들이 깃들면서 지금 내가 선 숲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애디론댁 숲길에서는 이 거친 시나리오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정에 해당하는 모든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이끼가 덮기 시작한 바위, 모자처럼 고사리로 덮인 바위, 그 위에서 올라오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싹들. 한 지역의 식생이 이루어지기까지, 사람에게는 수십 세대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 흘러야 하지만, 그 자연사(自然史)적 서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직접 확인하는 일은,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 관람권을 손에 쥔 것 같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간은 정원사에게 의미 있는 학습 기회이자, 신앙인에게 가장 순수한 의미의 영성이 함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잘 가꾼 정원을 많이 다녀보는 것만큼 정원 공부에 좋은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숲과 습지와 초원을 탐험하는 일은 정원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자연은 정원의 기원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최근 부쩍 이러한 명제를 전제로 정원을 연구하는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자연에서 정원을 공부하는 정원가들의 현장 탐방도 활발하다.

실제로 숲길 곳곳에는 눈길을 끄는 식물들이 많다. 신기하고 작고 예쁘다. 첫 인류의 눈에 비친 선악과만큼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그걸 떠다 마당이나 화분에 심는다. 대부분 죽는다. 야생화 한 포기를 떠다 옮기는 일은 쉽지만, 그것이 자라던 곳의 온도와 습도, 햇빛의 양, 바람, 그리고 토양과 그 속의 미생물, 주변 동반 식물들을 옮기는 일은 그렇지 않다. 자연주의 정원가들에게,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식물로 땅을 장식하는 행위를 넘어서 식물들과 거기 깃든 생물들의 서식처를 조성하는 일이다. 이 어려운 작업을 위해서도 자연 현장을 답사하고 생태를 조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정원사의 역할은 개별 식물을 돌보는 데 국한되지 않고, 식물 공동체(plant community)를 가꾸는 일로 확장된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경작’이다. 식물 공동체란 자연환경에서 관찰되는 식물들의 조합이다. 본래 서식지에서 식물들의 조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관찰하고 그걸 정원에 적용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껏, 어쩌면 앞으로도 자주 생태 하천이나 수변 공원을 조성한다면서 잘 보존된 하천 생태계를 뒤엎어왔다. 우리는 개발과 보존이 상충된다고 배워왔고, 그 충돌 속에서 살아왔다. 마치 구원은 믿음의 문제인가 행위의 문제인가 따지는 것과 같은 논쟁 속에서 힘을 허비해왔다. 사람은 자연을 개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보존하지 않아도 살 수 없다. 개발과 보존이 통합된 개념은 없는 걸까?

나는 창세기에 나오는 경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믿음의 의미에서 행위를 분리해낼 수 없듯이, 만물의 생육과 번성을 위한 다스림 속에서 개발과 보존을 분리할 수 없는 법이다. 개발인가 보존인가, 믿음인가 행위인가, 창조인가 진화인가, 화초인가 잡초인가 하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우리는 더 창조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대안들을 탐색할 동기와 기회를 상실해왔다.

몇 해 전 뉴욕타임스 사옥의 중정 정원이 새로 꾸며졌다.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 그늘 아래 초록색 고사리와 사초(莎草)속 식물들을 심어놓았다.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소박하고 담백한 정원이지만 자연스럽고도 세련된 도심 속 정원으로 주목받았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사실 자작나무 그늘에서 고사리와 사초가 섞여 자라는 모습은 북미의 숲에서 가장 흔한 경관 중 하나다. 소재의 평범성에도 맨해튼의 빌딩 숲 한가운데 복원해놓은 자작나무와 고사리 군락은 미학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쩌면 생태적으로도 꽤나 비범한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창세기 속 창조 기사를 연구하는 일은 대단히 난해하지만,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든 창조의 시그니처를 경험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다만 무뎌진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깨우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내게는, 어쩌면 정원의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원은 영성을 가꾸는 최적의 장소 중 하나다.

자작나무와 고사리 군락은 북미 동부의 숲에서 가장 흔한 경관 중 하나다.

성소를 향한 모험

숲길을 걸으며 수많은 식물을 만난다. 이름을 아는 식물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자연 상태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자라던 식물들 중 정원 식물로 가치가 있어 보이는 한두 가지가 선택되면, 나머지는 잡초라고 불렸다. 예쁘지 않거나, 그래서 쓸모가 없거나, 지나치게 흔한 것들도 잡초로 불렸다. 농부도 농작물 이외의 식물을 잡초라 불렀고, 어부는 그런 물고기를 잡어라고 불렀다. 쓸모없고 성가신 존재들이다. 사람에게도 그런 말을 쓸까.

성경에는 잡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수많은 다른 부족 사람들도 이스라엘 민족과 섞여 출애굽에 나섰는데, 한글 성경은 그들을 잡족이라 표현했다(출 12:38). 원어로는 ‘섞였다’라는 의미이지만, 한글 번역이 지나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 신앙적 기준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민족, 이름 없는 사람들,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을 잡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과 분리된 교회가 일으켜온 문제들의 근원이다. 교회가 담을 높이고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살아온 시간만큼 그 문제들은 교회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성전의 원형은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자신을 가둔 창조주의 임재다. 에덴이 그랬고, 광야의 성막이 그랬다. 정원의 원형도 자연인데, 사람들은 정원을 문명의 하부구조 아래 두었고, 야생과 정원의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그러나 생태계와 분리된 정원은 마치 현실과 분리된 종교 생활과도 같다. 종교와 일상의 간격을 더 벌어지게 하는 데 ‘세상적’이라는 용어가 큰 몫을 했다. 이 단어는 교회와 현장 사이에 높은 울타리가 되었다. 교회 밖 이웃들을 ‘세상 사람들’이라는 범주로 싸잡아 깎아내렸고, 교회 밖 상황들을 ‘세상일’이라며 정죄했다. 과거 정원의 세계에서 어떤 식물을 ‘잡초’라고 부를 때와 같은 본질의 문제이다. 언어는 인식을 제한한다. 잡초, 화초, 야생화 등 식물을 구분하던 전통적 범주들이 정원과 정원 식물에 대한 관점을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연주의 정원이 흐름을 형성하면서 인식의 경계들이 무너지고 있다. 개별 식물에서 식물 공동체로 관점이 옮겨지기 시작했고, 나물, 약초, 또는 잡초의 범주에 갇혀있던 식물들이 정원 소재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잡족’들에게 문을 여신 것처럼, ‘잡초’들을 막았던 휘장이 찢어졌다.

미국붉나무(Rhus typhina)가 뉴욕 하이라인의 해 질 녘 겨울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있다. 이 나무는 고속도로 주변 절개지와 산자락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며, 새가 퍼뜨린 씨앗이 정원 곳곳에 싹을 틔워 그동안 성가신 잡목으로 취급받았다.

지난 1년간, 좋은 정원과 좋은 교회를 찾는 두 갈래의 순례길이 가끔씩 교차하는 지점에서 글을 퍼 올렸고 독자들과 나눴다. 그 여정은 모험이었다. 스위스 의사이자 상담가인 폴 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IVP, 2005)에서는 그리스도인 삶의 면면을 모험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했다. 모험의 본질은 창조의 결정 속에 담긴 신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험심이 어떠한 형식으로 표출되든 간에 그것이 신의 형상의 일부라 믿는다. 이직,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시도, 낯선 나라로 이주하는 것, 어려운 전공을 선택하는 것, 극한 스포츠에 입문하는 것, 그리고 오래 굳어진 인식의 틀을 허무는 것도 마찬가지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원 중앙의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완전한 성소이자 완전한 정원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신발을 벗어야겠다. ‘좋은 정원이란 무엇인가’ ‘좋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짐을, 불현듯 떠오른 야곱의 경외 어린 탄식 때문에, 여기서는 내려놓을 수밖에 없겠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 ‘정원의 길, 교회의 길’은 이번 회로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성희
미국 뉴욕식물원의 2년 차 가드너이다. 식물원 내 수목원 및 부지관리를 담당하는 정원운영센터(Horticultural Operations Center)를 거쳐 지금은 식물 번식과 보존을 담당하는 놀런 그린하우스(Nolen Greenhouses)에서 근무 중이다. 북미 자생식물을 소재로 한 자연주의 정원디자인을 추구하며, 뉴욕주 북부의 혹한기를 견딜 수 있는 다양한 정원 식물을 발굴 중이다. 뉴욕의 주도인 올바니(Albany) 소재 올바니한인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