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구한말·일제강점기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 번뇌한 고단한 양심
[397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한국기독교를 만든 증인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기 사이, 500년 조선왕조가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던 시기에 태어나서, 망국과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의 모든 시기를 오롯이 경험하며 살아낸 대표적인 기독 지식인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한국인으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외(일본·중국·미국)로 유학하여 근대 학문과 선진사회를 경험한 탁월한 국제인이었다. 또한 미국 남부를 가장 먼저 경험한 한국인,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첫 한국인 기독교인으로서 해외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가장 먼저 공부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만민공동회, 흥업구락부 등을 통해 구한말과 강점기 개화파 개혁운동과 자강운동을 주도했고, 개성 한영서원, 평양 대성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YMCA 등을 통해 교육운동과 언론운동을 주도한 민족운동가이기도 했다.
반면, 윤치호는 당대의 무력하고 무지한 한국인이 자치하는 독립국가의 가치와 가능성에 의혹을 품은 현실주의자이자 패배주의적인 비관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런 냉정한 판단하에, 그는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인을 싫어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유능한 그들이 통치하는 식민 정권에 ‘협력’하여 민족과 사회를 점차 개조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이라 믿게 되었다. 심지어 이 선택을 ‘애국’이라고 믿고 생애 마지막에 결국 ‘친일’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망국 식민지의 지독히 현실적인 지식인의 비애와 비극, 고단한 양심과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 독특한 인물이다.
윤치호는 근대 한국 인물 가운데 문헌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1883년 1월 18세부터 1945년 12월에 80세로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 무려 62년간 성실하게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는 역사상 한국인이 남긴 일기 문헌 중 그 양과 질에서 실제로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이 엄청난 사료 덕에, 현대 연구자들은 19세기 하반기와 20세기 전반기 한국 및 그가 경험한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초 정보뿐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한 지식인이 자체 평가한 정치, 종교, 사회, 국제 관계의 주요 사건, 사고, 인물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우리와 동떨어진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관심사를 갖고,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며 살았는지를 비교적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일기는 첫 5년은 한자, 이후 2년은 고어체 한글로 쓰였다가, 미국 남부 밴더빌트 대학 유학 시절인 1889년 12월 7일부터는 내내 유려한 영어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이 일기를 토대로 연구를 지속해왔다.1) 물론, 놀랍도록 복잡다단하고 다면적인 정체성을 지닌 논란의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다.
세계인의 탄생(1865-1895)
윤치호는 고종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 후 이듬해인 1865년 1월 23일에 충남 아산에서 해평 윤씨 윤웅렬(尹雄烈, 1840-1911)과 그의 둘째 부인 이정무(1844-1936)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그는 윤웅렬의 3남 2녀 중 큰아들이자, 다섯 남매의 셋째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1856년에 무과에 합격한 후, 충청도 감영중군 및 공주중군, 함경북도 병마우후 겸 토포사로 활동한 무관이었다. 1880년에 운웅렬은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서 흥아회에 참석하고, 귀국 후 별기군, 개화당으로 활동하면서 개화파 인사로 편입된다.
아홉 살 되었을 때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윤치호는 10대 중반에 아버지를 통해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로써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후에 개화파 인사로 알려지는 이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몰락한 향반가의 서얼 출신이라 불이익을 당한 자기 경험이 아들에게도 영향을 줄까 염려한 아버지 윤웅렬은 16살 된 아들을 어윤중이 이끄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넣어서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윤치호는 도쿄의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했다. 이로써 게이오 의숙에 입학한 유길준, 유정수와 함께,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도진샤에서 그는 일본 개화파의 대부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게서 동양인 입장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의 개념과 가치, 한계 등을 배우고, 일본어와 영어도 습득했다. 언어 재능이 탁월했던 그는 이후 일본어, 영어는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중국어,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만큼 외국어에 능했다고 한다. 윤치호는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체류하다가 미국을 거쳐 5월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결과 한국에 파견된 첫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 1826-1913)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며 국제 감각을 크게 향상시켰다. 오늘날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도 임명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미국 공사관, 고종, 개화파 정치인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으며 구한말 정치 외교 무대에 뛰어들었다.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혁명의 주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가까웠음에도, 개량적이고 현실적인 근대화주의자였던 윤웅렬과 윤치호 부자는 급진적이고 준비가 부실한 혁명이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주도자들과의 친분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윤치호는 이듬해 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망명 직후 1월 28일부터 미국 영사관의 알선으로 미국 남감리회의 영 J. 앨런(Young J. Allen, 1836–1907) 선교사가 세운 기숙학교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 없이 입학했지만, 앨런과 W. B. 본넬(W. B. Bonwell) 선교사에게 인격적인 지도를 받으며 그는 성경 공부와 교회 출석을 지속했다. 그가 정식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상하이에 온 지 26개월가량 지난 1887년 4월 3일이었다. 세례를 받고 남감리회 신자가 된 그는 일기에서 이날을 “가히 일생에 있어 가장 큰 날이라 하겠다”라고 적었다(《일기》 1887년 4월 3일 자).
중서서원에서 공부한 지 3년 4개월가량 지난 1888년 9월 중순에 선교사들은 윤치호에게 남감리교가 테네시의 내슈빌에 세운 밴더빌트 대학으로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다. 선교사들에게 윤치호가 학업 능력과 신앙, 그리고 출신 배경에서 가장 탁월하고 전도유망한 학생 중 하나로 여겨졌다는 증거였다.
1888년 10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윤치호는 기차 편으로 이동하여 11월 4일 내슈빌에 도착했다. 윤치호는 밴더빌트에서 신학과 학생으로 1891년 6월 17일까지 약 2년 반 동안 학업을 지속했다. 6월에 밴더빌트에서 졸업한 후에는 상하이의 선교사들로부터 추가 공부를 허락받아, 조지아주 옥스퍼드의 에모리 대학에서 2년간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더 공부했다. 약 4년간의 미국 남부 체류 기간에 그가 경험한 일과 생각이 일평생 세계관을 결정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학업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곧 학교 수업과 토론회, 방과 후 동아리 활동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교단 선교사들이 특별히 선택해서 보낸 동양인이었으므로, 학교와 교회의 백인 기독교인들은 윤치호를 애정과 관심으로 특별히 돌보았다. 윤치호도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이상적’ 동양인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일기를 읽어보면, 윤치호의 내면은 별로 건강하지 못했다. 1860년대 남북전쟁 종결 후 미국 남부에 더 이상 신분상의 노예는 없었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상황에서 볼 수 있듯, 인종 ‘분리’로 나타나는 인종차별은 1960년대까지도 여전히 극심했다. 1890년대에 미국 남부로 간 유색인종 윤치호는 남감리회 교인들과 함께하는 교회, 동료 학생들과 함께하는 학교에서는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비록 백인종이라는 인종적 우월감, 선진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이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도, 선교지에서 온 미래 유색인 일꾼을 대하는 태도는 친절과 환대였다. 그러나 교회와 학교 경계 바깥은 차별의 세계였다. 그는 이 ‘성소’ 바깥에서 백인 아이들이 뱉은 침을 몸에 맞는 경험, 백인 불량배들에게 얻어맞은 경험, 백인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면서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교회에서의 경험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방학이나 주일에 선교 집회나 간증 집회에 자주 초청되어 선교지 한국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한국을 최대한 비참한 곳으로 묘사해야만 하는 현실에 굴욕감을 느꼈다. 미국과 비교해서 여러모로 비참했던 한국 현실은 실재였지만, 한국을 더 비참하게 묘사할수록 그를 후원하기 위해 성도들이 내는 헌금 액수가 많아지는 모순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미 일본과 중국에서 목격한 현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약육강식 국제 현상에 대한 냉정한 분석, 당대 유행한 사회진화론에 대한 공감, 자립이 위태한 세계 최빈국 출신 양반 지식인 청년의 예민한 양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했다. 그는 유학 시절부터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괴로워했다. 결국 그는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확신하게 되었고, 귀국 후 선교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을 힘 있는 민족으로 개조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판단하게 되었다(《일기》 1885년 5월 24일 자, 1888년 7월 23일 자, 1888년 12월 29일 자, 1890년 5월 4일 자, 1891년 2월 2일 자, 1891년 10월 23일 자, 1892년 9월 13일 자, 1892년 11월 20일 자, 1892년 12월 30일 자).
한편, 미국 남부에 있던 이 시기에 윤치호는 예상치 못하게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1885년에 북장로회 첫 목사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의사 호턴과 결혼한 후 1891년에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체류 중에 그는 신학교, 교회, 선교 집회 등지에서 한국 선교 현황을 보고하며 신학생과 기독 청년에게 한국 선교를 권했다. 1891년 10월 22일부터 내슈빌에서 신학생들의 선교 집회인 전국 신학교 선교 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 선교지 한국을 알리는 강사가 두 사람 세워졌는데, 한 사람이 언더우드, 다른 한 사람이 지난여름 밴더빌트에서 에모리로 이동했던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25일에 짧지만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비공식 연설을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 학생인 남장로회의 루이스 테이트와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의 윌리엄 레널즈가 참여하고 있었다. 결국 언더우드 가문과 남장로회 해외선교위원회가 결의하여 테이트와 레널즈를 포함한 7인이 1892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됨으로써, 이후 호남 지역에 개신교가 뿌리내리게 되었다(《일기》 1891년 10월 25일 자).
1892년에 남장로교인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에 기여한 윤치호는 1893년 9월에 남부를 떠나면서, 남감리교도 한국 선교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와 돈을 에모리 대학 캔들러 총장에게 보냈다. 이를 계기로 남감리회는 1895년 10월에 클래런스 F. 리드(Clarence F. Reid, 1849-1915)가 이끄는 첫 남감리회 선교팀을 한국에 파견했다. 윤치호를 통해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두 교단이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것이다.
대한제국 정치인 및 개혁운동가(1895-1910)
1893년 9월에 미국을 떠난 윤치호는 우선 자신을 보낸 상하이의 중서서원으로 돌아가 교사로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1895년 2월 13일, 10여 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귀국했다. 귀국과 동시에 신줏단지와 종(노비) 문서를 불태움으로써, 자신이 기독교인이자 근대적 자유주의자임을 선언했다.
윤치호는 당대 한국인 중 가장 해외 경험이 풍성한 인물이었기에 귀국 직후부터 구한말 정치 무대에 끌려 들어갔다. 2월 15일부터 의정부 참의, 총리대신 비서관, 학부협판, 외무부협판 등으로 임명되었다.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이듬해 1896년 7월 2일부터 이상재, 서재필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를 세웠는데, 이 협회는 처음에는 사교 모임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조직이자 정당으로 발전했다. 독립협회 설립 이전 4월 7일부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독립협회 설립의 길을 닦았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전성기인 1898년에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및 발행인, 독립협회의 일부였다가 1898년 4월부터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성장한 만민공동회 최고지도자 등을 맡았다. 이들을 통해 근대화된 서양 및 일본의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박애, 시민사회, 자본주의, 산업혁명 등의 개념을 한국민에게 알리는 데 주력했다.
윤치호가 귀국한 때는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정치적 격변이 급박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1895년 10월 8일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왕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자, 이듬해 2월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했다. 이 아관파천으로 정부와 러시아 관계가 밀접해지자, 윤치호는 민영환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4월 1일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여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를 시작으로 여러 유럽 국가를 순방한 후, 귀국길에 프랑스령 베트남 사이공, 영국령 홍콩을 들렀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문명 수준이 우월한 국가나 민족이 열등한 상대를 식민지로 정복하여 문명과 기술을 전수하는 방식의 개화와 발전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이듬해 1897년 10월 12일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국체를 바꾸었다.
귀국한 그는 학무 아문참의,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맡아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도 계속 역량을 쏟았다. 그러나 두 영역에서의 활동 모두 자주 저항에 부딪혔다.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라는 상소를 황제에게 올렸다가, 이 수구파 관료들과 그들의 후원을 받는 보부상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황국협회 등으로부터 제정을 타파하고 공화정을 모색한다거나,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모함도 들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토론 내용 중에 노비 해방이나 민주적인 직접 투표 같은 주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모함을 당한 결과, 서재필이 1898년 5월 14일에 국외 추방되었고, 독립협회도 얼마 후 강제해산당했다.
중앙 정계와 계몽운동에서 좌절을 맛본 윤치호는 1899년 이후에는 주로 지방에서 외직을 맡았다. 1899년 1월부터 1904년 3월까지 그는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및 덕원부윤, 원산감리사, 삼화감리사 및 삼화부윤, 원산항재판소 판사, 함경도 안핵사, 천안군수, 전라남도 무안감리사 및 무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 달 뒤 다시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전쟁 중이던 1904년 8월에는 외무부대신 서리가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사건은 러일전쟁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딸의 한국 방문, 을사늑약이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1904년 2월부터 1905년 가을까지 한반도와 만주 남부의 주도권을 놓고 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근해에서 싸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 남부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쥐게 된다. 윤치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이 승리한 것을 반겼다. 그가 일본 승리를 반긴 배경에 아시아연대론과 황인종주의가 있다는 데 학자들은 대개 동의한다. 일본에서 1880년대에 등장한 아시아연대론 및 황인종주의는 동양의 제국들이 연대하여 서양의 백인 제국들, 특히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개화파 지식인 중에도 1890년대와 1900년대가 되면 이 입장에 동조하는 이가 많아진다. 미국 남부에서 유색인에 대한 미국인의 인종차별을 경험한 윤치호도 백인 인종주의에 분개한 결과, 스스로 자치 국가를 유지할 능력과 자격이 없는 한국인에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다(《일기》 1905년 6월 2일 자, 1905년 9월 7일 자).
1905년 9월 26일에는 민영환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군 해군 장교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열렸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만찬을 미국이 한국 독립을 돕기로 약속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헐버트와 윤치호, 이준, 이상재 등을 참석시켰다. 앨리스는 한국 특사가 아버지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7월에 이미 가쓰라-태프트 조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음을 알게 된 윤치호는 냉혹한 세계정세를 재확인한다. 이어서 2개월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을사늑약 이후 윤치호는 YMCA 청년운동, 교육, 강연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과 자강운동에 집중했다. 1906년 3월에 장지연,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했고, 10월에는 남감리교계 학교인 한영서원을 개성에 설립했다. 1907년 2월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4월에는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인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전덕기, 김구, 이승훈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했다. 1908년에는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특히 개성 한영서원에서 추구한 교육은 그의 교육관을 반영했다. 남감리회 캔들러 감독이 학교 건립에 필요한 재정을 모아 후원하면서 기독교 신학이나 인문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제안했지만, 윤치호는 한국에 필요한 것은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라고 답했다. 땀 흘려 일하는 가치를 기독교가 강조한다는 점, 그런 직업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국가들이 현재 세계의 주도자가 되었다는 점을 알게 함으로써, 관존민비, 문존무비, 남존여비 같은 구태의연한 유교 사상의 폐해를 일깨우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1910년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1910 세계선교 대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여하여 토착교회의 가치와 기능에 대한 연설을 유창한 영어로 전달했다. 이로써 20세기 전반기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윤치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105인 사건과 독립운동 무용론(1911-1938)
귀국 후 10월에 한일병합이 일어나자, 그는 총독부가 제안한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한영서원이 있는 개성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얼마 후 ‘신민회 사건’으로도 불리는 ‘105인 사건’으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05인 사건은 1911년 1월 1일부터 총독부가 서북 지방의 신민회 회원과 기독교인, 지식인, 부호 등에게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에 대한 누명을 씌워 조작한 사건이었다. 전해 12월에 독립군 양성 자금을 모으던 황해도의 안명근, 김구, 김홍량 등을 체포한 ‘안명근 사건’ 직후, 총독부는 총독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며 600여 명을 체포했다. 이 중 122명이 기소되었는데, 122명 중 105명이 5-10년형을 선고받았다. 가장 긴 10년형을 받은 6명 중에 윤치호가 있었다. 1913년 3월 20일의 최종 공판에서 윤치호를 비롯한 5명에게 징역 6년이 확정되었다. 그는 약 3년간 실형을 산 후 1915년 2월에 출옥했다.
출옥 후 윤치호는 경성 YMCA 총무와 회장, 연희전문학교 재단이사, 세브란스의전 재단이사 등, 기독교계 교육운동과 시민운동에 집중한다. 독립운동에 냉정하고 비관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1919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에 대한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 직전에 최남선, 송진우, 신흥우 등은 윤치호에게 찾아가서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외교운동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국제 정세에 대한 그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든, 제국주의 열강이 주도하는 이런 회의들은 1차 세계대전에 연루되어있는 약소국에 관한 내용만을 논의할 것이며,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서양 열강이 한국 독립을 지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일기》 1919년 1월 17일 자, 1919년 3월 2일 자, 1919년 3월 6일 자). 다른 한국인 지식인들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국제 인식과는 달리, 그의 이런 정세 판단은 냉철하고 정확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판단을 근거로, 3·1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 개조와 실력 양성 유의 소극적 개량운동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1920-1930년대 임시정부와 독립군에 의한 해외 무장투쟁, 의열 투쟁,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장 해방을 시켜주어도 독립과 자치를 유지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한국인에게는 열등한 민족성을 개조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민족개조운동과 실력양성운동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그는 현재 일본이 통치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차라리 일본인이 가진 우월한 특징, 즉 청결, 정직, 능률, 근면, 신용, 단합의식 등을 배우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가 그의 좌우명이었다(《일기》 1920년 8월 10일 자). “이웃들은 하늘을 날고 있는데 우리는 땅을 기어다니면서 감히 독립을 운운할 수 있는 건가?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국가를 다스리겠다고?”(《일기》 1919년 2월 28일 자).
흥업구락부 사건과 전시 협력(1939-1945)
1930년대가 시작되자 총독부는 명망 있는 윤치호를 내세워 내선일체 사상으로 한국인을 교화하기 위해 그를 자주 회유했다. 1932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안했으나, 윤치호는 이를 고사한다. 1930년대 전반기만 해도 윤치호는 일제의 한국 통치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지배자인 일본인들이 빈궁한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어디까지나 수탈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 시기에 총독부가 강화한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대아시아주의에도 반발했다. 한국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만들려 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하되, 조선인 나름의 특징을 존중하여 개별적인 민족으로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1936년까지도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제가 19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부터, 그는 친일 협력의 길로 돌아선다. YMCA와 감리교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했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지원병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참여했다. 여러 좌담회와 강연, 기고, 강연, 방송 등을 통해 “내선일체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
1937년 이후로 윤치호가 이렇게 적극적인 친일의 길에 나서게 된 이유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과 연관이 있다. 원래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서울에서 주로 YMCA와 연결된 기독교계 기호파 인사들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조직으로, 이승만이 미국에서 이끈 대한인동지회의 한국 지부 격이었다. 신흥우, 구자옥, 유억겸, 이상재, 박동완, 이갑성, 안재홍 등 종교인과 변호사, 의사, 교육자들이 회원이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총독부는 가을에 윤치호, 장덕수, 유억겸, 신흥우, 장택상 등 청구구락부 인사들을 먼저 검거했고, 이어서 이듬해 2월부터 9월까지 흥업구락부 관계자 54명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검거된 윤치호는 신원보증으로 동료들을 구하고, 자신에 대한 총독부의 의혹과 지속적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결국 총독부에 충성하기로 했다.
전향한 윤치호는 이때부터 적극적인 친일 행보에 나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선일체론의 허구성을 비판한 윤치호는 1939년부터는 내선일체의 자발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강압에 의해 소극적으로 친일을 행했지만, 이후에는 스스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내적 이론화를 이루었다. 김상태에 의하면, 그 내면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상태, 43-45쪽). 첫째,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장되자,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아시아를 정복한 탐욕스러운 서양 백인종과 그들에게서 아시아를 해방하려는 황인종 일본 간의 전쟁, 즉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개념화하는 현상이 등장했다. 윤치호도 이 논리를 수용했다. 그는 일평생 영국과 미국 등 앵글로색슨족을 동경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에 이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따라서 이성으로 영미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상화해도, 감정에 뿌리박힌 적대감과 분노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태평양전쟁은 이런 그의 감정을 해소하고, 개화된 황인종이 지배하는 세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둘째, 윤치호는 1920년대에 사회주의가 소개된 이후 이 사상에 극히 적대적이었다. 볼셰비즘은 기생(奇生) 본능이자, 더부살이하며 무위도식하는 악한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만약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동아시아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겨야 했다. 셋째, 일본이 제안한 내선일체에 동의하는 것이 한국의 발전과 성장, 번영을 위한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고 보았다. 이 시기 윤치호가 남긴 글에는 스코틀랜드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국과 앵글로색슨 민족을 가장 이상적인 근대국가이자 민족으로 간주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대영제국의 일부가 됨으로써 가난한 변방 국가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 국가의 일원이 된 것처럼, 한국이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길이었다(《일기》 1940년 5월 25일 자, 1943년 3월 1일 자).
이런 식으로 그는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전시 협력의 최전방에서 한국교회와 사회를 이끌었다. 그의 이런 행보가 광복 후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물론이다. 8월 15일 해방 후 친일 청산 문제가 논의되자, 그는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변호 서신을 10월 15일과 20일에 두 차례 보냈다. 첫 서신의 요점은 한국인이 아직 민주주의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 공산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따라서 자애로운 온정주의와 굳센 손과 이타적인 헌신으로 일어설 유력자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친일파에 대한 구체적인 변호를 담고 있다. 한국인 모두는 거의 예외 없이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으며, 강점기의 조선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 일본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누군가를 친일파라고 오명을 씌울 자격이 없다. 심지어 해방은 우리 손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 연합군 승리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일 뿐이다. 현재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으스대며 애국자인 척하는 이들은 그 선물에 감사하면서 다 함께 공익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김상태, 628-632쪽).
11월 말, 윤치호는 서울에서 치과 치료를 받고 개성으로 귀가하다가 노상에서 졸도했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12월 6일에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대한 비관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얼마간 퍼져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 윤치호의 일기 전체가 인쇄된 단행본 형태로 출간된 적은 없다. 대신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에서 전체(원문과 국역)를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일기 일부는 다음과 같다. 윤치호, 송병기 옮김, 《국역 윤치호 일기 1》(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윤치호, 박정신 옮김, 《국역 윤치호 일기 2》(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전자는 1883년 1월 1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의 한문 및 국문 일기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고, 후자는 1899년 12월 7일부터 1892년 12월 30일까지의 영문 일기를 번역한 책이다.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역사비평사, 2001)는 일제강점기인 1916-1943년의 일기 중 일부를 편역자가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