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람을 만나 생긴 일들
[398호 이한주의 책갈피]
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준 미리엘 신부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후 장 발장에게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감옥에 갈 위기를 모면하고 신부와 헤어진 장 발장은 신부가 베풀어준 자비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을 느낀다. 거칠고 억울하게 살아온 장 발장에게 인생은 싸움터고 증오는 무기였다. 장 발장은 갈등했다.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들판에 앉아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것이 속 편했을 거라 생각하며, 20년 동안 쌓아두었던 증오와 미리엘 신부에게 받은 사랑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장 발장은 ‘프티-제르베’를 만난다. 제르베는 ‘프티’라는 말처럼 작은 몸으로 굴뚝 청소를 하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프티-제르베는 굴뚝 청소를 하고 받은 40수짜리 은화로 장난을 치며 걸어오다 그것을 떨어뜨린다. 은화는 장 발장 발밑으로 굴러갔고 소년은 은화를 밟고 있는 장 발장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장 발장은 발을 치우지 않은 채 소년을 무섭게 대했고 장 발장의 위협에 소년은 울며 도망갔다. 장 발장이 자기 발밑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발견한 건 소년이 떠나고 한참 지난 뒤였다. 은화를 발견한 장 발장은 감전된 것처럼 놀라 소년을 찾았지만, 소년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장 발장은 끝내 찾지 못한 소년의 이름, 프티-제르베를 부르다 주저앉는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처럼, 돈을 돌려주려고 아이를 찾으려 애를 썼고, 그것이 부질없고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절망하여 멈춰버렸다. “나는 불쌍한 놈이야!” 그가 그렇게 탄식하던 순간, 그는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것이고,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1》, 펭귄클래식코리아, 177쪽)
‘나는 불쌍한 놈이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 번역된 로마서 7:24의 바로 그 탄식이다. ‘레 미제라블’이란 소설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 장 발장은 줄곧 자신을 피해자라 믿었다. 자신이 겪은 불행은 다른 사람의 냉대와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생겼으니, 피해자로서 증오심을 갖는 게 정당하다 생각했다.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이 정당한 증오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티-제르베를 만난 장 발장은 자신이 피해자일 뿐 아니라 가해자도 되는 현실을 깨닫는다. 그를 감옥에 가두고 돈을 갈취했던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가난한 소년에게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은화를 훔쳤다. 원하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된 것처럼, 원하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되었다. 그가 누군가를 증오하듯이 프티-제르베 역시 평생 자신을 증오할 텐데 이것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여 뒤늦게 후회하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는 악의 피해자이며 죄를 저지르는 가해자. 이것이 장 발장이 본 자기 모습이고, 모든 인간의 경험이며, 사도 바울의 탄식이 전하는 현실이다. 미리엘 신부에게 용서받았을 때도 울지 않던 장 발장은 프티-제르베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깨닫고 오랫동안 통곡한다. 장 발장은 자신이 불쌍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은혜에 굴복한다. 그날 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앞으로 다시 찾아가 길바닥에 꿇어앉아 기도드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집 《영원한 남편》(열린책들)에는 그의 마지막 단편소설 〈우스운 사람의 꿈〉이 실려있다. 대문호 작품치고는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 소설에서 노년의 도스토옙스키는 노골적일 만큼 분명하게 기독교의 핵심을 전한다.
소설 주인공은 ‘살아가는 건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 확신하는 어떤 남자다.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은 그는 11월 어느 비 오는 날, 오늘 밤에는 정말 자살하리라 결심한다. 집에 돌아가 자살하려던 남자는 거리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난다. 온몸이 비에 젖은 아이는 남자에게 다가와 도움을 요청한다. 남자는 ‘엄마, 엄마’라 하는 목소리를 듣고 아이 엄마가 위독하거나 무슨 사고가 생겼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순경을 찾아보라며 아이를 떼어낸다. 하지만 아이는 울며 계속 따라오고, 남자는 결국 발을 구르며 호통을 쳐서 쫓아버린다. 이렇게 여자아이를 외면하고 돌아온 남자는 책상에 앉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거리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요컨대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며 아직은 무(無)가 아닌 까닭에, 다시 말해서 무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 있는 까닭에, 내 행위에 대하여 고통이나 분노나 수치를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또렷이 떠오른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그러나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자살할 텐데,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원한 남편》, 482쪽)
주인공은 살아가는 건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 믿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길에서 불쌍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도 결코 타인에게 무감각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인간은 무로 돌아가기 전까지, 자살하기 두 시간 전에도 타인의 호소를 듣고 반응하며 연민을 느끼고, 가여운 어린아이를 외면했던 일을 후회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가 아니다. 타인을 만나고 반응한다. 그날 밤, 남자는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감염시키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남자는 자신이 구박하고 쫓아낸 아이를 떠올리며 후회한다. 그는 깨어나 생각한다.
어떻든 우선 긴급한 것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교훈이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이게 전부이다. … 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할 생각만 있다면 모든 게 다 삽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리고 나는 그 어린 여자아이를 찾아냈다…. 나는 떠나겠다! 떠나겠다! (509쪽)
대문호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어린 여자아이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인간의 비밀이고 삶의 해답이라 말해주는 듯하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 있는 수녀원이 운영했던 시설이었다. 여성을 보호하고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막달레나 세탁소가 실제로는 여성들을 감금하고 무임금 노동을 시킨 강제수용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때는 1996년이었다. 현대 유럽 국가에서 종교 권력이 74년 동안 여성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경악했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은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주인공 빌 펄롱은 아일랜드 소도시 뉴로스에서 석탄과 목재를 파는 상인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났지만 어린 펄롱을 가족처럼 대해준 사람들 덕분에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다섯 딸의 좋은 아버지로 살고 있다. 그는 딸들이 잘 커서 수녀원이 운영하는 명문 여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때까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지내며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하리라 매일 결심한다. 하지만 펄롱은 어느 날 자신의 가장 큰 거래처인 수녀원을 방문했다가 마루를 닦던 한 아이에게 수녀원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크리스마스 새벽에 석탄 배달을 하러 가서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혀있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수녀원에서 어떤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챈 펄롱은 원장 수녀와 신경전을 벌인다. 그의 아내와 이웃은 수녀원 측과 충돌하지 말고 가정과 딸들, 평온한 삶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펄롱은 사업을 잃고, 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일상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수녀원을 찾아가 석탄 창고에서 만났던 그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펄롱은 소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며 이런 생각을 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 119쪽)
최근에 읽은 문학작품 중 이만큼 분명하게 기독교인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작가는 막달레나 세탁소가 상징하는 권력화된 교회를 비판하는 대신, 기독교인이란 누구인가 질문한다. 갈 곳 없는 여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수녀원 사람들은 기독교인인가? 그 작은 사람들을 돕지 않은 기독교인이 과연 기독교인인가? 이것은 가톨릭이 국교인 국가에서 74년 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3만 명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묻는 말이고, 매주 편안하게 미사를 드리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이들의 얼굴을 비추는 질문이다.
UFC 헤비급 챔피언에게는 누구나 친절하다. 어떤 사람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도 크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작고 약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숨겨놓았던 좋은 것과 나쁜 것, 흐릿했던 선과 악이 마음에 떠오르고 행동으로 드러나는 건 타인을 내려다보며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다.
프티-제르베를 만났을 때 장 발장은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불쌍한 자기 모습을 보았고,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 자살하려던 남자는 자기에게 남아있던 삶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빌 펄롱이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낸 것은 갇혀있는 어린 소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고 약한 사람을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기독교인의 삶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을 왕으로 만나는 때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만날 때고, 그들에게 한 것이 곧 그분에게 한 것이라 하셨다. 새해에는 작고 약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고 힘을 보탤 수 있기를, 그 만남이 새로운 사건을 만들고 그전과 다른 삶으로 나를 이끌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