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이야기 다시 쓰기

[397호 커버스토리]

2023-11-30     김진혁

※ 이 글은 2010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렸던 Rewriting the Bible 국제 학술 대회에서 발표했던 미간행 논문 〈Shusaku Endo: Retelling the Bible and Its Power for Reconciliation〉의 일부를 수정하고 번역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를 소개할 때 흔히 ‘일본 가톨릭 작가’라고 표현한다. ‘일본’은 그가 일본인임을 나타내기에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가톨릭’은 그러하지 않다. 그는 죽기까지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작품 세계를 알아가기에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과 《깊은 강》처럼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그를 세계적 작가 반열로 올려놓으며 언어와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의 신앙과 신학적 상상력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신의 침묵, 모성적 신, 동반자 그리스도 등의 도발적인 종교적 주제는 작품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엔도의 문학 세계를 좁혀서 이해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의 업적과 성취의 정수를 포착하게 될 수도 있다. 살아생전 그는 자기 삶과 작품에서 가톨릭 신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가톨릭의 본질을 파헤치거나, 자신의 종교를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소설을 내놓지도 않았다.

… 그리스도교 소설, 그리스도교 소설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설가가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그리스도교를 선전하거나 옹호하거나 신을 찬양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응시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했습니다.1)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이자 작가 엔도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소설가로서 자기 정체성이 성서를 읽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었을까? 역으로 성서는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러한 궁금증이 짧은 글로 깔끔히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위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한 실마리로 그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작가로서 성서 기자

소설가인 만큼 엔도는 성서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성서관은 그가 성서 속 등장인물을 관찰하고 성서적 주제를 변용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특히 1973년과 1978년에 각각 출판된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은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을 재구성하며 신약성서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간 만큼 그의 성서관과 해석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엔도가 볼 때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초자연적인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가 아니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강렬했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후대의 기술이다. 즉, 성서는 과거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고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성서 기자들의 ‘창작’이 긴밀히 결합한 혼합물로서, 1세기 당시 나사렛 예수를 실제 만났던 사람들이 가졌던 신비로운 경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2)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성서관에 비하면 과격하고 위험한 발언으로 들릴 만하지만, 이는 20세기 중반 유럽과 일본 성서학계에 팽배했던 역사비평학에 대한 ‘소설가’ 엔도의 비판으로 봐야 적절하다. 당시 많은 성서학자는 신약성서에 1세기 팔레스타인 역사가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되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과거와 본문 사이 관계는 단지 역사학적으로 규명될 수 없고, 성서 기자들을 ‘작가’로서 대할 때야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작품이 생겨나기까지의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 조개 내부에서 핵(核)이 되는 부분이 성장하여 빛나는 진주가 되기까지의 성숙 과정. 이러한 과정과 비슷하게 의식적인 정신의 작용과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작업. 이러한 경험을 맛본 사람, 다소라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본 작가라면, 성서학자들처럼 “예수의 사상과 신약의 사상과는 다르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 예술가는 자신에게 창작의 충동을 불러일으킨 소재 그대로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소재는 진주조개 속의 핵에 해당한다.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서 그 소재는 바뀌고, 다른 차원으로 재구성되어 간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외견상, 소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색채나 구성, 이미지를 갖추게 된다.3)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엔도가 성서 기자들의 의식적 정신 작용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의식하고 의도한 것만 글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엔도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돌아보며 말하길, “잘 나갈 때는 누군가 제 손을 잡아서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런 경험은 좀처럼 없습니다. 하지만 무척 잘 썼다고 생각할 때는 저 말고 ×가 쓴 것 같습니다.”4) 자신에게 압박을 가했던 힘인 ×가 무엇인지 정의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과 원고 사이에서 활동했던 은밀한 힘의 존재를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이러한 신비로운 체험이 성서 기자들에게도 있었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성서 본문을 형성하는 무의식

엔도는 성서 기자들의 심리,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신비한 무엇의 영역을 남겨두며 성서를 독창적으로 읽는다. 대표적 결실인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을 집필하던 1970년대 당시, 그는 융 심리학을 공부하며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선천적이고 구조적인 영역인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5) 집단 ‘무의식’을 강조한다고 하여 그가 성서를 비합리적 충동으로 기록된 문서로 봤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단’ 무의식은 본문이 성서 기자의 주관적 체험을 넘어선 보편적인 ‘그 무엇’을 가리킨다고 보는 핵심 근거다.

일례로, 고대 근동의 종교 문헌이나 1세기 전후 유대교 문헌에도 구원자에 대한 성서적 묘사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6) 이러한 현상을 두고 19세기에 활동했던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라면 고대 종교 문헌을 비교종교사적 관점에서 탐구하며 복음서와의 유사성을 역사학적으로 규명하려 할 것이다. 반면 엔도는 복음서와 다른 종교 문헌이 비슷한 것은 성서 기자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 집단 무의식 때문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을 해방할 메시아라는 기대를 받던 나사렛 예수가 허무하게 사형대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그 불가사의한 죽음의 의미를 해석할 자원은 구약성서에 담긴 예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에 대한 기대는 고대 근동에 퍼져있던 신화에 담긴 죽음과 재생에 관한 집단 무의식의 틀에서 촉발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구원의 신비에 대한 신약 기자들의 설명에는 각 개인의 이해 능력과 글솜씨를 넘어선 보편적 호소력이 더해졌다. 이는 예술가나 작가가 영감에 가득 차 골방에서 만들어낸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과 일면 유사하다.

이 점은 마치 예술가의 내면으로부터 작품이 생겨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 예술가는 이러한 의식적, 무의식적인 작용에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를 초월한 무엇인가가 작용하는 것을 감지하는 경우가 있다. 이 의지를 초월한 그 무엇을 지드(A. Gide)는 짓궂게도 악마의 협력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당시 예수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했던 제자들은 이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작용을 ‘은총’(恩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7)

성령의 영감과 소설가의 영감 사이의 유비를 끌어내려는 엔도의 시도를 보고 여러 질문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첫째, 성서 기자를 작가로 볼 때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가 생겨날까? 둘째, 만약 성서가 작가의 심리가 만든 창작품이라면 성서가 증언하는 십자가나 부활 사건은 여전히 구원론적 의미가 있을까?

심리학적 해석을 넘어선 신앙적 해석

엔도는 1950년 프랑스 리옹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지 가톨릭 문화를 접했고, 이후 일본에 돌아와서도 성서학에 관심을 가졌던 만큼 그의 글에는 불트만, 라이마루스, 브레데, 부세트, 보른캄 등 저명한 학자들 이름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유럽 성서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수수께끼를 진지하게 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근대에 발전한 역사학적 방법론에 묶여서 “성서가 성서일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거나, 혹은 극히 미미하게 대처”하기 때문이다.8) 특히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전기 형식을 지니는데, 본성상 전기는 “타인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그 인물의 모습에 접근”하는 양식이다.9) 따라서, 본문의 역사적 사실성에 집중하다가는 “성서에 쓰인 예수의 생애는 분명히 일관된 진실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쓰인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놓칠 수도 있다.10)

엔도에게 진실과 사실의 구분은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역할도 하지만, 자신만의 성서 해석학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은 관찰자의 ‘인상’ 혹은 ‘관점’을 통해서만 기록되기에, 본성상 어떤 글이라도 과거 ‘사실’을 정확히 재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신약성서의 ‘진실성’ 자체가 자동으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진실성을 따질 때는 본문에 내포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주관적인 저자의 관찰이라는 양극성 모두에 유념해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여 전달하는 저자의 ‘의식적인’ 그리고 ‘무의식적인’ 동기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 해석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자면, 저자가 속한 시대에 공유되던 언어 사용법으로 본문에 접근하여 객관적 의미를 끌어내는 ‘문법적 해석’(grammatical interpretation)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본문을 만든 저자의 정신세계를 추적하는 ‘심리학적 해석’(psychological interpretation)이 필요하다.11) 하지만 심리학적 해석이 일반적으로 저자의 작품 전체로부터 그의 정신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주로 지칭한다면, 엔도는 저자 자신도 의식 못 할 마음의 심층에서 본문을 읽어낼 것을 주문한다. 이런 방법을 써야 신약성서에 기록된 나사렛 예수와 제자들의 수수께끼 같은 삶을 이해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심리 깊숙한 곳까지 도달할 방법은 무엇일까. 엔도는 인간 심리를 세 층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의 움직임이 심리의 첫 지평이라면,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이 발견한 무의식은 둘째 지평이다. 그런데 무의식보다 더 깊은 셋째 지평도 있는데, 이는 정신분석학으로도 도달하지 못한다. 은총의 빛 아래서 인간의 나약함, 죄책감, 수치심 등을 가식 없이 응시하게 하는 그리스도교가 인도할 수 있는 영역이다.12)

심리의 깊숙한 곳이나 배후에 뒤엉키고 질척질척한 무의식이 있고, 거기에 다양한 심리나 기억이 경계도 없이 뒤얽혀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에게는 어쩌면 무의식 밑에 더 깊은 내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진정한 인간을 그린다면 거기까지 그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러나 인간을 그런 깊이까지 그릴 수 있다면, 거기에는 종교랄까 신이랄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파고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 심리의 깊숙한 곳, 무의식 밑의 세계까지 그려내 인간에게 교향악을 울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문학일 것이고, 그 깊숙한 밑바닥까지 파고들려고 노력한 이들이 오늘 언급한 작가들[그린과 모리아크, 도스토옙스키 등]입니다.13)

위 인용문에 엔도 특유의 ‘신앙의 해석학’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굳센 믿음으로 성서에 기록된 것이 무조건 사실이라 믿는 신앙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엔도가 볼 때,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본문보다 더 깊숙한 곳, 즉 성서 기자의 마음 심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밝힐 때 인식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속 신비한 심연을 보도록 빛을 비춰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서 기자가 신비한 힘에 이끌려 증언한 바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인류 모두의 보편적 문제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구원에 대한 갈망과 나사렛 예수의 생애

엔도가 관찰하기에 심층심리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접촉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다. 이러한 갈망은 그의 작품에서 독특한 구원자상을 형상화하는 동력이었다. 비극적 삶 가운데서도 침묵을 지키는 신, 인간들 곁을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키는 동반자 예수, 약하고 간사한 인간마저 용납하는 모성적 신이 대표적 사례이다.

엔도의 소설에서 사랑의 화신인 구원자가 추하고 평범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삶은 연약함과 이율배반과 거듭된 실패 등으로 점철되어있다. 이 두 이미지는 그가 작가의 눈을 가지고 신약성서를 재해석할 때도, 성서 이야기를 현대인을 위해 다시 쓸 때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신약의 본문과 주제를 재구성하면서 그는 독자들이 인간 마음 깊숙이 숨겨져 알아차리기 힘든 죄책감, 무력함, 수치심 등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질척이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던 독자들은, 침묵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신의 자비를 발견한 나사렛 예수와 제자들의 심리에 공감하게 된다. 이로써 기존에 가졌던 구원에 대한 피상적 지식을 깨트리고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엔도의 작품을 통해 끔찍한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신에 대해 나사렛 예수가 가졌던 심정, 스승의 무능했던 삶과 허무한 죽음 앞에서 제자들이 가졌던 복잡한 감정, 오늘 여기서도 신의 무력함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독자의 마음 사이에 신비한 공명이 일어난다.14)

이쯤 되면 엔도가 지나치게 성서의 본성, 형성 과정, 해석 방식을 심리학화하여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서의 특수성과 의미의 객관성을 약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어떤 식으로 엔도가 신약성서를 다른 책과 차별화하고, 어떻게 신약성서라는 독특한 책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이해하려 하는지 살펴보며 글을 끝맺도록 하자.

1세기 당시 성서 기자들의 심리에 대한 엔도의 관심은 신약성서 이야기만이 가지는 특별함에 대한 그만의 관점을 함께 형성한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는 역사학적으로 객관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과거에 등장했던 다른 위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기이하게도 그분의 생애와 죽음에는 위인이나 성인에게 기대할 법한 이상적이거나 아름다운 것이 하나 없고, 오히려 연약함과 무력함과 초라함과 같은 지질한 단어가 그분을 더 잘 묘사할 법하다. 그분의 제자만이 아니라 현대 독자도 이상화된 인간에 대해 가질 법한 욕망을 그분에게 투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그분이 비참하게 숨을 거둔 후 신기하게도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했고, 이때 무언가가 그분을 무력한 사람이 아닌 신적 능력으로 충만한 존재로 만나게 했다.15)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확신 아래 제자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던 불안과 무기력함에서 일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탈바꿈했다. 지금껏 여러 학자가 제자들에게 일어난 급진적 변화를 설명하려 했지만, 누구도 확실하거나 만족할 만한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엔도는 나사렛 예수의 생애가 1세기 이래 거대한 수수께끼로서 인류 앞에 놓여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암호와도 같은 그분의 삶에 담긴 의미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신약성서를 읽으며 불가사의했던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마주한 제자들의 심층적 심리에 공명하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껏 고민해온 오랜 수수께끼는 고대인들의 마음을 알아챈다고 풀릴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이에 엔도는 중요한 제안을 더한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생애를 ‘쓰고 또 새롭게 쓰는’ 일이다. 이로써 작가에게 선물처럼 내리는 신비로운 힘의 도움을 받아 베일에 가려져있는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다. 한 명의 작가로서 엔도도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신의 탐구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물론 나는 이 《예수의 생애》를 통해 예수 자신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투사시켜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데, 적어도 예수의 생애에는 우리들의 인생을 투사시켜도 파악하기 힘든 신비로움과 수수께끼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언젠가 나 자신의 삶을 축적하여 다시 ‘예수의 생애’를 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쓴 후에도 다시 ‘예수의 생애’를 쓰고자 할 것이다.16)

신약성서 이야기를 다시 쓰기, 이것은 전문 작가에게만 주어진 과제 혹은 특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 갈망하는, 그분의 발자취를 뒤따르고자 힘쓰는, 구원자인 그분을 더 알기 원하는 모두가 그분의 생애를 자기만의 언어로 쓸 수 있고 또 쓰도록 초청받고 있다.

■ 주

1) 엔도 슈사쿠, 송태욱 옮김,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포이에마, 2018), 69쪽.
2) 엔도 슈사쿠, 이평아 옮김, 《그리스도의 탄생》(가톨릭출판사, 2003), 43-44쪽.
3) 《그리스도의 탄생》, 26-27쪽.
4)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213쪽.
5) 엔도 슈사쿠 작품에서 융 심리학의 중요성에 관한 대표 연구로 다음이 있다. Mark B. Williams, 《Endō Shūsaku: A Literature of Reconciliation》(Routledge, 1999).
6) 《그리스도의 탄생》, 41쪽.
7) 《그리스도의 탄생》, 41-42쪽.
8) 엔도 슈사쿠, 이평아 옮김,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 2003), 199쪽.
9) 《예수의 생애》, 50쪽.
10) 《예수의 생애》, 50쪽.
11) 문법적 해석과 심리학적 해석이 함께 필요하다는 지적은 근대 해석학의 선구자 슐라이어마허가 강하게 주장한 바이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최신한 옮김, 《해석학과 비평》(철학과현실사, 2000).
12) 이는 엔도가 유학을 떠나기 전 1947년에 썼던 〈가톨릭 작가의 문제〉라는 초기 평론부터 줄곧 가졌던 문제의식이다. 무의식 개념이 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박상도,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문학과 무의식의 세계: 초기의 작품 활동을 중심으로〉, 《日本語文學 No. 79》(2017), 183-202쪽.
13)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53-54쪽. 다음도 보라. 엔도 슈사쿠, 김승철 옮김,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 마리아 관음(觀音)에 대하여’, 《침묵의 소리》(동연, 2016), 104-106쪽.
14) 대표적으로 다음을 보라. 《예수의 생애》, 12쪽; 《그리스도의 탄생》, 11쪽.
15) 《예수의 생애》, 221쪽; 《그리스도의 탄생》, 236-247쪽.
16) 《예수의 생애》, 223쪽.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철학,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신학의 영토들》 《순전한 그리스도인》 《질문하는 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