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398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한복음 4:46-5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가버나움에 거주하던 왕의 신하였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무슨 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찾아온 그 길은 지리적으로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해안가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저지대였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이 계신 갈릴리 가나는 다른 마을들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에 있었습니다. 저지대인 가버나움에서 고지대인 갈릴리 가나로 가는 길은 당연히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곳 사이 거리가 27킬로미터 정도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걸어도 6시간 넘게 걸리는 아주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과 약속
오늘 본문 47절 가운데를 보면, 그 아버지의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세 가지 동사가 연이어 따닥따닥 붙어서 등장합니다. 그 아버지는 듣고, 가서, 간청했습니다. “…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이렇게 연이어서 등장하는 세 가지 동사를 보면 그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응답이 담긴 48절을 보면,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청에 곧바로 응답하시지 않고 다른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2인칭 복수를 말하는데요. 예수님은 단지 그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도 책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항상 비판적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표적과 기사만 요구했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비록 책망을 들었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여러분, 왕의 신하인 그 아버지는 지금까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소위 용하다는 의원들로부터 안 받아본 치료가 없었고, 병에 좋다는 약을 다 구해서 아들에게 먹여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약이 무효했고, 이제는 그저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구하지 못한다는 무기력한 절망으로부터 그 아버지를 건져낸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6시간 동안 오르막길을 올라와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비록 책망을 들었다고 해도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쉬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아버지를 예수님이 책망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가 표적과 기사를 보고 ‘일시적으로’ 믿기보다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믿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함께 내려가자는 요청을 거절하고, 그 대신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믿도록 요청하셨습니다.
믿음을 요청한 50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한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명령은 홀로 ‘가라’는 명령이었고, 한 가지 약속은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약속을 믿고 홀로 내려가라는 뜻입니다.
믿음과 의심 사이
그 아버지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요청했던 것은 예수님이 ‘직접’ 가버나움에 ‘함께’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버나움에 함께 내려가야만 아들이 살 수 있다고 믿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함께 내려가야 한다는 그런 방식을 간절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간절히 붙들고 있던 그 방식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다들 그 방식을 고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고집하는 방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을 내려놓으면 무엇보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불안이 찾아올까 두려워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집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붙들고 있는 방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신 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과 함께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왔던 그 아버지는 갈릴리 가나에서 어떤 표적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들은 그 아버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함께 내려가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셈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로 올라올 때나,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갈 때나, 외형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마음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갈릴리 가나로 올라올 때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내려와야 한다는 ‘자신만의 신념’을 안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으로 내려갈 때는 아들이 살아난다는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내려오는 동안 그 마음에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길을 내려오는 동안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과 약속에 대한 의심이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그 믿음이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는 발걸음이 가볍고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혹시 하는 의심이 마음속에 밀려왔을 때는 발걸음이 무겁고 흔들렸습니다. 이런 갈등과 싸움이 내려오는 동안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동안 벌어진 싸움 끝에, 결국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이 마음에서 의심을 몰아내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마중 나온 종들을 만났을 때 그 아버지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 때문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종들이 말했을 때 아버지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언제 낫기 시작했냐는 말입니다(52절).
그 아버지가 가장 먼저 묻고 확인한 것은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입니다.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가장 먼저 물어본 까닭은 자신이 믿었던 그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그 마음에 믿음이 자리 잡지 못했다면, 그냥 아들이 살아난 일로만 기뻐하고 거기서 멈춰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이 살아난 기적에만 도취되었다면 아들이 언제 낫기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살아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들이 낫기 시작한 그때를 가장 먼저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통해 말씀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또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를 확인하고 믿음이 더 견고해진 아버지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가족들에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시작된 아버지의 믿음이 이제는 가버나움에서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때 꼭 필요한 것
오늘 본문에서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만남의 분기점은 어디입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방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방식을 받아들였을 때입니다.
그때가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비록 그 아버지가 ‘고집하던 방식’에 대해서는 거절하셨지만, 그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에 대해서는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로 하여금 ‘자신만의 방식’을 내려놓고 ‘자신의 소원’을 붙잡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과 ‘자신의 소원’을 구분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간구할 게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정말 생각지 못한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능력의 한계를 수시로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수많은 일들을 두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과 ‘내가 원하는 소원’을 가장 먼저 구분하는 일입니다.
현실에서는 내 방식과 내 소원이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습니다.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 현실에서 내가 소원을 붙잡고 있는지, 아니면 내 방식을 붙잡고 있는지 경계선을 찾아 구분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되 우리를 붙잡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을 내려놓게 하는 그런 영적인 씨름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만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끝까지 고집 부린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집하는 나만의 방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만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도 단순히 그 기도에 응답만 하시는 게 아니라 항상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지도록 인도하십니다. 한번 믿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영원히 고정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이렇게도 변할 수 있고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그런 동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변할 수 있는 동사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실 때도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와 관련된 우리의 관심은 기도 응답 자체에 항상 꽂혀있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기도 응답을 넘어 말씀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만날 때 거기에 짓눌려서 주저앉아 버리는 게 아니라, 그럴수록 삶의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그 상황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때로는 불안과 의심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다시 한번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인생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그 아버지의 믿음을 인도하신 예수님이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날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우리 모두 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믿음을 배워나가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이 시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강은수
군포시 대야미에 있는 함께자라는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