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

[399호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

2024-01-31     정다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그분의 광채를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뜻으로 그 말을 이해해왔다. 내 친구는 그분의 슬픔을 알고 나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의미일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분의 슬픔은 곧 그분의 광채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예수는 오지 않았다. 나사로의 상태를 진즉 전달했지만, 예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부러 시간을 지체했다. 그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사로의 몸에 온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까지 그녀들은 간절히 예수를 기다렸다. 이제 희망은 사라졌다. 나사로는 무덤에 묻혔다.

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두 자매를 방문했다. 하지만 마리아와 마르다를 측은히 여기며 약간의 성의를 보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사로의 빈자리를 감당하며 남은 인생의 짐을 지는 것은 오롯이 두 자매의 몫이었다. 만약 우리가 예수에게 조금 더 빨리 사람을 보냈더라면, 오라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 오셨더라면, 그분이 오라비를 고쳐 주셨더라면, 그랬다면…. 그녀들은 장례를 치르며 돌이킬 수 없는 불행 앞에 선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하듯 ‘만약에…’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되풀이했던 것 같다. 예수를 만나자마자 마르다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것을 보면.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묻히고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마리아는 예수가 온다는 소식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드디어 오셨구나.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제 그분이 오셨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 시신은 무덤 속에서 이미 부패해 악취를 풍기고 있을 터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어나지 못하는 마리아를 두고 마르다는 예수를 맞이하러 나간다. 그리고 그에게 마음에 있던 말을 쏟아낸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너무 늦게 오셨어요, 주님.)”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 이런 말도 덧붙인다. “하지만 이제라도 무엇이든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 희망이라고는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나사로 없는 이 막막한 현실에서도 마리아와 함께 잘 살아갈 길을 보여주리라는, 그들 자매에게 예수가 뭔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를 조금 해본 것뿐이다. 그렇기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의 아리송한 말에 마르다는 이렇게 답한다. “음… 네. 마지막 부활 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마르다의 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 이야기한다. “아니, 아니다.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을 믿느냐?” 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말을 듣고 마르다는 아리송한 채로,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낙담해 일어나지 못하는 마리아를 부르러 간다.

급히 달려온 마리아는 자신이 애타게 기다렸던 예수 앞에 무너지며 운다. 마르다가 예수를 맞을 때 했던 바로 그 말을 쏟아내면서.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우는 마리아를 보고 조문을 온 유대인들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렇게 우는 그들과 함께 예수가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슬픔은 주로 우리의 한계, 어리석음, 우리의 무능함, 약함과 악함, 거기로부터 비롯된 실패와 상실, 그런 것들에서 나온다. 우리가 부질없는 ‘만약에’를 반복하는 이유도 이미 지나간 일, 일어나버린 일, 과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다. 어찌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절망을 그 무용한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잊어보고 싶기 때문에. 그러나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지나간 시간은 단 1분도 돌이킬 수 없다. 흔한 타임슬립물의 전개와 달리 우리는 죽은 누군가를 살려낼 수 없고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수정할 수 없으며 인생에 결정적이었던 날들을 되돌릴 수 없다. 그렇게 결정적인 일은커녕 과거에 뱉은 사소한 말 한마디조차 우리는 주워 담을 수 없다. 정말 그런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후회하더라도 뱉은 말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다. 하물며 죽음에 대해서일까.

제각기 다른 생을 사는 것 같아도 모든 생명의 결말은 정해져있다. 우리는 끝이 정해진 이야기를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한 결말. 우리라는 이야기의 결말은 죽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깊은 슬픔은 결국 죽음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살든, 매 순간 그것을 기억하든 결론은 정해져있다. 굉장한 성취도, 엄청난 재물도, 온 세상이 무릎 꿇는 권력도,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그 결론 앞에 허망하게 스러진다.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그 쓰라린 사실을, 실은 깊은 곳에서는 늘 알고 있던 그 절망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이 이렇듯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운다. 그 자리에 함께한 유대인들도 운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런데 예수의 눈물은 무슨 뜻인가? 그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 그러니까, 이제 와서 왜? 마리아와 마르다가 번갈아 이야기한 대로, 그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었다면 또 모르겠다. 그도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후회하며 미안해하는 것이라면. 그런데 성서는 분명하게 예수가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 늦게 왔다고 기록한다.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이틀이나 있던 곳에 머물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기이한 말을 하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사로의 죽음을 예상하고도 움직이지 않던 그다. 그러고는 이제 와서 울다니, ‘이들 자매에게 내가 너무 가혹했구나’라고 때늦은 후회라도 했다는 뜻인가?

실제로 그가 우는 모습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눈에도 띄었고,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성서에는 예수가 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름대로 짐작했던 이유들 중 일부가 기록되어있다. 어떤 이들은 저분이 나사로를 참 특별히 사랑하셨던 모양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좀 더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눈은 뜨게 해줄 수 있었으면서, 나사로는 못 살린 모양이군. 저 사람도 별수 없네. 제아무리 예수라도, 모든 사람을 고칠 수는 없겠지. 사랑하는 측근도 못 고쳤고 결국 그는 죽어버렸는데, 그 모든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나.’

결론적으로 이들의 추측은 빗나갔다. 잘 알려진 대로, 이후에는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이 이어진다. 그러니 예수는 우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앞에 절망해 무너져 운 것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아니, 애초에 하나님에게 슬픔이 가능한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알고 계신 분께 슬픔이 가능한가. 우리처럼 무능하지도, 약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분이, 어리석어 그릇된 선택을 하고, 무능해서 실패하고, 악해서 잘못을 저지르다 파국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한 분에게 슬픔이 가능한가.

성서는 분명 여기에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슬퍼하는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이 있으신 분이, 나사로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아시는 분이, 곧 그 일을 행하실 분이 눈물을 흘리신다. 절망으로 무너져 우는 우리와 함께 우신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우신다.

늘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인해, 무능과 무지, 불행으로 인해 우는 우리와 달리 그분은 그분 자신을 위해, 자신으로 인해 눈물을 쏟지 않으신다. 성서에 기록된 그분의 눈물과 슬픔은 순전히 우리로 인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우리로 인해, 우리를 위해 슬퍼하신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깊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우신다. 그분의 눈물은 오롯이 우리를 향한다.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으로,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한계투성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분이 저 영원한 기쁨의 자리에서 우리의 슬픔의 자리에까지, 그 낮은 곳, 캄캄한 곳, 아무 희망이 없는 자리로 내려오신다. 우리와 그분 사이의 간극, 그 무한한 거리를 그분의 눈물이 메운다. 그렇게 그분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과 이어진다.

우리 자신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인상적인 추론, 생생한 영적 체험, 경건한 실천, 그리고 깊은 신심으로 이루어지는 양육조차 우리를 하나님에게 올려다 놓지는 못합니다. … 우리는 더는 하나님을 향해 오르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 윌리엄 윌리몬

우리의 하릴없는 슬픔의 자리로 하나님이 내려오신다. 우리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그 사랑에서 비롯된 눈물이 오랜 절망으로 메마른 우리의 황량함을 적신다. 우리는 그 슬픔의 의미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다. 여기 드러난 그분의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더듬더듬 헤아려볼 뿐. 하나님이신 그분이 슬퍼하신다.

그분이 눈물을 흘린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말씀하신 대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다. 무덤에 묻혀 이미 부패해가던 그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바랄 수조차 없던 소망이 실현된다.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선포된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분의 높이를 말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 높은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찬란한 영광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우리의 가장 깊은 절망에까지, 죽음에까지 흘러든다. 절망의 심연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시는 그분의 눈물, 그 가장 낮은 곳에 임한 그분의 깊이까지가 실은 그분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곳에 함께하시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가장 높고, 가장 깊은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슬픔은 그 영광의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분의 슬픔까지가 곧 ‘그분의 광채’가 된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