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엔도 슈사쿠
[397호 비하인드 커버스토리]
음극과 양극을 끌어당기는 이야기꾼 ―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을 중심으로
‘신앙이란 90% 의심과 10% 희망이다.’(조르주 베르나노스) 엔도 슈사쿠는 소설가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평생 의심했고 동요했지만, 누구보다도 10% 희망을 신뢰했다. 아마도 이 지점이었던 것 같다. 엔도의 글과 삶에 빠져든 것이. 이후, 엔도의 대표작 《침묵》을 원작으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한 〈사일런스〉(2017)를 전 교우들과 함께 관람했고, 청년들과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엔도의 문학과 삶을 통해서 받은 감동과 통찰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엔도의 소설에는 독특한 시점이 있다. 《침묵》을 집필할 때 엔도는 ‘후미에’(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지 않은 사람과 밟은 사람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이 후미에를 밟을 가능성이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순교자 시점이 아닌 배교자 시점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엔도의 《침묵》은 시점을 달리하면 누구라도 얼마든지 민들레 홀씨처럼 더 멀리 더 넓게 흩뿌려질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 엔도의 소설은 음극과 양극을 끌어당기는 이야기다. 엔도는 서구의 이분법과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불교에 만족하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머니 때문에 믿게 된 기독교였다. 몸에 맞지 않는 양복처럼 불편했던 기독교가 어느새 음극과 양극을 모두 끌어당기는 이야기로 그 앞에 나타났다. “인간의 좋은 것은 물론 추잡한 것에도 반응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그 종교는 진정한 것이 아니다.” 완벽함과 온전함은 다르다. 온전한 복음에는 밤과 낮이 있다. 순교자와 배교자, 의심과 희망, 실재와 실재 너머 초월, 진지함과 가벼움이 있다. 《침묵》으로 유명해진 엔도는 깜짝 희극배우로 변신한다. 《침묵》을 쓰면서 형성된 진지함을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엔도는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머물러있으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셋째, 엔도는 모든 고통에는 고독이 따른다고 말한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오롯이 홀로 감내하기에 외로움이 엄습한다. 강한 진통제도 소용없는 환자가 고통에 소리 지를 때, 간호사가 다가와 가만히 손을 잡아준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바로 그때 고통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병약했던 엔도가 환자로서 경험했던 이야기다. 엔도의 문학은 혼돈과 모순에 빠진 이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말한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의 책을 읽는 이유다.
열왕기하 13:21에는 엘리사 뼈에 부딪힌 시체가 살아난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은 그 본문을 오래된 유적지를 탐방할 때 죽은 영감이 살아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올해는 엔도 슈사쿠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책과 삶을 통해서 활력을 되찾고, 죽은 영감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이재현 | 충광교회 담임목사. 인생은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를 발견하는 여정이라 믿는 호기심 많은 독서가. 〈묵상과 설교〉에서 주간예화를 집필한다. 《들리는 설교 유혹하는 예화》를 썼다.
“걸려 넘어짐”, 그 이후의 믿음
성경에는 “걸려 넘어지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걸려 넘어진다”는 말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걸려 넘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로 베드로와 유다를 들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 죽을 준비가 돼있다고 외치지만, 결국 닭이 울기 전에 그분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넘겨버린 유다. 마찬가지로 엔도 슈사쿠 소설에서도 “걸려 넘어지는”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그의 대표 소설 《침묵》에서는, 하느님의 침묵에 무너진 페레이라, 로드리고 신부가 예수님이 새겨진 후미에를 밟고 절망한다. 나약한 기치지로는 겁에 질려 배교를 수차례 반복하고 로드리고 신부를 일본 관리들에게 넘겨버린다.
이렇게 “걸려 넘어지는” 이들은 하느님을 믿고 따를 자격도 상실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들을 신앙의 오점으로 보고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신앙은 이들과 달리 강건하고 깊으며 스러지지 않는 불씨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엔도 슈사쿠의 단편소설 〈그림자〉는 “걸려 넘어짐” 이후의 믿음을 보여준다. 누구보다도 강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던 사제가 불행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걸려 넘어진다.” 그는 교회에서 손가락질받으며 파문당하지만 그의 믿음은 그제서야 진정하게 피어오른다. ‘새하얀 로만칼라와 잘 손질된 검은 옷차림’으로 무장한,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던 사제는 이제 ‘낡은 회색 정장’을 입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재빠르게 십자성호를 긋는다.’ 엔도 슈사쿠는 말한다. ‘당신이 그 옛날 믿고 있던 신앙은 자신감이나 재판하는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의 슬픔을 위해서 존재했었다고까지 생각해봅니다.’
강직한 신앙이 “걸려 넘어진” 자리에 슬픔과 겸손함이 스며들어, 버려지고 비난받는 자들도 진정으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이 새롭게 자라난다. 베드로도 그랬고, 엔도 슈사쿠 소설 속 인물들도 그렇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을 마음 깊이 후회하고 죽음을 택한 유다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이들은 신앙의 오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이들의 “걸려 넘어짐” 이후의 믿음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으로 다가온다.
장의진 |〈복음과상황〉 애독자.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어보며 하느님을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있다.
골 때리게 웃긴 나의 아저씨
나는 엔도 슈사쿠 덕후다.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그의 문학관에 두 번이나 찾아갔을 정도니, 덕후라 할 만하지 않을까. 내가 엔도 슈사쿠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대부분 그렇듯 그의 대표작인 《침묵》에 감명받아서는 아니다. 이름이 근사했기 때문이다. 엔.도.슈.사.쿠. 소설가 중 가장 멋진 이름 뽑기 대회를 연다면, 그가 1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름에 꽂혀 덕후가 됐다. 그의 이름이 적힌 책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지성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엔도 슈사쿠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진 건 그의 문학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다. 문학관 입구에 전신사진이 걸려있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처음 엔도 슈사쿠의 진짜 모습을 본 셈이다. 나는 왜인지, 너무도 당연하게, 비장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을 한 청년 작가의 모습을 상상했다. 실제로 본 그는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말라깽이 아저씨였다. 게다가 “진지함 따위는 내려놓고 들어오게나”라고 말하듯 손가락을 꼰 채 요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일본판을 만난 것 같았다.
환상은 깨졌지만, 그 후로 엔도 슈사쿠를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신과 종교에 관한 가장 심오한 글을 쓴 작가가 현실에서는 코믹한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누군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예수의 생애》를 권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묻는다면 단연코 《인생에 화를 내봤자》이다. 그의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인데,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장난꾸러기 아저씨의 만담집 같다. 한 대목만 옮겨보면 이런 식이다.
여보 나를 무시하지 마 / 결혼 이후 20년 / 누구 덕분에 먹고 살았나 / 누구 덕분에 자식이 생겼나 / 자꾸 나를 깔보면 / 나는 이 집 나갈 거야 (〈중년 남자를 위한 노래〉 중)
나의 책장에 《침묵》과 《인생에 화를 내봤자》가 나란히 꽂혀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기가 막히다. 《침묵》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데, 골 때리게 웃긴 이 책은 이따금 꺼내 보는 편이다. 그때마다 일본판 이주일 씨와 한바탕 수다 떤 기분이 든다. 실제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고, 유머를 예찬했다고 한다. 책에도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삶은 비극이라네, 웃을 때 빼고.”
그렇지, 유머 없이 침묵을 견디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규혁 | 서울 청파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한다.
《내가 버린 여자》(이평춘 옮김, 어문학사)
교회에서 겉도는 제게 엔도 슈사쿠는 좋은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묵직한 소설들과 낫낫한 산문들은 신앙도 삶도 좀 더 여유를 갖고 바라보게 했지요. 무엇보다 그가 가진 예수상(像)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어떤 이든 한결같이 사랑하는 예수. 그 사랑을 통해 기어코 누군가의 생에 흔적을 남기는 예수. 이 책은 그런 예수상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입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이용만 하고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를 잊지 못합니다.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남자의 독백처럼, 여자의 사랑이 흔적으로 남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언젠가 엔도는 이 소설을 가리켜 “내가 버린 그리스도”라 말했다지요. 자신의 신앙 이야기이자 그가 만났던 예수에 관한 고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엔도의 예수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삶에 다가갑니다. 그 인생을 스치며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렇게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 예수가 궁금하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박관용 | 책방난달 책방지기.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가볍고 유쾌한 동물 에세이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지금까지 키우거나 만나왔던 여러 동물이라 말하면서 그들과의 이런저런 인연과 에피소드를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지금껏 만나왔던 모든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슈사쿠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엔도는 주인이 자살한 숲을 바라보던 개의 눈과 병에 걸려 손안에서 죽어가던 십자매의 눈에서 인간을 보는 예수의 눈과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눈을 떠올립니다. 그들의 눈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배후에서 슬픈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고, 멀리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존재의 투영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일생을 통해 사랑하고 교감했던 여러 동물의 눈에서 예수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고, 그 애정 어린 시선을 다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던지는 엔도의 모습이야말로 “일상이야말로 영원으로 향하는 도약판”이라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어떤 종교적 색채나 경건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유쾌함과 애정으로 가득한 동물기야말로 참된 ‘영성 일기’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확신합니다.
정한욱 | 안과전문의,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저자.
《깊은 강》(유숙자 옮김, 민음사)
오랫동안 질문했다. “만물과 나를 비춰줄 궁극적 진리는?” “내 출생의 기원과 삶의 목적은?” 누가 창조주 하나님을 말했다. 그 하나님은 나한테 맞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이 필요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들었다. 전지한 분! 감출 수 없으니 감출 게 없었고 두렵지 않았다. 뭐든 물었다. 내 안에 계신 듯 답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3년 후 교회에 갔다. 많이 배웠으나 하나님이 작아졌다. 단순하고 투명하게 정리된 신, 배타적으로 타 종교를 혹은 비주류의 사람을 혐오하는 신. 내가 만들어낸 신과 교회의 신이 달랐다. 묻고 답하는 대화 아닌, 도깨비방망이 같은 기도가 나를 배신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에 도리어 함께 고통받는 신을 만났다. 다른 작품들도, 《깊은 강》도 읽었다. 그 안에서 마침내 내가 그리는 신을 만났다. 《깊은 강》의 오쓰가 만난 신. 그 이름을 뭐라 해도 좋을 양파. 사랑의 손길. 어쩔 수 없는 인간(유다)의 업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예수를. 누구나 무엇이나 받아주는 갠지스강은, 오쓰가 그 사랑을 흉내 내는 예수를 얼마나 닮았는지.
조희선 | 두 존재의 할머니, 《이 정도면 충분한》 《몸을 돌아보는 시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