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볶음밥

[398호 로잔 1974-2024]

2023-12-31     박현철

‘다시 로잔을 생각하다’(이강일, 7월), ‘‘화해의 나라’를 가리키는 로잔운동’(이강일, 8월), ‘로잔과 함께 가는 여정, 그리고 그 너머’(김회권, 11월), ‘그래서 지금,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박다혜, 12월)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번 글은 필자가 로잔대회를 앞두고 복음주의의 기반과 역사를 훑어보고자 청어람ARMC에서 지난 9월부터 3개월간 진행한 ‘[복음주의 볶음밥] 복음주의 활동가 스터디’ 후기이자 로잔 서울대회를 두고 교차하는 시선에 대한 소회를 담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로잔 너 뭐 돼?

2024년 로잔 서울대회가 한 해 앞으로 다가오면서 한국 교계가 부산스러워졌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준비위원장이니 공동대회장이니 맡으셨다는 소식이 들리고 내년 대회를 위한 각종 사전 집회나 설명회도 거창하게 열렸다. 동시에, 로잔이 이래도 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제법 들렸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운동 중 하나라는 로잔운동의 역사적인 네 번째 대회 개최를 향한 거창한 준비와 여러 비판을 보면서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우선 오래전부터 로잔언약을 핵심 신앙고백으로 삼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 복음주의 좌파들(Evangelical Left)은 현재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가 로잔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정신을 온전히 담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대형교회들이 로잔의 본래적 정신과 강조점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대형 이벤트로만 로잔을 활용한다는 비판이다. 이들은 로잔의 정신은 복음전도뿐 아니라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각성한 복음의 통전성에 있으며 이번 로잔대회를 주도하는 대형교회들, 나아가 현재 한국교회는 그 정통성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지적한다. 로잔 ‘너머’를 도모하자는 말이다.

반대로 극우 기독교 그룹(뭐라 불러야 객관적이고 적절한 명칭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로잔도, 로잔을 비판하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들도 ‘보수적’이라 생각하기에, 이들을 극우 기독교라 부를 수밖에 없다)은 로잔이 사회참여를 강조한 나머지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희석시켰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심지어 로잔이 동성애나 차별금지법에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하지 않는다며 찬반 입장을 선명하게 표명해달라 요구하고, 로잔이 자유주의신학의 영향을 받아 WCC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며 이단성이 있다고까지 목소리를 높인다.

‘교계 지도자’들이 복잡하게 설왕설래하는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로잔이 대체 뭔데?”였다.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조금 우습고 허탈했다. 어떤 이들은 서로 “이게 진짜 로잔이야!” “이게 진짜 복음주의야!” 외치고 있지만 그걸 듣는 성도들, 특히 젊은이들은 “뭔데? 로잔 너 뭐 돼?”라고 묻는 모양새다. “이게 진짜 로잔이야!”라는 목소리는 많은데 어느 것도 “이게 진짜 로잔이야?”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청어람ARMC에서 성서한국과 함께 ‘복음주의 활동가들을 위한 복음주의 스터디’를 개설했다. 세 달간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복있는사람), 《케이프타운 서약》(IVP), 《하나님나라를 응시하다》(대장간)를 읽고 함께 토론하며 ‘복음주의 - 로잔운동 - 한국의 복음주의적 사회선교운동’에 대해 공부했다. 소박한 우리끼리의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복음과상황〉에서 글까지 쓰라는 상황이 되니, 나도 로잔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하는 목소리 중 하나로 발탁(?)된 것 같아 민망함이 앞서기는 한다.

이 글이 ‘로잔은 이거야!’라는 설명도, ‘로잔 너 뭐 돼?’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인정하며 세 달간 책을 읽고 함께 고민한 내용에 대한 나름의 기록을 남겨본다.

볶음밥: 다양성과 역동성 안에서

먼저, 솔직하게 밝혀야겠다. 애석하게도(?) 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복음주의는 내 신앙적·신학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틀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복음주의라는 틀을 명쾌하게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어쨌거나 가능한 여러 설명을 검토해봤는데 나는 복음주의라 불리는 신학적 규범들에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꽤 많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복음주의자이다. 지금 내 신앙이 복음주의적 틀에 딱 맞지 않더라도, 복음주의가 내 신앙을 형성해온 중요한 모판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복음주의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이었고, 복음주의 세례를 받아 싹을 틔우고 성장했다.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지만, 사실 동의하고 공유하는 전제가 더 많다. 영국에서 포스트 에반젤리컬(post-evangelical) 담론을 이끌었던 데이브 톰린슨은 웃자란(outgrown) 복음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딱 나를 설명하는 용어라고 본다. 나는 ‘웃자란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주의 틀을 넘어선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복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복음주의자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발생하는 가장 어려운 난맥 중 하나다. 이재근 교수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를 시작하며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언급한다. “복음주의는 지난 2,000년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한 일종의 운동이자 사조이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정의가 내려졌다.”1) 이 말은 복음주의가 단순히 내용으로만 규정되지 않고 역사와 맥락 가운데 분류된다는 뜻이다.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로잔이 무엇인지 알려면 배경과 역사를 넓고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주의는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운동이고, 규범적 정의가 아니라 분류적 정의다. 복음주의뿐 아니라 사실상 ‘○○주의자’라 사용되는 대부분의 신학적·신앙적 규정은 규범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맥락에 따라 형성된 일군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분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칼뱅이 칼뱅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칼뱅 이후 칼뱅을 따르고 계승한 이들이 칼뱅주의를 형성했듯이, 분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의’라고 규정짓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양한 맥락과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는 다양성과 역동성 안에서 존재한다.

이 사실을 떠올리며 세미나 이름을 ‘복음주의 볶음밥’으로 지었다. 볶음밥이라는 비유는 모 선교단체에서 만들어지고 구전되었다고 알려진 전설의 노래2)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노래에는 “짜장면을 시킬까 짬뽕을 시킬까”라는 실존적 고민이 담겨있는데, 결론은 볶음밥(정확한 가사는 ‘복음밥’)을 먹으면 짜장 소스도 주고 짬뽕 국물도 주니 볶음밥이 최고라는 것이다. 짜장 소스와 짬뽕 국물을 줄 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들의 식감과 맛이 살아 있으면서도 하나의 팬 안에서 조화롭게 볶아져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볶음밥’이라는 은유가 복음주의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양성과 역동성을 이해하고 싶었다(‘볶음주의 복음밥’이 더 적절한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로잔은 복음주의의 대표적 운동인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그 말은 로잔이 가장 정통적인(Authentic) 복음주의를 규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복음주의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그 지향과 신앙고백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다양한 복음주의 목소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한다는 뜻으로 로잔은 복음주의의 대표적 운동이다. 복음주의와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역동성 안에서 로잔은 복음주의의 대표성을 띤 운동으로 존재할 수 있다.

로잔이 중요시하는 ‘통전성’을 사회참여와 복음전도라는 양 날개의 균형과 조화로 생각하곤 한다. 로잔을 둘러싼 치열한 비판과 논박은 사회참여의 비중을 얼마나 늘리느냐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아 보인다. 어떤 이들은 복음전도의 우선성과 절대성 앞에서 사회참여는 부수적 요소라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사회참여도 복음전도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본다. 최소한 둘이 균형을 이루거나, 이상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다양성과 역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이분법을 극복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전도에도 다양한 접근과 방법이 있고, 사회참여 안에도 다양한 이슈와 실천이 있다. 이런 다양한 생각과 실천을 두 가지 범주로 묶지 않고, 각각의 생각과 실천들이 다양하게 공존하면서도 볶음밥처럼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지향했으면 좋겠다. 그럴 때 ‘통전적 의미에서의 통전성’이 확보될 수 있고, 나아가 현재적 적실성과 실천하는 힘도 확보될 수 있지 않을까?

대항적-응답적 운동으로서 복음주의

그렇다면 복음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다양한 목소리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워낙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를 담고 있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재근 교수 설명에 따르면3)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길게 보면 300여 년 역사를 갖고 있고, 구체적으로 좁히면 1940년대 이후 미국의 ‘신복음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복음주의는 사실상 복음전도(evangelize)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에 대한 개혁운동이자 대항운동, 갱신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로잔운동도 마찬가지다. 1974년 개최된 로잔대회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 대회의 전통을 잇는다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1968년 웁살라 WCC 대회 혹은 1973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구체화된 선교 모라토리엄(Mission Moratorium)과 인간화(Humanization)에 대한 대항이고 갱신이었다. 로잔운동의 ‘통전성’은 처음부터 온전하게 제시된 개념이 아니다. 복음전도에 대한 여러 도전에 대항하여 우선성을 단호하게 천명하면서도, 문제 제기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전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발전해가야 하는 개념이다.

1974년 1차 대회 로잔언약 이후 2010년 3차 대회 케이프타운서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우리가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을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케이프타운서약은 꽤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4) 케이프타운서약은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복음, 선교에 대한 정제된 신앙고백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세상에서 어떻게 진리를 증거하고, 평화를 이루며,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매우 선명한 행동 요청(call to action)까지 포함한다.

케이프타운서약을 꼼꼼히 읽으며, 이 서약이 미전도종족에 대한 복음전도뿐 아니라 사회구조적 부조리, 인종 갈등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현실, 장애인들과 에이즈 환자, 고통받는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2010년을 넘어 2023년 오늘의 세계와 한국 사회에서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된 이슈들(젠더나 퀴어를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 능력주의나 공정, 전쟁과 평화, 더 긴급해진 기후위기 등)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가 과연 충분한지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주의가, 로잔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문제에 대항하거나 응답하는 운동이라면, 케이프타운서약 서론에서 말하듯 결론으로 주어지지 않았고 ‘기독교 사역의 의제를 형성하고, 세계 교회가 이 서약에 대해 대화하고 토론하게 되기를 바라는’5) 마음이 담긴 일종의 말 걸기라면, 우리는 이 말 걸기에 이어 우리의 고민과 대응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오늘-우리의 운동으로서 복음주의

볶음밥 세미나의 주요 관심과 주제는 한국에서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사회선교’였다. 복음주의 운동, 구체적으로는 로잔운동이 세계 기독교 관점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필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어떻게 수용·계승·발전되었는지, 이제 어떤 문제에 응답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 최종 목표였다. 그래서 세미나의 마지막 책으로 《하나님나라를 응시하다》를 골랐다. 이 책은 ‘한국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 30년사’를 표방한다. 엄밀한 역사 기록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오히려 30년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활동가의 증언으로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시작을 1980년대 중반 이후(정확히는 1986년 〈대학기독신문〉이 창간된 시기 이후) 대학생들이 중심에 있는 사회참여운동으로 잡고,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이 분화·발전하며 경제, 정의, 평화, 통일, 기독교인의 윤리적 실천 등 다양한 영역의 활동을 통해 남긴 성과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이 구체적인 단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과정으로 1974년 로잔대회를 언급하지만, 실제로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과 로잔운동이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 로잔운동 역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선교운동이 로잔에 기여한 바는 찾아볼 수 있지만,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이 직접적으로 로잔과 교류하거나 기여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은 국제 로잔과 지향을 같이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성장한 셈이다.

그러므로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이 로잔의 다양성 속 하나의 목소리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간 쌓아온 성과를 국제적 흐름 가운데 드러내고 나누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케이프타운서약에서 기대하는 말 걸기에 대한 한국교회의 응답이겠다. 그 과정에서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고 로잔 너머를 내다보는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 로잔대회에서는 한국 대형교회의 돈과 세력이 필요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더 절실하고 의미 있는 도움은 소수이지만 단단하게 활동해온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의 경험과 성과일지도 모른다.

나가며

세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배운 것은 어쩌면 뻔한 이야기다. 로잔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한계도 있다는 것, 한국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 역시 나름의 가치와 한계가 있다는 것 정도를 확인했다. 앞으로 더 살펴보고 싶은, 또 다른 세미나로 꾸려보고 싶은 두 가지 과제를 언급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첫째로 WCC와의 관계 속에서 복음주의와 로잔의 역사를 살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앞서 말했듯 복음주의 역사는 대항운동적 성격이 강하기에 복음주의 운동의 대항 파트너가 되는 여러 역사적 맥락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중 로잔과 WCC가 1974년 당시에는 강한 반대와 차이로 시작했다면 2010년 케이프타운서약에 이르러서는 거의 공통적인 시각을 보인다(그런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극우 기독교의 비판은 일면 옳은 부분이 있다). 복음주의가 WCC가 무엇에 대항했는지, 그 후 WCC는 복음주의의 대항에 어떻게 반응했고 WCC 주요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로잔과 WCC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검토하면 더 깊은 고민이 가능하겠다. 가능하면 에큐메니컬 활동가, 관심자들과 함께 이 공부를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둘째로 한국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역사와 운동 성과를 조금 더 진지하게 살피고 싶다.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적 기독교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기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복음주의 사회참여운동에 대해서는 좀 더 꼼꼼하게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특히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 복음과상황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재발견했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1991년 창간호부터 1-2년 정도 발행된 〈복음과상황〉 목차를 훑어보았는데, 초기 〈복음과상황〉만 꼼꼼히 읽어보아도 큰 공부가 될 것 같았다. 기회가 되면 ‘복상 다시 읽기’ 같은 세미나도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주

1) 이재근,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18쪽.
2) 유튜브에서 ‘다윗의 막장 복음밥’이라 검색하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3)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22-24쪽.
4) IVP에서 단행본으로도 발행한 《케이프타운 서약》에 실린 서약 내용은 132쪽에 달하고 스터디 가이드만 82쪽이다. 로잔언약이 15쪽 분량이라는 점을 비교하면, 로잔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다.
5) 《케이프타운 서약》, 11쪽.


박현철
컴퓨터와 신학을 공부하고,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운동, 새로운 교회에 관심이 많은 ‘교회밖에 모르는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