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 초대 총리사를 역임한 해방 전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자
[399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한국기독교를 만든 증인들]
양주삼(梁柱三, 1879-1950?)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호는 백사당(白沙堂)이다. 양주삼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유동식)1) “한국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최재건)2)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린다. 미국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 신학 유학생이었으며,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였다. 한국 첫 신학 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서학, 기독론 등을 주제로 다루는 글을 발표했다.
양주삼에게 신학자로서의 재능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교회 정치가이자 조직자로서의 능력이다. 미국 북부와 남부, 캐나다와 호주에서 온 네 장로회 선교회가 일찌감치 1907년에 통일된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조직했던 역사와는 달리, 한국의 감리교회는 오래도록 미국 남북 감리교회가 각각 조직한 두 개의 감리교단으로 나뉘어있었다. 1930년에 이 두 조직을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고, 오늘날의 감독회장에 해당하는 총리사로 처음 취임한 인물이 양주삼이었다. 석사학위 소지자였던 그는 이 공로로 1931년에 버지니아의 랜돌프-메이컨 대학(Randolph-Macon College), 1932년에 일리노이의 게렛 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8년에 총리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및 총무, 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유지재단 이사, 배화고등여학교 이사, 북감리회 조선선교부 유지재단 이사 등, 감리회와 개신교 연합 기관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군국주의 전시체제를 식민지에 강요한 시기 다른 한국인 지도자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양주삼도 부역 협력의 길을 걸었다. 한국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가장 저명한 지도자이자 간판인 만큼, 그가 공적으로 보여준 협력의 농도도 짙었다. 친일 협력이 본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강요된 것인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그는 해방 후 1928년에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인사로 몰려 구금되었다가, 미국 감리교회 인사들이 항의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71세의 몸으로 납북되었다.
서북의 젊은 구도자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개신교 지도자 및 신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모판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 지방이었다. 1901년에 한국 첫 개신교 목사가 된 감리교의 김창식(1857-1929)과 김기범(1868-1920)은 모두 황해도 출신이었다. 첫 장로교 목사이자 장로교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선주(1869-1935)도 평안남도 출신으로, 모두 서북 사람들이었다. 양주삼도 평안도 사람이었다. 감리교 첫 목사는 아니지만, 해방 이전 감리교를 이끌었다.
양주삼은 1879년 1월 25일에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 홍문리에서 남원 양씨 양정섭과 어머니 김원실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첩을 얻어 따로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세 동생, 조부모와 함께 살아야 했다. 어린 시절 양주삼의 교육은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담당했다. 할아버지에게 여섯 살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이후 스무 살까지는 한학에 뛰어난 외삼촌에게서 동양 고전을 공부했다. 그러나 가정불화 등의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그는 열다섯 살을 전후로 한학에 더하여 불교와 동학 경전을 읽기도 하고, 여러 종교 지도자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청소년기부터 인생만사의 해결책을 찾아다니는 구도자였다.
그런 그가 삶의 방향을 바꾼 계기는 1890년대 초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방에서 전도를 시작한 미국 개신교(장로회/감리회) 선교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지성적 인물이었던 그는 특히 선교사들이 나눠준 문헌을 통해 기독교를 흡수했다. 그에게 감흥을 준 문서는 잡지 〈만국공보〉(萬國公報)와 소책자 《덕혜입문》(德慧入門)이었다. 〈만국공보〉는 1860년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선교를 시작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영 J. 앨런(Young John Allen, 1836–1907)이 발간하던 잡지였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서구 문명 전달, 근대 언론 매체 창달, 사회 개혁을 취지로 광범위한 근대 서양 사회 및 문화 이슈를 다루었다. 《덕혜입문》은 웨일스 출신의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 회중교회 선교사로, 한자로 성경을 번역하고 다수의 전도용 문헌을 쓴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1831–1912)의 작품이었다. 이 책은 동양의 전통 종교들이 완성된 진리인 기독교로 가는 디딤돌이자 계단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담은 성취론(成就論)의 틀에서 작성되었다. 이 책은 1897년에 처음 출간된 후, 1915년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게 된다. 양주삼은 중국에서 1897년에 발간된 뒤 한국에 들어온 책을 한자로 읽은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1898년부터 교회 출석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에 등록 교인이 되었다.
신자가 된 후 기독교와 서양을 더 알고 싶은 열망에 불탔던 양주삼은 1899년에 상경해서 뽕나무와 누에를 길러 실을 생산하는 양잠전습소에서 교육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1901년에는 서울 주재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아 1901년 5월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Chinese College)을 운영하며 〈만국공보〉를 발간하던 앨런 선교사를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서서원에 도착한 그는 앨런에 이어 원장으로 재직하던 파커(R. A. Parker)와 면담한 후 서원의 학생이 되었다. 입학을 위해 그가 한문으로 써서 제출한 유학 목적 설명서에는 학업을 마치고 고국에 기독교 신앙을 전하겠다는 결의가 분명히 드러나있다.
고국을 떠날 때에 공부에 성공하지 못하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려고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다행히 파커 원장님께 소개 편지를 보였더니 나를 불쌍히 여겨 서원에 입학시켜 주시고 거처할 방까지 주시고 육체를 기를 음식을 주시며 교실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그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몇 해가 되든지 반드시 학업을 마친 후에야 고국에 돌아가 전국 동포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전할 것을 바라고 계획하고 있습니다.3)
양주삼은 입학 다음 해 10월에 세례를 받고 남감리교회 소속 신자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세례를 받아 남감리회 신자가 된 이로는 15년 전 1887년 4월에 입교한 선배 윤치호(1865-1945)가 있었다.4) 이후 양주삼은 열네 살 많은 학교와 교단의 대선배 윤치호와 평생 긴밀하게 교류하는데, 윤치호가 남긴 선례를 많이 따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목회와 유학
입학하고 3년 후 양주삼은 전교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스물여섯 살이던 1905년에 중서서원을 졸업한 양주삼은 유학을 이어가기로 했다. 당시 양주삼은 신학보다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거나, 신문학을 공부하여 언론인이 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10월에 먼저 영국으로 갔으나 재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머물며 교포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그를 초대한 이들은 서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이었다. 한국 첫 남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C. F.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1849-1915)가 1901년에 은퇴한 후 1904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교회와 일본인 교회를 세워 목회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간 양주삼은 1906년 12월에 리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상항한인교회)를 설립하여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한인교회 대부분이 신앙 모임을 넘어 한민족 사회 공동체 기능을 했듯,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와 양주삼도 한인을 위한 문서운동을 벌였다. 그는 한글로 월간지 〈대도〉(大道, The Korean Evangel)를 발간해서 교포들의 교양 함양과 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수준의 중서서원이 최종 학력이던 양주삼에게는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할 자격이 부족했다. 이 과정에서 진로에 대한 그의 결심이 바뀐 것 같다.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되겠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1909년 7월에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남부 테네시 소재 밴더빌트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중서서원을 졸업한 후 윤치호가 걸었던 길과 같았다. 입학 후 3년째 되던 1912년 9월에 그는 남감리회 감독 콜린스 데니(Bishop Collins Denny)에게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데니는 1910년까지 밴더빌트의 도덕 및 정신철학 교수로 있다가, 감독이 된 인물이다. 이듬해에 밴더빌트를 졸업한 양주삼은 북동부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해서 1914년 6월에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는다. 더 공부하여 학자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귀국하여 조국 교회를 도우라는 남감리회 해외선교부의 뜻에 따라 12월에 미국을 떠나 이듬해 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총 10년간의 미국 생활이 끝났다. 중국을 포함한 유학 기간은 14년이었고, 고향 평안도 용강을 떠나 서울로 간 시기부터 계산한다면, 총 16년 동안 고향을 떠나있었다.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는 모든 교단을 통틀어 한국인 목회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학력을 가진 목회자였다.
한국 감리회 대표 신학자, 목회자, 행정가
1915년 1월 2일에 서울로 돌아온 양주삼은 이 시기부터 1950년에 납북될 때까지 35년간 한국에서 감리교 및 개신교 지도자가 맡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직책을 역임하며, 한국 감리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목회자, 행정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우선, 귀국하자마자 그는 감리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협성신학교(오늘날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그는 당시 한국 내 모든 교파를 통틀어 서양에서 유학한 첫 번째 신학교 교수였다. 장로회의 경우, 1922년에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남궁혁(1882-1950)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교수가 된 시점이 1927년으로, 그는 귀국 후 2년 지난 1929년에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따라서 감리교회가 장로교회보다 12년 빨리 한국인 미국 유학파 신학 교수를 보유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어로 신학을 정리하는 작업도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빨랐다. 양주삼은 1915년 1월에 귀국해서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자마자 한국 최초의 신학 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하여 1년 반 동안 주필을 맡았다. 장로회 평양신학교의 잡지 〈신학지남〉은 1918년에 창간된 후 줄곧 선교사 교수들이 편집하다가, 남궁혁이 귀국한 이듬해 1928년부터 편집장을 맡았다. 따라서 〈신학지남〉이 〈신학세계〉보다 창간은 3년, 한국인 편집장 선임은 13년 늦었다.
귀국한 양주삼은 그해 6월에 동향인 용강 출신으로 감리교 여자성경학원에서 가르치던 김매륜(1888-1980)과 결혼했고, 10월에는 남감리회 연회에서 장로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협성신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신학세계〉 창립 주필이자 편집자(1915.1.-1916.8.)가 되었다. 1900년에 형성된 종교교회와 함께 남감리교를 대표하는 자교교회 목사(1915.10.-1916.8.), 윤치호가 상하이 중서서원을 본떠 1906년에 개성에 세운 송도고보(한영서원(韓英書院)의 후신) 부교장(1916.9.-1918.10.), 남감리회의 해외 선교 개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교백년기념사업회 총무(1918.11.-1923.9.), 종교교회 목사(1919.9.-1921.9.), 남감리회 북간도지방 관할목사(1922.8.-1923.9.), 남감리회 만주·시베리아 선교사업 관리자(1923), 남감리회 전도국 총무(1923), 남감리회 철원지방 장로사(1924.9.-1926.8.) 등을 맡았다. 즉, 남감리회가 운영하는 기관의 중책을 거의 모두 역임했고, 협성신학교 등 미감리회(북감리회)와의 감리회 연합 기관에서도 가장 저명한 한국인으로 활약했다.
기독교 연합 기관인 연희전문학교에서도 1921년 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무려 21년간 이사를 역임했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도 1923년 9월부터 1943년 5월까지 20년간 이사로 활약했다. 능통한 영어 실력과 세계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감리회와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여 미국 남감리회 총회(1922, 1924, 1926),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총회(1927), 예루살렘 국제 선교대회(1928)에 참여했다. 해방 이전 양주삼은 윤치호· 김활란·백낙준 등과 함께, 당대 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한국 기독교인이었다.5)
기독교조선감리회 초대 총리사
1920년대 말까지 약 15년간 감리교계에서 전방위로 활약한 양주삼의 공로는 결국 한국 첫 통합 감리교회 총리사라는 직책으로 보상받았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초기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 역사는 교단 연합과 협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상기했듯이, 교단 연합의 미덕을 먼저 보여준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1884년부터 차례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회, 호주 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는 국적과 전통이 다른 독립된 네 교단이어서, 선교지 분할 정책하에 선교회별로 각 지역을 할당받아 선교에 임했다. 그러나 1889년부터 장로회선교공의회를 만들어 통합된 연합 조직을 운영했고, 1907년에 마침내 단일한 한국의 첫 장로회 치리회인 독노회를 창설했다. 1912년에는 독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로 발전했다. 서양의 네 개 장로회 선교회가 자신들의 지부를 한국에 각각 이식하지 않은 것이다.
감리교는 이와 달랐다. 1884년에 한국에 온 북감리회(미감리회)와 1895년에 한국에 온 남감리회는 총회를 자국에 둔 상태에서 한국에는 각각 선교회, 선교연회, 연회를 조직으로 두었다. 한국의 두 감리교회는 본국 총회에서 파송하는 미국인 감독에게 관리를 받아야 했다. 한국에서 두 교단의 관계가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북감리회보다 10년 늦은 1895년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시기부터 두 선교회는 서로 인력과 자원을 교환하며 협력했다. 1903년부터는 북감리회의 신앙 잡지 〈신학월보〉에 남감리회가 참여했고, 북감리교 운영의 배재학당에도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교사를 파견했다. 1904년에는 합동으로 영어 선교 잡지 〈The Korea Methodist〉를 발행했고, 1905년에는 한글 신문 〈그리스도인회보〉도 공동 발간했다. 협성신학교도 1907년부터 합동 운영했고, 1920년에는 협성여자신학교도 공동 운영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교단 협력과 교단 통합을 구분했다. 본국 상황 때문이었다. 1925년에 미국 남감리회 총회가 북감리회와의 통합을 부결했다. 그러자 한국의 두 감리교회 인사들은 본국 총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 감리교의 합동을 추진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 5월까지 양 감리회 선교사, 한국인 목회자, 한국인 평신도 대표들이 양 교단의 합동을 추진하기 위한 연구위원 모임을 여섯 차례 가졌다. 이들은 본국 감리교단들에 허락을 구하는 3개 항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1928년 5월에 북감리회 총회, 1930년 5월에 남감리회 총회가 한국의 두 감리교회 통합안을 승인하자, 합동전권위원들의 추진하에 1930년 11월 29일에 “조선미감리회와 조선남감리회가 합동하여 자치하는 한 조선감리회를 창립”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2일에는 협성신학교에서 제1회 기독교조선감리회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교단의 수장을 영국이나 미국식으로 ‘감독’(bishop)이라 부르는 대신,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미국 교회들로부터 지속적인 선교 인력과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한국교회 입장에서, 미국에 있는 ‘감독’과 동일한 지위를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뜻, 그리고 장로회의 총회장과 유사한 민주주의적 직제를 갖추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1930년 12월에 한국에서 두 감리회가 통합되었다는 사실은 본국의 모교회도 이루지 못한 일을 먼저 해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1회 총회에서 선출된 한국 첫 통합 감리교회 총리사가 바로 양주삼이었다.6)
그간 양주삼이 한국 감리교회를 위해 한 업적, 무엇보다도 두 한국 감리회의 통합을 위해 쏟은 노력과 초대 총리사로서의 위업을 미국의 감리교 교육기관들도 인정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남부 버지니아주 애슐랜드에 소재한 감리교 계열의 랜돌프-메이컨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다음 해 1932년 6월에는 북부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 위치한 게렛 신학교도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로써 밴더빌트와 예일에서 공부했지만 아쉽게 박사학위 공부를 이어갈 수 없었던 그는, 비록 명예 학위를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후 양주삼 박사(Dr. Yang)로 불리게 되었다.
오명: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시체제와 친일 부역
1930년 12월 1회 총회에서 초대 총리사로 선출된 양주삼은 1934년 10월에 재선된 후, 1938년 10월까지 두 회기에 걸쳐 8년간 총리사직을 역임한 후 물러났다. 총리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그는 조선기독교서회 이사(1938-1942) 및 총무(1941-1942), 기독교조선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1938-1940),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 이사(1940-1947), 배화고등여학교 이사(1941-1943), 북감리회 조선선교부 유지재단 이사(1941-1948) 등을 역임하며 여전히 한국 감리회를 대표하는 독보적 인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과 총독부가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본국과 식민지 사람들을 물리적·정신적으로 강제 통합하려 했던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전시체제에서 이토록 눈에 띄는 자리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다. 그의 노년은 영광보다는 오명으로 점철되었다. 일본의 신사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계기는 1876년 강화도조약 및 이에 따른 개항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에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신사를 도입했다. 그러나 1910년에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총독부가 신사를 공적 공간으로 배치하고, 한국민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참배를 강요했다. 특히 학교에서 강요된 사례가 많았다. 다만 한국인, 그중에서도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인식한 기독교인의 집단 반발 때문에 강제하지는 못했다.
일본 당국이 신사참배를 국가정책으로 강하게 밀어붙이게 된 계기는 본토와 식민지 전역에 군국주의 전시체제가 적용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였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재개한 당국은 전 국민과 식민지민의 정신적 통일을 이룰 수단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역시 처음은 교육계였다. 1932년부터 애국심과 충성심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전국 학교에 강요된 신사참배를 기독교계 학교들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그러나 1935년 11월에 일어난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강경한 대응으로, 기독교계 학교의 입장에 분열이 생겼다. 일부 학교는 총독부가 주장한 대로 신사참배를 단순한 국가 의례나 애국심 함양 노력으로 보아 학교를 유지하고자 했고, 일부 학교는 이를 거부하다 교장이 파면되거나 심지어 폐교되는 운명을 맞았다.
학교에 이어 각 종교 단체에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처음에 극렬히 저항하던 기독교계는 1936년에서 1938년 9월 사이에 차례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의례로서 수용하여 결의하며 굴종의 길을 걸었다. 마지막까지 버틴 교단이 1938년 9월 27회 총회에서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회였다. 이 시기에 감리교를 이끈 수장이 바로 총리사 양주삼이었다. 이미 언급했듯, 그는 1930년 12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총독부의 압박이 가장 강했던 8년의 기간 내내 감리교 최고 수장이었다. 감리회는 장로회보다 2년 이른 1936년 6월에 양주삼이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참석한 후 일제의 입장에 순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리회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자, 2년 후 1938년 9월에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나 교리 위반이 아니라는 기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했다.
연전(年前) 총독부 학무국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조회한 바를 인쇄 배부한 일이 있거니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잘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의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즉, 1년 임기의 장로회 총회장과는 달리, 이 시기 8년 내내 한국 감리교회의 유일한 수장이었던 총리사 양주삼은 1936년부터 감리교회를 신사참배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교단의 수장이었던 양주삼은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용인한 소극적 참여자였을 뿐일까?
양주삼이 해방 전 감리교에서 워낙 독보적인 인물이었으므로,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자들이 내린 평가는 크게 관용적 입장과 비판적 입장으로 나뉜다. 감리교 역사가들이 대체로 관용적이다. 예컨대, 감리교 역사가 장병욱은 “마음엔 없지만 감독직을 내어 놓은 후에도 여러 가지 본의 아닌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윤치호 박사의 난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의라기보다는 타의적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당시 웬만한 사람들은 형식적이나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7) 이덕주도 그를 “순수 기독교 신앙과 교회만을 생각하며 이것을 존속시키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던 교회인”으로 본다.8) 이덕주는 양주삼에 이어 1939년에 감리교 감독이 된 정춘수를 ‘적극적 순응자’, 그의 행보에 비협조적이었던 양주삼을 ‘소극적 순응자’로 구분했다.9) 윤춘병은 양주삼의 샌프란시스코 시절을 들어, 오히려 그를 민족주의자로 평가했다.10)
반대로 양주삼의 행보에 비판적인 글도 있다. 장로회 신학자 한숭홍은 양주삼이 “천황의 적자가 되어 갔고 그러면서 기독교의 본질도 훼절하여 일본적 기독교, 신도 기독교를 창도하는 그리고 찬양하는 탈기독교적 성향에 정착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11) 일반 역사학계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홍민기는 이 두 입장에 대한 균형 잡힌 종합을 시도하지만, 사료에 근거하여 양주삼의 친일이 그저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이루어진 소극적 행동인 것만은 아님을 논증한다. 우선 그는 양주삼의 친일 행적 양상이 신사참배라는 종교적 영역과 시국 연설이라는 일반적 영역으로 나뉜다고 지적한다. 종교적 영역인 신사참배의 경우, 그가 총리사 입장에서 1936년과 1938년에 교단과 교인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순응하기로 결의했다고 그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인 지도층 인사들을 동원하여 실시한 여러 시국 강연에서 그가 연설했던 내용은 소극적 참여를 넘어 적극적 부역 협력을 보여준다는 것이 홍민기의 판단이다. 예컨대, 1937년 7월 26일에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종교 단체 연합 시국 강설회의 연설,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적국의 학생병을 치자’ ‘전열-제4년의 각오-총후는 총무장-임전무퇴의 특공대로’ 같은 신문 기고문과 논설, 《정의의 필승과 나의 깨달음》 같은 소책자가 대표적이다.
홍민기는 이 중 《정의의 필승과 나의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양주삼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야나하라 추산(梁原柱三)으로 써서 1942년 7월에 조선기독교서회에서 간행한 이 소책자는, 전해 12월 13일에 경성중앙방송국에서 했던 강연 원고와 1942년 1월 순회강연 원고를 토대로 출간되었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에 대한 양주삼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책 내용을 주요 주장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941년 12월 8일에 개시된 태평양전쟁은 천황이 선전포고한 것이므로, 황국신민인 조선인이 이에 따르는 것은 국가적 의미이며 정중한 애국 의례다. 천황의 신민이 된 것은 무상의 영광이며, 천황의 덕으로 한반도는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내선일체 실행으로 천황의 충량한 신민이 되었으므로, 천황을 봉대하고 일사보국해야 한다.
2. 태평양전쟁의 적국인 영미를 한국 사회가 지금껏 잘못 인식했다. 영미는 영토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야심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침략자이며, 입으로는 정의를 주창하지만 진실은 불의를 행하는 위선자이며, 실력도 없으면서 허장성세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비열자다. 따라서 전쟁이 종국에는 일본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다.
3. 일본의 필승이 눈앞에 닥쳐있으므로, 조선의 신민은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당국을 절대 신뢰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말고, 공습을 겁내지 말며, 장기전을 예상하고, 한국인에게 천재일우의 호기임을 알고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4. 따라서 출전해야 한다면 총을 메고 출전하며, 괭이를 들고 땅을 파야 한다면 즉시 괭이를 들어야 하며, 구루마를 갖고 짐을 실어야 한다면 즉시 구루마로 짐을 실어 나르며 적극적으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해야 한다.12)
해방 후 1948년 10월에 반민특위에 의해 양주삼은 적극적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구금되었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 웰치 감독이 양주삼의 구금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소식을 주미대사 장면으로부터 들은 감리교인 대통령 이승만은 이를 국제적 망신이라 칭하며 양주삼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해방 후에도 그는 국제연합 조선협회 대표이사(1948), 대한적십자사 총재(1949-1950) 등, 저명한 국제기관의 한국인 대표직을 역임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공산당 점령하의 서울에서 8월 23일에 71세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여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3)
1)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1): 한국 최초의 신학자 양주삼 편〉, 《기독교사상 제116호》(1968.1.), 60-66쪽.
2) 최재건,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양주삼 목사’, 최재건의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2021.10.19.).
3) 최재건, 위의 글.
4) 홍민기, 〈일제강점기 양주삼의 태평양전쟁 이해: 강연원고 正義の必勝と吾人の覺悟를 중심으로〉, 《대학과 선교 제54호》(2002), 242쪽.
5) 홍민기, 위의 글, 233쪽.
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Ⅱ》(기독교문사, 1990), 177-186쪽.
7) 장병욱, ‘한국 감리교 초대 감독-양주삼 박사(1879-1950)’, 《한국 감리교의 선구자들》(성광문화사, 1978), 162쪽. 홍민기, 239쪽에서 재인용.
8) 이덕주, 〈梁柱三목사의 改宗實記〉, 《監理敎와歷史》(1990.9.), 9쪽. 홍민기, 240쪽에서 재인용.
9) 이덕주, 〈양주삼 목사의 생애와 신학 사상〉, ‘이 달의 감리교 인물-양주삼 총리사 추모 기도회 및 강연회’(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자료관 주관, 2003.6.24.), 6-8쪽. 홍민기, 240쪽에서 재인용.
10) 윤춘병, 〈再發掘 梁柱三 總理師〉, 《監理敎와歷史》(1990.9.), 10쪽. 홍민기, 240쪽에서 재인용.
11) 한숭홍, ‘양주삼의 생애와 신학사상(Ⅲ)’, 《한국신학사상의 흐름(상권)》(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35쪽. 홍민기, 241쪽에서 재인용.
12) 홍민기, 245-262쪽.
13) 정진석, 〈6·25전쟁 중에 납북·피살된 종교인들〉, 《기독교사상 제738호》(2020.6.).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