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기 쉬운 삶에 주어진 하나의 무기

[397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2023-11-30     박혜은

그럼에도 ‘문학(비평)’을 내게 의미 있는 지적·문화적·정치적 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던지고 벼려온 질문과 관점, 인식의 기준들에 대해 서술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 ‘문학적 취향’이 만들어져온 과정의 기록이다.
―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월의봄, 2019), 11-12쪽.

너덜너덜한 마음으로 퇴근해 집에 돌아와 저녁도 거르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고만 싶을 때. 오래 머물던 자리에서 등 떠밀리듯 다른 자리로 옮겨야 했던 순간, 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잉여 시간을 처리해야 했을 때. 내가 느끼는 현실감각이 오로지 나만의 것인 양 고독하고 비참했을 때. 나는 유독 예민하고 유난하게 감정을 포착하는 사람일까 억울했을 때.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는 걸까 궁금했을 때. 단편소설을 펼쳐 읽었다. 짧은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오늘의 나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오랜 습관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이하 사진: 필자 제공

1. 〈머문 자리〉(김산아, 《머문 자리》, 솔, 2023)

선교단체 간사를 사임한 지 10년이 지났다. 지난 10년간 내가 어떤 모양으로 사회에 자리 잡았는지 이력서를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5년째 같은 회사 소속으로 일하다 보니 최근엔 이력서를 업데이트할 일이 없었는데, 여러 해 은둔 청년과 글쓰기로 만날 기회를 준 푸른고래 리커버리센터에서 이력서를 새로 요청했다. 어느새 활동가로 살았던 시간만큼 사회에서 이런저런 일을 거친 내 시간이 보인다. 캠퍼스에서 청년들과 시간을 보냈던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반빈곤 운동 사회단체에서 일하다 “얼마 되지 않는 활동비를 받으며 신념만으로 버티는 생활이 한계에 다다른 때” 일을 그만두고 어쩌다가 “남편 회사에서 스톡옵션으로 받아 십 년 넘게 방치했던 주식” 가격이 튀어 올라 강남 아파트에 입주해 이전 생활 방식과 신념을 바꿔가는 〈머문 자리〉 속 재희를 보며 생각해본다. 같이 팟캐스트를 하는 책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여러 주제로 수다를 떨다 교회 사역자 월급 이야기가 나와 ‘그건 세전인가요?’ 물었더니 이제 사회인(?!) 다 되었다며 웃는다. 사역자 월급에 세전/세후가 어디 있느냐며. 4대 보험은커녕 한 달 살기에도 버거운 (내가 모은) ‘후원금’을 매달 받으며 지냈던 일이 전생 같다. ‘속물 되지 말자’며 서로 다짐하던 촌스러운 시절을 지나 이제는 세련되게 내 욕망과 능력을 과시하는 일에 능숙한 재희와 내가 ‘머문 자리’는 오늘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될까.

2. 〈점심 같이 먹을래요?〉(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문학과지성사, 2022)

지금은 사무실 라이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근무 형태로 노동하고 있지만 사무실에 속해 일할 때는 점심시간에 누구와 밥을 먹느냐가 좀 예민한 문제였다. 열 명이 안 되는 한 사무실에서 직급과 성별 구분 없이 우르르 나가 다 같이 먹던 시절, 성별로 나눠 먹던 시절, 직급별로 따로 먹던 시절을 거쳐 중간 관리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습을 경험하기도 했다.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를 챙기며 화합을 중시하던 중간 관리자가 퇴사한 후 그 자리를 채운 직원은 교묘하게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단독 행동을 하며 점심시간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서로 할 말도 없고 공통 주제가 없는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하며 밥 먹는 것도 딱히 즐겁지 않지만, 뿔뿔이 흩어져 밥 먹는 풍경을 보니 마음이 스산해졌다. 특히 그런 풍경 속에서 일종의 알력 관계가 읽힐 때는 더욱더. 리얼한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직장 속 점심 풍경을 그려낸 젊은 소설가의 단편이 마음에 들어온 이유다. ‘노동’이라는 한없이 리얼한 주제를 리얼리즘으로 그렸다면 가슴이 콕콕 쑤시고 머리가 복잡했을 텐데, 대기 발령 상태인 유귀동 차장을 ‘로비에 걸린 그림’으로 표현한 슬픈 위트 덕에 담담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점심을 누구와 먹을지 결정하는 일이 때로는 ‘연대’의 한 몸짓이 될 수도 있겠다.

3. 〈장국영이 죽었다고?〉(김경욱, 《장국영이 죽었다고?》, 문학과지성사, 2005)

헌책방에서 일할 때, 가까운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가공해 콘텐츠로 만들 일이 많았다. 2004년을 다룰 때 김경욱의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소재로 글을 썼는데, 2020년대에 읽은 2000년대 초중반의 세계는 다른 행성의 일처럼 아득했다. 온라인 세계에서 맺은 가벼운 관계가 오프라인으로 가시화되며 주인공에게 묵직한 삶의 활력을 선물하는 결말은 단편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해 뒤늦게 이 작품을 애정하는 단편 목록에 끼워 넣었다.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겨우 존재할 수 있던 사람”인 주인공도 예기치 못한 경험으로 어떤 가능성이란 걸 꿈꿔볼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가 2000년대가 아니었나 싶다.

4. 〈벚꽃 새해〉(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우연히 소설의 화자가 나와 동갑이라는 걸 발견했을 때 받는 이상한 위로가 있다. “본인은 스물아홉 살이라고 우기건만 가족이나 친구들 모두 서른으로 알고 있던 2009년의 봄”, “그해 5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달까.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불행한 사건도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그가 그 시기를 인생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다고 말하는 주된 이유는 그해 4월에 정연과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2009년이 한참 지난 후에 읽은 작품이지만 그해의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헤아려보았다. ‘그 불행한 사건’ 속에서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고, 소설 속 화자 성진처럼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헛된 시간’만 보냈던 것 같다.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라는 말을 건네줄 ‘명품시계 정시당’ 노인 같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람에게 열정을 갖고 공동체를 우선에 두고 살았던 2009년의 의미를 찾았을까. 확실한 건, 이 작품 제목 때문에 벚꽃이 만발할 때쯤 다시 삶의 의지를 일으켜 새해처럼 시작을 도모해볼 수 있게 된 것.

5.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윤성희, 《거기, 당신?》, 문학동네, 2004)

언제까지 영원할 것 같았던 ‘공동체’는 내가 조직에서 나오자마자 나와 큰 상관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간사를 사임한다고 하자 어떤 후배는 내게 “그래서 앞으로 뭐할 건데?”라고 물었다. 사역할 때도 혼자 분투한다고 느꼈는데, 이제 내 앞길도 내가 알아서 마련하고 대답까지 해야 하는 게 곤혹스러웠다. 계획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후배는 순진하고 친절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9년이나 사역하면서 어떤 사회적 커리어도 남기지 못했고 남편도 없는 30대의 내게 뭘 할 건지 물어본다는 건 뭔가 대안을 제공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물음 같으니까. 그렇게 공동체, 공동체 하며 살았는데 이게 뭐지? 그래서 남자 간사들은 신학을 했다지만 그게 그들에게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정쩡한 시절에 읽은 이 단편에서 난 사람이 계획 없이 우연히 만난 사람들하고도 무언가를 작정해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엄마는 자기와 쌍둥이 언니를 낳다 죽고, 아빠는 길에서 비명횡사하고, 언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길에서 사고를 당했고, 주인공은 누구의 호의도 입지 못한 처지에서 삶을 꾸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찜질방에서 만난 또 다른 잊힌 존재들과 만두 가게를 차려 성공하는 우여곡절이 이 작품에서는 일어나고야 만다. 이런 꿈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날 거라 믿진 않았지만, 계획되고 의도된 만남 속에서 익숙하게 관계를 맺어왔던 방식을 깨뜨릴 상상력을 가질 수는 있었다.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세계로 발을 내디딜 용기도.

6. 〈쿠문〉(김성중, 《국경시장》, 문학동네, 2015)

“류는 예술 기계들을 풀어놓음으로써 대중으로 응고되어 버린 도시민의 의식에 균열을 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재능의 대중화를 꿈꾸던 20대 천재 류의 이상주의를 읽으며 20대의 내가 꿈꿨던 이상과 종말론의 정체가 지닌 무모함의 성격을 알게 된 30대의 어느 날.

7. 〈바늘〉(천운영, 당선 소감)

당선 소감이나 ‘시인의 말’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쓴 작품 곁의 글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최고의 당선 소감으로 여기는 건, 내 선배인 게 드물게 자랑스러운 천운영이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쓴 글이다. “나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 요리사가 되기를 포기하지 못한 나는 때때로 북창동 거리를 서성이며 사각형의 커다란 칼을 훔쳐보곤 한다. 이제 나는 칼빛 목소리를 꿈꾼다. 활어의 결을 예리하게 떠내는 회칼이 아니어도, 위엄에 찬 무사의 장검이 아니어도 좋다. 동태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발라내는 생선 장수의 칼이어도 좋겠고, 밤샘 작업으로 덥수룩한 턱수염을 깎는 한낱 면도날이어도 좋겠다. 한 포대에 삼천 원 받고 하루종일 밤껍질을 벗겨내던 할머니의 밤칼이면 더욱 좋다. 내가 쓰는 소설이 이 견고한 세계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질 수 있기를. 섬뜩하게 베어져 나온 삶의 단면들이 그 속내를 드러내고 도마 위에 펼쳐지기를 꿈꾼다. …” 〈바늘〉은 바로 이 소망을 적실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내게 천운영의 〈바늘〉 같은 밤칼은 무엇일까, 지금도 생각한다.

8. 〈사랑을 믿다〉(권여선, 《사랑을 믿다》, 문학사상사, 2008)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할 때 책장 가득 꽂혀있는 책의 책등이나 방바닥에 쌓여있는 책들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금 내가 읽어야 할 책은 어떤 책일까. 혹시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 가끔 어떤 책이 나를 부르기도 한다. 이 많은 책 더미 속에서 나를 집어달라고. 그날은 지하철 시간에 맞춰 나가려고 서둘렀고 어떤 책을 가지고 갈지 빠르게 책 더미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때 여러 책 기둥 중 한 기둥 아래쪽에 깔려있던 책이 나를 불렀다. 나를 가져가라고. 기둥을 무너뜨리고 허겁지겁 들고 간 책은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사랑을 믿다》. 사랑과 믿음에 모두 취약한 내가 이 책을? 일단 집어 들고 지하철에 앉아 앞부분에 실린 대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를 한 호흡에 읽었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휴. 그래,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그때가 서른다섯, 인생의 한낮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날 불렀던 걸까 살짝 전율이 일었다. 당시 기준으로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던 서른다섯에 인생의 어두운 숲에서 헤매던 단테의 《신곡》이 생각났다. 인생의 절반 지점에서 헤매는 한국 여성 독자는 이제 단테가 아니라 권여선이라는 선택지도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넉넉해졌다. 그런데 서른다섯이 인생의 한낮이며 더는 밝은 날이 오지 않는 거 맞아? 지금은 이런 의문이 든다. 여둘톡1) 언니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아.

9. 〈입동〉(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사랑을 믿다〉처럼 특정 나이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벚꽃 새해〉처럼 특정 시기를 지날 때 떠오르거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도 있다. 김애란의 〈입동〉도 그런 작품인데 이 글을 쓰는 입동 즈음, 난 어김없이 이 작품을 떠올렸다. 11월, 이제 막 추워지기 시작한 때, 자식의 상실을 경험한 부부가 복분자가 튀어 얼룩덜룩해진 벽지 위에서 도배지를 맞잡고 도배하는 장면은 내 독서 생활에 잊지 못할 하나의 문학적 장면이다. 2014년 겨울에 나온 이 작품 속 부부가 겪는 상실이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다른 사건을 겪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줄, 처음 읽을 때는 몰랐다.

10. 〈법 앞에서〉(프란츠 카프카,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1998)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선배가 어느 날 헤어지며 내게 꼭 읽어보라며 권해준 작품. 사역한다고 하면서도 확신보다는 자주 흔들리는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내가 안쓰러웠을까. “오직 나만 들어가도록 정해진 입구”를 찾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책 사줄 시간은 없으니까 꼭 사서 보라고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넣어주던 밤의 정류장이 왜 잊히지 않지?

그리고… 〈frail〉

이 모든 짧은 이야기들과의 조우 이전에 내 삶의 첫 단편으로 나예리의 〈frail〉이 있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여자 고등학생이 가족 사이에서 겪는 상처와 회복의 기록인 〈frail〉을 읽으며, 문학을 읽는 여자 고등학생이 결국 얼마나 ‘frail’한 상태인지 깨달았다. 매미가 울어대는 한여름 횡단보도 위, 자기가 좋아하는 남학생과 교차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한겨울 둘이 손을 맞잡고 끝나는 구성부터 문학 전집을 사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비난하는 아빠, 동생의 첫사랑이 보낸 편지를 낚아채 동생의 사랑할 권리를 박탈(!)하는 공부 잘하는 언니 캐릭터, 이야기 전반에 숨어있는 하나의 반전까지. 그 모든 게 완벽한 단편이었다. 오로지 10대만이 경험할 감수성을 포착해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해준 나예리의 〈frail〉 때문에 내 부서지기 쉬운 감수성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 삶의 반려자는 짧은 이야기가 되었던 게. 〈frail〉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한없이 부서지기 쉬운 내 삶의 무기이자 자원이 되어준 단편들은 다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무수하다. 앞으로도 난 여름이 되면 〈frail〉을 다시 읽으며 무른 마음을 지닌 이들을 돌아볼 거고, 봄에는 〈벚꽃 새해〉를 떠올리며 지켜야 할 마음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입동〉을 펼쳐 내 이웃들을 생각할 거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이야기들이 계속되겠지.

■ 주

1)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줄임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황선우, 위즈덤하우스, 2019)의 연장선상에서 만드는 팟캐스트 ‘여둘톡’에서 김하나, 황선우 두 작가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갖는 편견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낸다. 특히 여성의 나이로 삶의 반경을 제한하는 문화에 대항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다채롭고 재미있게 사는 삶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펼쳐낸다.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