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목소리를 예언적 비판으로 전유해낸 프로테스탄트 철학자 ― 포덤 대학교 메롤드 웨스트폴 명예석좌교수

[398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2023-12-31     김동규

메롤드 웨스트폴(Merold Westphal)은 1940년 미국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주 휘튼 칼리지 역사학과를 졸업했고, 예일 대학교에서 헤겔 연구로 1966년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예일 대학교 철학과 조교수(1967-1972)와 부교수(1972-1974)를 거쳐 호프 칼리지 철학과 교수(1976-1987)로 일했다. 1987년부터 2011년 은퇴할 때까지 뉴욕 포덤 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며, 중국 우한 대학교 교환교수로 중국 학생들을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포덤 대학교 명예석좌교수직에 올라있다. 미국 헤겔학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헤겔 연구에 정통한 인물로, 그가 쓴 《History and Truth in Hegel’s Phenomenology》(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와 진리)는 1980년 〈초이스〉라는 잡지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웨스트폴은 헤겔에 안주하기보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키르케고르, 레비나스, 리오타르 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철학자들을 탈근대적 관점에서 탁월하게 해석해냈으며, 해석학, 종교철학, 정치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존 카푸토, 리처드 카니와 더불어 영어권 학계에서 현대 유럽 대륙철학을 종교적 맥락에서 가장 탁월하게 전유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며, 종교철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던 종교철학의 가능성을 정통주의 그리스도교와 연계하여 발전시킨 대표적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 외에도 《Suspicion and Faith: The Religious Uses of Modern Atheism》(혐의와 신앙: 현대 무신론의 종교적 활용), 《Overcoming Onto-Theology: Toward a Postmodern Christian Faith》(존재-신론 극복하기: 포스트모던 신앙을 향하여), 《Levinas and Kierkegaard in Dialogue》(레비나스와 키르케고르와의 대화) 등을 썼다. 우리말로 번역된 저서는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홍성사), 《기독교와 포스트모던 전환》(공저, CLC), 《교회를 위한 철학적 해석학: 누구의 공동체? 어떤 해석?》(도서출판100), 《초월과 자기-초월》(갈무리 근간)이 있다.

이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신앙 형성과 그리스도인으로 철학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2023년 5월 1일 뉴저지에 있는 웨스트폴 교수 자택에서 이루어졌으며,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서 다문화교회 사역을 하는 박예일 목사가 통역과 촬영 등 큰 도움을 주었다.

메롤드 웨스트폴(왼쪽)과 그의 아내(가운데). (이하 사진: 박예일 제공)

- 우선 선생님의 종교적 배경과 신앙 형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였지요. 대학교(휘튼)에 다닐 때, 역사학 전공자였고 나중에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제 책장이 철학 전공자의 책장이 되어있더군요. 전공자가 아닌데도 어느 시점부터 철학 수업만 계속 들었습니다. 학부 졸업 후 예일 대학교에 입학해 1966년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졸업한 시점에 학교는 제게 남아주기를 요청했고, 거기서 8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1974년부터 2년간 뉴욕 주립대에서 가르치기도 했고요. 이후 미시간 호프 칼리지 철학과에 부임하여 10년 정도 가르치다가 포덤 대학교 철학과에 임용되어 은퇴할 때까지 대략 25년을 있었지요. 제가 받은 철학 교육은 학부생과 대학원생 시절 다양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단일한 학파나 전통에 연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매우 다양한 철학의 흐름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특히 대학원 재학 시절 매우 강고하고 뛰어난 분석철학 분야 교수들, 실용주의 철학자들과 공부했고, 현재 대륙철학이라 부르는 분야의 철학자들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 박사학위 논문은 헤겔에 관한 것이었고, 꽤 일찍부터 예일 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학부생 세미나에서 가르쳤을 때가 매우 흥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학원생으로서는 헤겔 외에 칸트를 많이 연구했었고요. 학장님이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학생들을 모아놓고 그러시더군요. ‘칸트 세미나를 인도할 수 있는 분을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키르케고르를 원하는군요? 괜찮겠지요?’ 당시 저는 학부생 시절이나 대학원생 시절에 키르케고르를 많이 공부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이내 그 세미나는 너무 훌륭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너무 명민했고,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그 경험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그렇게 제 경력 초기 19세기 중반에 머물면서 철학자인 헤겔과 키르케고르를 주로 다루었죠. 그러다가 마르크스와 니체를 거쳐 20세기의 현상학, 실존주의, 해체론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포덤 대학교에 가게 되었고, 저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야스퍼스 등을 다루게 되었는데요. 데리다는 아직 공부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실제로 포덤 대학교는 데리다를 잘 다루는 존 카푸토도 채용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자리를 옮기고 싶어 하지는 않았기에, 가다머와 데리다를 강의하는 데만 동의했지요. 저는 안식년을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내며 가다머 아래서 공부하기를 요청했어요. 하지만 데리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카푸토가 포덤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그의 인도로 데리다를 공부했지요. 저는 대학원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끔 그냥 강의실에 앉아만 있게 해주면 조용히 있겠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잭(카푸토의 애칭)과 나, 다른 사람들까지 데리다에 관해, 특히 종교철학에서 데리다의 중요성에 관해 아주 활기찬 대화를 나누었지요.

- 선생님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제 아버지는 근본주의자의 표본 그대로였고, 매우 편협하셨어요. 개신교 그리스도교가 전부이고, 그런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야 하는 가톨릭, 또 그런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야 할 자유주의 개신교가 있다고 보셨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휘튼 칼리지에 갔는데, 분명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조금은 열려있었고, 제가 나고 자란 곳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야가 조금 더 넓었습니다. 그때부터 점점 더 성숙해지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저를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지요. 어떤 재기 넘치는 분이 복음주의자란 자기 아버지가 근본주의자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제게 꽤 잘 맞는 말이었지만,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신학적 의미보다 조금 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실은 복음주의도 저를 묘사하는 말로는 유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지금의 저를 에큐메니컬적 공감을 가진 보수적 개신교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역사적인 그리스도교가 신봉하는 강한 유신론적, 삼위일체적 성서적 신앙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지만, 우리의 길만이 유일하다고 보거나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뿐이라고 보는 협소하고 독단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저는 저의 변화 과정이 점진적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 많은 이들이 엄격한 근본주의 신앙에서 자랐는데, 그런 근본주의가 더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아예 신앙을 포기하기까지 했어요. 너무 비극적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신앙을 단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유혹을 느낀 적이 없다는 점은 감사한 일이죠.

- 선생님은 철학을 공부할 때 예일대의 존 에드윈 스미스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더불어 어떤 분들에게서 철학적 영향을 받으셨고, 어떤 통찰을 얻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철학적 영향을 말하자면 조금 더 뒤로 가야 합니다. 휘튼 재학 시절 저의 멘토는 아더 홈즈였습니다. 다른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그가 주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자가 되는 일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리스도교 철학 같은 것은 없다는 게 슬로건이었지요. 분명 그리스도인 철학자들이 존재하고, 저도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는데요.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해석학적 전회로 들어선 계기이기도 합니다. 해석학적 전회라는 말은 지적인 삶 자체가 전제들의 지평에 놓이는 해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제들의 지평이란 다양한 배경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할 것이라는 점, 그들 가운데 대화가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런 해석과 대화 상황에는 우연성과 특수성이 있지요. 어떤 누구도 자기가 볼 수 있는 시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고, 내가 선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학부생 시절부터 철학적 다원주의 개념을 포괄하게 되었고, 대학원생 때는 윌프리드 셀라스의 《순수이성비판》 읽기 세미나에 두 차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셀라스는 무신론자인 분석철학자였고, 존 스미스는 명약관화한 분석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신자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었지요. 두 사람이 당시 예일대 철학과의 거인이었는데, 철학적으로는 매우 다른 관점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두 분과 함께 《순수이성비판》을 공부했습니다. 칸트주의자가 되었지만, 우리 경험에 앞선 선험적인 개념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보지만 또 다른 어떤 것은 볼 수 없음에 착안하여, 이내 어떤 면에서 해석학적 다원주의자가 되었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헤겔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헤겔이 변화하는 역사와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 이론화하도록 이끄는 역사적 맥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헤겔은 모든 것[진리, 역사의 완성 등]이 헤겔 자신과 함께 최종적으로 종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의 말은 믿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서 역사적 우연성과 상대성이라는 개념을 배웠고, 이를 기반 삼아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제 친구들 일부가 매우 긴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니체처럼 ‘어떤 것이든 좋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자가 된 것이냐고 물었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니체는 매우 급진적인 관점주의자였지만, 모든 것이 다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매우 보수적인 종교적 관점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의 문제로서 우리는 상대적이며 오직 신만이 절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차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혜는 인간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요. 다른 전통이 발전했고, 이 전통을 따라 앞선 이들의 주장은 대체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원생 시절 초기에 했던 작업은 역사화된 칸트주의라고 하는 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행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해석학적 전환,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가게 되었지요. 이때 현상학은 직관보다는 해석이 있다는 의미에서 해석학적이고, 언제나 해석은 [역사적, 문화적] 지평에 상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칸트는 헤겔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키르케고르는 마르크스, 니체와 인척 관계 정도 된다는 사실을 꽤 일찍 알게 되어, 저는 빠르게 이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와 니체는 혐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을 실천했지요. 그들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것이 자명하지 않은 가정을 따르며, 그 가정에 따라 어떻게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지를 검토합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숨겨야 할 것들이 있는데, 실제 우리 사유의 많은 부분이 그 숨겨진 것에 맡겨져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리쾨르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주체에 대해 비판적인 혐의의 대가들이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 스스로 감추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들을 찾는 작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리쾨르는 그러한 혐의를 실천하는 다른 전통이 있음을 간과했습니다. 그 전통은 사도 바울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칼뱅, 키르케고르로 이어집니다. 물론 다른 여러 성인이나 구약성서의 예언적 전통을 끌어오는 여러 인물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혐의 추궁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신자들은 그런 혐의의 해석학을 실천해야 합니다. 곧 제가 스스로 분별해낸 해석학적 전회는 우리가 모든 곳에 다 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성을 가지며, 우리가 견지하는 여러 가정 가운데 자기-기만으로 이끄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곧 그러한 타락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 하니 어찌 벌하지 않으랴?”(아모스 3:2, 공동번역)라고 말씀하신 성경 구절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도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같은 무신론자들만큼이나 혐의의 해석학을 실천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다룬 제 책, 《혐의와 신앙》(Suspicion and Faith) 부제는 ‘근대 무신론의 종교적 활용’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실제로 사순절 기간 저를 초빙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기억하며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매주 공부하는 스터디 그룹이 있는 교회였지요. 저는 그 모임과 교회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 사순절 묵상을 무신론 철학자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이 크게 와닿습니다. 한국 독자 중 그 말에 깊이 인상을 받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신론 철학자들을 ‘발람의 나귀’(민 22장)에 비유한 것도 매우 인상 깊었지요.

선지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메신저가 그에게 경고하고 진리를 말하라고 꾸짖는 이야기지요. 저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같은 무신론자, 또 나치를 옹호하기도 했고 역시나 유신론자는 아니었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 전해주는 매개자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통해서만, 성서를 통해서만, 목회자들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제가 《혐의와 신앙》에서 주장한 바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말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참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모든 주장이 거짓이라는 말에는 심각한 논리적 결함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 철학자들의 비판은 사도 바울로 시작하는, 더 멀리 가면 구약 선지자에서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키르케고르로 이어지는 비판 전통의 또 다른 가능성입니다. 제 학부 시절 스승이었던 아더 홈즈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너무 염려하지 말고 진리로 존중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곤 했습니다. 진리를 발견했을 때, 친구에게는 그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어떤 불쾌한 지점이 있어서 절친한 친구에게는 진리라고 해도 직접 전하기에는 어색할 때가 있지요. 이를 제 식대로 바꿔서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가장 친한 친구라서 말해주지 않는 것을 말해줄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요. 선지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했지요. 선지자들이 정작 그 시절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 유산을 남겼습니다.

- 이러한 작업에 이어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선생님께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직접적으로 다루셨습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전유해 내시면서 이를 존재-신학 극복과 연관 짓기도 하셨지요. 선생님의 관점에서 존재-신학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한 바람직한 신앙 모형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는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앙에 해로운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와 친숙해지면서, 저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룰 준비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요점은 비판입니다. 포스트모던이라 호칭되는 많은 이가 그저 무신론자에 불과하다고 제쳐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입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말했고, 그래서 프로이트가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그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뭇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했으면, 바로 그 점에서 마르크스가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지요. 니체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대하지요. 제가 싸워왔던 게 바로 그런 태도들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데리다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지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 견해는 이중적입니다. 첫째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신학적 믿음이나 신학에 대한 태도가 그들의 포스트모던적 비판의 사유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관점엔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포스트모던적 비판은 종종 매우 정곡을 찌르는 지점이 많으며, 이는 바로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언어, 이론, 사회적 실천이 이미 칸트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해석학적 전회의 언어적, 문화적 방향 설정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신이라는 사물 자체와는 대면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는 신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모든 언어가 우리가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실재의 근사치를 표현한다는 토미즘적 교설 ―유비― 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강력하고 때로 매우 밀도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우리는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신앙으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표현해줍니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아니며, 실은 우리의 유한성과 타락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음을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잘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와 일종의 친족 관계에 있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기-기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이를 신학적 용어로 바꾸면 타락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 포스트모더니스트나 데리다에 대한 저의 응답, 또 일부는 리오타르와 푸코 등에 대한 저의 반응은 앞서 언급했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기반 삼아 연구했던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거부하는 것을 신중하게 살펴야 하며, 그 비판이 불신자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단순하게 무시해버리면 안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진리를 보유한 자로 너무 쉽게 가정해버린 채 진리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인식론적 겸손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를 불러 세우는 발람의 나귀가 될 수 있습니다.

- 국내에 출간될 선생님의 또 다른 책, 《초월과 자기-초월》에서는 형이상학과 영성의 통합을 제시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나 신학을 하는 이들이 이론과 영성, 형이상학과 영성, 교리와 영성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제안해주실 가르침이 있으신가요?

제 아내는 목회자이지만, 저는 철학 교수이고 실제 사목 활동을 하지는 않아서,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을 여러분과 나눌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양자를 통합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개신교 역사에서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의 초창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 자신에게도 할당된 과제입니다.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분열이 있었고,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자라고 할 만한 종교 저술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학 이론을 정확하게 공식화하기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정확한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와는 달리 신앙의 삶, 기도의 삶, 헌신의 삶, 선행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경건주의적 대응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벌어진 정통 개신교와 모더니즘 간의 논쟁에서도 이런 분열이 있었지요. 근본주의자들은 형이상학자들이었고 자유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경건주의자들이었는데, 한쪽은 예수가 절대적으로 신이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인간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예수가 우리가 따를, 또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모범을 보여준 표본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저는 이런 두 입장을 통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특별한 지혜가 없습니다. 다만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올바른 형이상학이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요.

여기서 제 어머니를 떠올려봅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신 어머니는 말라리아에 걸리셔서 집으로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중국 모기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지요. 어머니는 중국에서 돌아오셨을 때 미혼이셨고, 그 후 아버지를 만나셨거든요. 어린 시절 제 어머니는 매일 기도하고 성서를 읽는 시간을 갖는 일이 중요한 일상임을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일 아침에만 종교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제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경건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서로 연결해주는 데 있어 바로 이러한 실천이 제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제가 매일 행하는 실천과 관련해 어떤 마법의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가족, 특히 어머니와 관련한 얘기를 해주시니 문득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셨고, 심지어 선생님은 목회자나 신학자가 될 생각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철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셨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그런 결심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학문적으로 훨씬 명민한 분이셨어요. 그렇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철학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이해는 못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아더 홈즈로부터 얻은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접하지 못하셨으니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적 신앙에 비추어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으며, 이와 관련해서 가치 있는 철학적 사고방식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두 분 모두 제가 했던 경험을 해본 적은 없으셨어요. 어머니는 대학생 시절 학생들이 가진 유년기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빼앗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철학 교수를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학문적으로 추한 일이었지요. 물론 저는 강의실에서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시험이 끝나면 제단으로 나와 그리스도를 모시라고 초대하는 그런 교수도 마찬가지로 추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아무튼 어머니의 철학에 대한 경험은 그런 것이었고, 아버지는 아예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뿐이었지요.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와 저는 미 동부 해안가나 시카고 인근에서 살았고, 부모님은 북서쪽 해안 인근 지역에 사셨기 때문에 매주 그분들을 뵙지는 못했지만, 가끔이라도 만나 철학 이외의 여러 다른 소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 선생님은 여러 철학자에 대한 글을 쓰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키르케고르에게서 가장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를 그토록 선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키르케고르야말로 순전한 그리스도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9세기 덴마크의 루터파 교회 신자였기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이해와 제 이해 사이에는 간극이 있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교와 관련한 사유의 놀이를 했다고도 하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깊이 헌신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감사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당대의 지적 흐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흐름에 관여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저는 무엇보다도 키르케고르가 헤겔에 대한 좋은 비판자라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 당시에 완전히 재해석된 그리스도교가 있었는데요. 그때 그리스도교는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스어로 호이 폴로이(hoi polloi)1)를 위한 종교였지요.

반면에 키르케고르는 지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일반인들은 평범한 루터교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더 낫다고 보지요. 이것은 자만심, 자부심, 엘리트주의를 약화시킵니다.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교회의 사람들, 교회 리더십이 그리스도교와 덴마크 중산층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봅니다. 그는 그들의 종교는 헤겔적인 것, 곧 그리스도교가 아닌 그리스도교 크리스텐덤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처럼) 혐의의 대가가 됩니다. 저는 바로 그 점에 공감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헤겔식 해석과는 또 다른 해석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그리스도교에 상대적인 전제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일종의 해석학적 전회를 했습니다. 헤겔이 절대지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때, 그리고 루터교 주교가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것을 주장할 때,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나는 아무 권위 없이 말한다.” 이것이 그의 핵심 논제 중 하나입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런 권위가 없으므로, 내 말이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이 두 가지 태도 중 어느 것이 더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지 살펴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이렇게 키르케고르를 접했고, 그는 여러 면에서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 주

1)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


진행 김동규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